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한 나의 풍류 '허튼가락'은 음악의 그물망 뜯어낸 자유로운 연주죠"
"사는 게 재미있습니까?"
인터뷰이가 먼저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냥 그렇지요. 그래도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다 다릅니다. 좋게 풀어가려고 노력하는 게 우리네 삶이지요"라고 했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듣는 듯했다. 하기사 그는 한때나마 스님이었다.
풍류가객 임동창(61) 씨를 만났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 있는 '풍류학교'.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고즈넉한 곳이다. 임 씨는 1996년 도시를 떠나 시골생활을 하고 있다. 충남 서천, 전북 남원을 거쳐 4년 전 완주에 터를 잡았다.
그는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고, 또한 (피아노 치는) 국악인이다. 하지만 이런 카테고리로 그를 묶을 수는 없다. 그의 삶과 예술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처럼 소요(逍遙)하고 있다.
-한민족 고유의 '풍류(風流) 사상'을 널리 알리고 있다. 지난 9월부터 EBS 라디오 방송 '임동창의 풍류방'을 진행하고도 있다. 풍류란 무엇인가?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하니 왈풍류(曰風流)라'(나라에 지극히 신령스러운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문구는 신라 때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온다. 풍류는 유불선(儒佛仙)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우리 조상들은 삶의 문화를 통해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전수했다. 즉, '사람에게 이로운 것, 널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풍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풍류를 잊었다. 요즘 사람들은 '술 먹고, 띵까띵까' 하는 것을 풍류로 여긴다. 본체는 어디 가고 말단만 남아 있다.
12년 전부터 풍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맞는 풍류를 알리기 위해 곡을 쓰고, 공연하고, 책도 썼다.
-전국을 다니며 '달성아리랑' 등 아리랑 180여 곡을 완성했다.
▶시'군 단위 이상의 지역마다 한 곡씩 만들었다. 170여 곡의 경우 노랫말까지 지었다. 아리랑 창작을 위해 지역별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다. 우리 고유의 가락으로 만든 것도 있고, 이국적 정취를 살린 노래도 있다.
달성아리랑은 국내에 피아노가 처음으로 들어온 사문진을 주제로 했다. 경쾌한 굿거리장단과 휘모리장단을 넣었다. 2013년 달성군에 선물했다.
-'달성 100대 피아노 콘서트'를 총지휘했다.
▶2012년에 첫 공연을 했다. '빡세게' 했다. 100명의 피아노 연주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2016년까지 다섯 번을 내가 맡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내 역할은 지난해 공연까지였다.
-'풍류학교'는 어떤 곳인가?
▶학생들을 상대로 한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풍류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아이들이 자기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행복하고, 신명나게, 자유롭게, 하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일깨우는 것이 풍류교육의 목표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흥야라.' 이것이 풍류학교의 구호다. 이곳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풀어짐'이다. 내가 정리한 몸짓, 마음짓, 흥짓으로 몸을 풀고 머리를 텅 비우게 한다. 그러면 어두운 감정의 찌꺼기들을 없애고,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오고, 무엇을 배우나?
▶음악은 필수다. 피아노를 치고, 춤을 추고, 노래도 한다. 여럿이 함께 생활하면서 배려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연습이다. 기자를 하던 사람은 여기서 생활한 뒤 다시 세상으로 나가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대학 공부를 거부했던 청년은 여기서 자기의 길을 찾아 뒤늦게 대학 진학을 했다. (10명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교육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강습비도 없다. 다만 숙식을 하기 때문에 각자 생활비를 분담해야 한다. 입학하려면 이곳 식구들의 만장일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연령층은 20~40대. 11년째 공부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작곡을 처음 시작한 열입곱 살부터 '오롯한 내 음악'을 화두로 삼았다. 그리고 2010년 '허튼가락'이라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발표했다.
▶허튼가락은 임동창의 풍류이다. 음악이지만,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된다. 시간 예술인 음악의 그물망을 뜯어내고 내 마음대로 연주하는 것이다. '허튼'은 자유로움이다. '허튼소리'라고 할 때 그 허튼을 의미한다. (연주자, 작곡가, 방송진행자로 인기를 끌던 그는 2000년 "오롯한 나만의 음악을 만들 때까지 공부만 하겠다"고 선언하고 외부활동을 중단했다. 10년 후 창작곡집 '임동창의 풍류, 허튼가락'을 발표했다. 악보의 아무 곳에서나 연주를 시작해도 음악이 되고, 연주자에 따라 빠르기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다. 허튼가락은 한국 전통음악인 향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악공연을 다니던 장사익 씨를 가수의 길로 이끈 사람이 임동창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익이 형은 당시 대금과 태평소를 연주하던 사람이었다. 1994년 어느 날 공연 뒤풀이 자리였다. 가수 서유석, 임지훈도 있었다. 누군가 장사익에게 노래를 시켰다. 사익 형은 자작곡을 불렀다. 그때 나도 모르게 '얼씨구' 추임새가 나왔다. 그 노래를 듣고, 사익이 형에게 "형은 세상(가요계)으로 나가야 한다"고 권유했다. 형은 "박(拍子)을 잘 잡지 못한다"며 엄살을 부렸다. 그래서 "이렇게 뒤풀이에서만 노래를 부르면 가슴에 그늘이 남을 것이다. 한 명이라도 형의 노래에 공감하면 형도, 노래를 듣는 사람도 삶의 응어리가 풀어지게 된다"고 밤새 설득했다. (장사익은 1995년 데뷔 앨범 '하늘 가는 길'을 발표하면서 소리꾼이 됐다. 그의 나이 45세. 임동창(피아노), 김광석(기타), 김규형(타악)이 연주를 맡았다.)
