[흥] 황금 물결 출렁이는 순천만 가을

입력 2017-11-02 00:05:41

갈 테면 가라지 철새 떼야, 흔들리는 내 모습이 처량해 보인다면…

일몰 무렵의 순천만 습지. 붉은 노을 아래 갈대의 황금 물결이 더욱 황홀하게 보인다.
일몰 무렵의 순천만 습지. 붉은 노을 아래 갈대의 황금 물결이 더욱 황홀하게 보인다.
영국의 찰스 젱스가 순천의 지형을 그대로 축소해 담은 6개의 언덕과 호수 등으로 구성한 국가정원 내 순천만호수공원. 한윤조 기자
영국의 찰스 젱스가 순천의 지형을 그대로 축소해 담은 6개의 언덕과 호수 등으로 구성한 국가정원 내 순천만호수공원. 한윤조 기자
정원 서편 홍학떼가 노니는
정원 서편 홍학떼가 노니는 '물새놀이터'.

가을은 만물이 익어가는 시기다. 강변의 갈대와 산등성이 억새도 금빛'은빛 자태를 뽐내고, 노랗게 고개 숙인 벼도 빨갛게 매달린 감나무 감도 안간힘을 써 마지막 속을 영근다.

하지만 가을은 찰나다. 어느새 더위가 가셨다 싶더니 금세 찬바람이 훅하니 밀고 들어와 곧 겨울이 가까워 옴을 예고하고 있다. 가을을 잠시나마 가슴에 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파란 하늘 아래 황금 물결로 일렁이는 갈대밭이 끝도 없이 펼쳐진 순천만 습지는 워낙 널리 알려져 익숙한 곳이지만, 가을 풍경을 만끽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의 경쾌한 소리는 잡념을 잊게 하고, 때마침 겨울을 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흑두루미를 비롯한 수많은 철새 떼가 펼치는 군무도 경이롭다.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사색과 낭만의 깊이도 더욱 깊어지는 곳이다.

인근에 위치한 순천만국가정원, 낙안읍성 등을 함께 돌아보면 하루 여행지로 제격이다. 순천시는 3일부터 5일까지 '순천만갈대축제'를 개최하고, 9월 말부터 시작된 순천만국가정원의 '정원갈대축제'도 5일까지 계속된다.

◆안개의 도시 순천, 생태도시로 거듭나다

순천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안개 낀 도시 '무진'의 배경이다. '무진기행'은 서울로 표상되는 일상의 공간과 무진이라는 탈(脫)일상의 공간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몽환적이고 탈속적인 장소로 그려지는 '무진'은 안개의 도시다. 김승옥은 "밤사이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고 썼다.

순천이 안개로 가득한 것은 대대포구와 갯벌, 습지 등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습도가 워낙 높아 안개도 잦다. 이곳은 한때 김승옥의 소설 속에서나 새삼 재조명될까, 사람들의 뇌리 속에 선명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하는 그저 작은 도시였을 뿐이다. 심지어 1990년대 중반까지 순천만 습지는 골재 채취와 쓰레기 누적으로 신음하던 '버려진 땅'이었다.

이런 순천을 세계 5대 습지이자 전국적으로 손가락에 꼽히는 관광명소로 탈바꿈시킨 데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3년 한 기업이 골재 채취 사업을 추진하자 주민들은 "순천만 갈대숲을 보전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후 주민들은 당국과 기업을 상대로 환경영향평가와 생태계 조사 등을 요구했고, 1996년 최초의 생태조사가 이뤄지자 순천만이 희귀한 철새와 다양한 염생식물의 보고(寶庫)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정부는 2003년 이 일대를 해양수산부 갯벌 습지보호지역 제3호로 지정 고시했으며, 2006년에는 국내 연안 습지 최초로 '람사르'에 등록됐다. 순천만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이렇게 시민의 힘으로 회복시키고 지켜낸 '보물'이기 때문이다.

◆가을 감성 자극하는 갈대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갈대는 단지 식물이 아니라 감성의 언어가 된다. 불어오는 바람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살며시 춤을 추는 갈대의 모습은 상당히 몽환적이다. 특히 해질 무렵 순천만에서 보는 갈대밭은 더욱 서정적이고 매혹적이다. 붉은 석양빛을 받아 더욱 짙은 로즈골드빛으로 일렁이는 순천만 습지는 장엄한 자연의 대서사시다.

순천만 갈대밭은 넓이 5.4㎢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순천시내를 흐르는 동천과 상내면에서 흘러온 이사천이 만나 대대포구에서 순천만으로 흘러가는 물길을 따라 빽빽한 갈대 군락이 50㏊에 걸쳐 펼쳐진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습지)에 들어서면 순천만 천문대와 자연생태관, 순천만 역사관이 먼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갈대 기행은 이후 만나는 '무진교'를 건너면서부터 본격 시작된다. 이곳에서부터 용산전망대 올라가는 산길까지 1㎞가량 이어진 목재 데크를 통해 갈대밭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갈대밭 사이로 흘러든 바람이 잔잔히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느낌은 어디에 비할 바 없다.

