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해탄
동해 건너 흘린 눈물
1994년 2월 현해탄을 건너 일본 땅을 밟았다. 선조들이 뱃길로 갔지만, 나는 비행기로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외교관 발령을 받고 주일한국대사관 수석교육관으로 부임했다. 난생 처음 해외 근무라 마음이 설렜다.
일본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86년 봄이었다. 일본 국제교류기금 초청을 받아 일본 전 지역을 둘러보았다. 친절한 사람들, 깨끗한 거리, 질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은 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산에는 숲이 우거지고 계곡물은 콸콸 흘러내렸다. 그런데 곳곳에서 만난 재일동포들의 향수어린 이야기를 들으면 서글퍼졌다. 그들이 외로워보였다.
대마도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갈라놓은 현해탄. 깊고 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아시아 대륙에서 삐죽 뻗어 나온 반도와 대륙에서 떨어져나간 열도를 이어주는 바다다. 찢겨져나간 그 아픔의 자리에 고통의 눈물이 스며들었다. 상처와 슬픔을 안고 있는 반도와 열도는 서로 창과 방패를 들었지만 사실은 서로를 아쉬워했다. 가야와 백제 문화가 들어갔고 조선 통신사가 드나들었던 곳도 여기였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이 징병, 징용, 정신대로 끌려갔던 뱃길도 이곳이었다. 그래서 현해탄은 한민족의 슬픔과 아픔과 분노까지 모두 알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 해방과 함께 찾아온 남북 분단은 재일동포에게도 비극을 안겨주었다. 일제에 시달려왔지만 이제까지 하나였던 재일동포 사회는 북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남을 지지하는 민단으로 갈라졌다. 조총련은 전국에 초중고교에 대학까지 세워 민족교육을 하고 있는데 비해 민단은 도쿄와 오사카 교토에 민족학교를 세웠을 뿐 2,3세 대부분은 일본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집에서도 모국어를 쓰지 않아 우리말을 모른다. 그래서 본국 정부가 민족교육을 위해 교사를 파견하게 된 것이다.
내가 부임하던 그해 봄, 가 오사카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한 해에 한 번 일본 지역을 돌아가면서 개최되었다. 일본 각 지역의 민단 관계자와 한국에서 파견된 교육관, 교육원장, 교장, 교사 모두가 참석하였다. 지역별로 교육 사례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어느 교육원장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한국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해도 오지 않아요. 수강생 반이 일본인 이예요"
어느 교육원장은 교포들이 넓게 흩어져 살고 있어 몇 그룹을 정해 현장 방문지도를 한다고 했다. 재일동포 3세인 처녀 선생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모국에 유학 가서 우리말을 배우고 난 후 고향인 오사카에 돌아와 열심히 가르쳤다. 그런네 하루는 민단 간부가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고 하면서 울먹였다. "한국말을 배워 뭣 하느냐"고 하면서 자식을 데려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수석 교육관으로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만 갔다
사이타마 현 히다카시에는 고마高麗신사가 있다. 그 곳에는 옛 고구려 유민들이 살고 있다. 한자로 고려라고 쓰지만 일본어로는 고마라 읽는다. 고려가 아닌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 그 곳 산과 강 이름도 고마야마高麗山 고마가와高麗川이다.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해 살고 있다. 고마 신사를 찾았다. 일본에 건너온 조상들이 그 동안 살아온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 고구려 후손들은 한국말을 못하고 있어 안타까웠다.
사이타마 한국교육원장으로 하여금 고구려 유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도록 했다. 인근에 사립 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호소다 교장은 한국을 무척 좋아했다. 한국인을 비서로 채용하고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배우도록 했다. 한국에 있는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학생들을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보냈다. 경주와 부여는 물론, 강원도 정선 땅을 찾아 정선아리랑을 부르도록 했다. 호소다 교장은 명예 서울시민이 되었고 한국여행기를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나는 고마 신사와 호소다 교장을 자주 찾아갔다.
이바라기현의 교육연구소 초청으로 학교 선생님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인 교사들로부터 자기 학교에 분명 조선족인 여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이 일본인 행세를 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질문해왔다. 사실은 많은 재일동포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감추고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재일교포 대부분은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본명本名과 통명通名이다. 일본 말로는 혼메이, 쓰메이라고 한다. 순수한 한국인의 이름 본명을 감추고 일상 사회생활에서는 일본식 이름인 통명을 사용한다. 중국에서 태어난 조선족은 국적은 중국이지만 한국어를 잘 한다.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족은 국적은 한국이지만 한국어를 못 한다. 중국은 소수민족 보호정책이고, 미국은 다민족 다문화정책인데, 일본은 동화同和정책이기 때문이다. 차별받지 않으려는 재일동포들의 소리 없는 절규에 마음이 아팠다. 누구를 원망하고 저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동기 유발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재일동포 자녀를 대상으로 한 였다. 본국에서 파견된 일본 전역 16개 한국교육원장이 지방 민단과 협조를 해서 이야기 대회를 실시하도록 했다. 지방 예선을 거쳐 도쿄에서 본선을 치렀다. 본선 입상자는 모국 방문을 시켰다. 이런 행사는 광복 후 처음 있는 일이어서 민단 사회가 떠들썩했다. 대한항공에 협조를 구했다. 서울 왕복 항공료를 반액으로 할인받아 삼십여 명의 학생을 인솔해 김포공항으로 들어왔다. 교포 3세인 이 아이들 상당수가 모국 방문은 처음이라 했다. 교육부 장관을 예방하고 청와대, 경복궁, 독립기념관, 민속촌을 둘러봤다.