-2012년 '피앗고'(피아노와 가얏고의 합성어)란 악기를 만들었다. 외형은 피아노인데 뭐가 다른가?
▶소리가 다르다. 우리 음악을 연주하기에 적합한 피아노의 음색을 찾고 싶었다. 피아노의 소리는 엉큼하다. 피아노의 줄은 쇠줄인데 쇠소리가 안 난다. 양털 해머로 때리기 때문에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피앗고는 나무 해머를 사용한다. 그래서 쇠줄 본연의 소리를 낸다. 살아서 꿈틀대는 소리다. 우리 음악의 생동감을 표현하기에 딱이다. 올해는 피앗고로 허튼가락을 연주한 음반을 낼 생각이다.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중학교 2학년 때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내 몸으로 들어왔다. 이후 혼자 학교 음악실에 들어가 피아노를 쳤다. 군산 변두리의 가난한 집의 아들에겐 '피아노 레슨'은 꿈도 꾸지 못할 사치였다. 하지만 레슨의 기회가 있었다. 군산에서 유명한 선생님께 한 달치 레슨비 3천원(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을 내고 배웠다. 이후 선생님은 우리 집 형편을 알고 그 뒤부터 돈을 받지 않으셨다.
-부인 이효재 씨 역시 유명인이다.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부인과는 따로 살고 있나?
▶나는 시골 삶이 좋고, 각시는 서울살이가 편하다. 우리는 형식과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 부부라고 해서 꼭 같이 살아야 하는 법은 없다.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전화 통화는 매일 한다. 우리는 2000년에 만났다. 지금도 전화로 목소리를 듣거나, 만나면 설렌다.
(이효재 씨는 한복디자이너, 보자기 아티스트, 자연주의 살림법 주창자다. '효재처럼 살아요' '효재처럼 풀꽃처럼' 등의 책을 냈다. 의상뿐만 아니라 보자기나 생활용품을 디자인해서 만든다.)
-스님처럼 파르라니 삭발을 하는 이유는?
▶편하다. 머리카락이 길면 가렵다. 1988년부터 빡빡머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 출가했을 때 머리를 밀었는데, 그때 느낌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출가를 했나?
▶내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고교생 시절, 좋아하던 여학생을 집에 바래다주면서 밤하늘의 별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그 느낌을 노래로 만들기 위해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불교 서적을 몇 권 읽은 뒤, '나를 알아야 나의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천 용화사에서 9개월 동안 공양주로 지낸 뒤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보림(寶林)이었다. 입대 영장을 받는 바람에 환속을 했다.
-자유인으로, 때로는 기인으로 살아온 것 같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어려서부터 자유의지로 살아왔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에 충실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마음이 내켜야 한다. 돈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전국을 떠돌며 아리랑을 작곡한 것도 내 돈을 들여서 했다. 인간의 삶에는 기쁨보다 눈물이 많다. 굴곡지고 부끄러운 부분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다른 사람의 삶도 아름답게 보인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풍류 문화를 널리 보급할 계획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풍류 프로그램을 만들어 삶에 찌든 사람과 세상에 도움을 주고 싶다. 1년 동안 스마트폰으로 (자연 상태의) 물 사진을 많이 찍었다. '물처럼'이란 제목으로 음악'영상 작품을 만들 생각이다. 물론 돈벌이가 되지는 않겠지만.
◆임동창은?
1956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15세에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 이길환 선생을 사사. 18세에 제1회 월간음악 콩쿠르에서 고등부 1등을 차지했다. 21세에 인천 용화사로 출가해 스님이 됐다. 군 입대를 하는 바람에 환속했다. 30세에 서울시립대 작곡 전공으로 입학. 대학시절에 현대음악의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경험했다. 31세 때 김자경 오페라단 상임 반주자 및 지휘자로 활동. 35세에 김덕수패 사물놀이를 만났다. 이때부터 국악 명인'명창들과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다.
45세에 외부 활동을 접고 자신의 음악을 찾아 나섰다. 10년 뒤인 55세에 '허튼가락'이란 새로운 음악 장르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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