갈대는 속과 뿌리가 비어 있는 통기형 구조로, 온전히 제 몸을 비워 갯벌 생명을 키워내는 역할을 한다.

갯벌 깊숙한 곳까지 산소가 통할 수 있게 해 줘 갯벌을 건강하게 만든다. 자연의 상생법이다. 갯벌을 자세히 내려다보면 작은 칠게, 농게, 방게가 부지런히 이동하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게는 철새와 함께 순천만의 대표적인 생물이다. 게는 서식지 마련을 위해 갯벌에 깊은 구멍을 뚫는데, 이런 활동 역시 청정한 갯벌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용산전망대는 꼭 방문해야 할 뷰포인트다.

전국의 사진 작가들에게 각광받는 최고의 출사지이기도 하다. 용산전망대는 갈대밭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산책로가 가파르기 때문에 꽤 숨을 헉헉대야 하지만, 분명히 올라가야 할 이유가 있다. 'S'자 곡선을 그리며 굽이치는 물결의 모습과 갈대밭, 여기에다 일렁이는 물결 위로 낙조가 붉은 커튼까지 드리운 풍경은 너무나도 위엄있고 엄숙해, 보는 이를 그만 숨죽이게 만든다.

◆알록달록 가을옷 갈아입은 순천만국가정원

순천만 습지에서 5㎞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순천만국가정원(이하 순천만정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지정된 국가정원 1호다. 2013년 개최된 국제정원박람회장을 손봐 '국가정원'이라는 명칭으로 2015년 새롭게 문을 열었다.

순천만정원의 키워드를 규정짓자면 '휴식'이 아닐까? 이곳만의 차별점이라면 그 어떤 관광명소보다 관람객들을 배려한 수많은 파라솔과 선베드, 의자 등이 곳곳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관람'이라는 목적만으로 부지런히 돌아보는 것만 아니라, 발갛게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하늘도 한번 쳐다보고, 편안히 누워 기지개도 한번 켜고, 한가롭게 책도 읽으면서 자연 속에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순천만정원은 동쪽과 서쪽 공간으로 나뉘어진다. 동문으로 들어서면 맨 먼저 시원한 풍경의 순천만호수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영국의 찰스 젱스가 직접 디자인한 정원으로 순천의 지형을 그대로 축소해 담은 6개의 언덕과 호수, 그리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데크 등으로 구성돼 있다.

동문 왼편으로는 가을의 아이콘인 국화꽃이 형형색색의 화려함을 뽐낸다. 국화정원은 억만 송이 국화꽃을 통해 순천만의 바닷물이 차오름을 반복하듯 꿈, 사랑, 추억이 행복으로 차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 외에도 동편에는 독일과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일본, 태국 등 세계 각국의 정원을 비롯해 메타세쿼이아길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그중 특히 나눔숲에는 최근 SNS에서 핫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핑크뮬리(분홍억새) 밭이 조성돼 있는데, 지금은 절정을 조금 지나 보랏빛으로 꺼져가고 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정원 서편은 순천만 WWT 습지, 순천만 국제습지센터, 나무도감원, 한국정원 등을 돌아볼 수 있다. 이 중 최고의 인증샷을 위한 가장 매혹적인 장소는 홍학떼가 노니는 '물새놀이터'다. 쿠바 홍학, 유럽 홍학, 칠레 홍학 등이 한쪽 다리를 들고 유유히 노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동편과 서편을 연결하는 '꿈의 다리'도 매력적인 볼거리다.

설치미술가 강익중이 만든 꿈의 다리는 세계 최초의 물 위에 떠 있는 미술관이다. 유리타일 1만 개 속에는 세계 각국 어린이로부터 받은 그림 14만 점이 빼곡히 채워져 있고, 다리 외벽은 강 작가가 일상 속 유쾌한 시구를 모자이크 타일 형식으로 담아 보는 재미, 읽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다.

♣Tip

▶순천만생태공원과 순천만정원은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입장료 8천원을 내면 통합권을 발급받아 두 곳 다 관람이 가능하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오후 너무 늦은 시간 도착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오후로 접어들면 관람 시간을 감안해 발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순천 만정원 서편에서는 순천만 습지 옆에 위치한 순천 문학관까지 오갈 수 있는 소형 무인궤도 열차(PRT)가 운행된다. PRT를 타고 문학관으로 이동해 하차한 뒤 순천만 초입 무진교까지 1.2㎞ 거리는 갈대열차로 옮겨 타 습지까지 이동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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