중앙청으로 불리는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체 중이었다. 일제의 상징인 꼭대기 둥근 돔이 광장 밑바닥에 처량하게 놓여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어린 학생들과 이를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역사의 현장을 보면서 한말과 일제 때 우리가 처한 비극을 교포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전쟁고아의 일본인 어머니
1995년 가을, 이란 한일 합작영화를 보았다. 다우치지즈코田內千鶴子란 여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영화였다.
그녀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낯선 조선 땅 목포에 와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와 어느 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다. 당시 거리의 부랑아를 모아 공생원共泩園이라는 고아원을 운영하는 한국인 청년 윤치호 전도사를 도와 고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지 대장으로 불리는 윤치호와 결혼하고 윤학자尹鶴子로 살았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이 끝나 일본인은 바다 건너로 쫓겨 갔다. 윤학자도 친정인 일본 고치로 돌아갔지만 남편과 고아들을 잊을 수 없어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남편은 친일파로 몰려 모진 고생을 했다. 6·25 전쟁으로 인민군에 의해 인민재판을 받았다. 수복 후에는 부역했다고 불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들 부부를 괴롭힌 것은 고아를 위한 희생과 봉사에 따른 어려움이 아니라 정치와 이념이라는 요물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식량을 구하러 도청에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간 남편 윤치호는 행방불명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 윤기는 너무 안돼 보였다. 고아들은 공생원에 들어와서 어머니가 생겨 행복해 보였으나 윤기는 친어머니가 있어도 '어머니'라고 마음껏 불러보지 못했다. 고아가 아니면서 고아원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려보거나 투정 한번 해보지 못했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 귀국하면 목포 공생원에 가서 윤기를 꼭 한번 만나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귀국한 후에도 '목포'하면 공생원이 연상됐고, 아무 때나 그곳에 가기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잊고 지냈다. 그런데 우연히 일본 교토에서 만나게 되었다. 장애 학생 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이 일본의 양로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다기에 따라나섰다. 현해탄을 건너가는 코스였다. 부산을 떠나 시노모세키를 거쳐 일본 내해로 오사카로 가는 항로였다. 배에서 밤을 보내고 그 이튿날 상륙해서 교토에 있는 을 방문했다. 연세가 좀 들어 보이는 분이 우리를 맞았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에 나온 공생원의…."
"예, 제가 윤기입니다."
"아, 그렇군요.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꿈같았다. 다우치지즈코 여사의 아드님 윤기 이사장이었다. 목포 공생원에 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 했는데 일본 땅 교토에서 만난 것이다. "윤기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항상 궁금했다. 어린 소년이 아닌 칠십대에 접어든 그는 가난한 재일교포 노인들을 위해 일본 각지에 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영화 속 소년은 어느새 백발이 성성했다.
윤기 이사장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었다. 전쟁 당시 갓난아기를 버리고 달아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아원에 들어와 며칠 만에 죽는 애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죽은 갓난아기를 하얀 천으로 싸 옆에 눕히고 하룻밤을 보냈다. 무서워하는 아들에게 "산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는다."고 며 달랬다.
언젠가 병석에 누운 어머니가 우메보시가 먹고 싶다고 하셨다. 어린 나이에 한국에 건너와 한복을 입고 한식을 드시면서 평생을 전쟁고아들과 사신 어머니가 우메보시를 찾은 것이다. 이를 보고 어린 시절 한국에서 자란 재일교포 어르신들도 김치를 드시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향의 집'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오사카, 사카이, 고베, 교토 네 곳에 최근에는 도쿄에서도 문을 열었다.
10월 31일은 다우치지즈코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자 이 세상을 하직한 날이다. 생일과 기일이 같은 날이다. 2009년 10월 31일 아내와 함께 고치에 갔다. 수백 명 앞에서 '국경을 초월한 다우치지즈코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기념강연을 했다. 국내에서도 전남 지사를 비롯하여 많은 분이 참석했다. 연단에 서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일본에서 편히 살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 땅에 와서 전쟁고아, 거지 그리고 버려진 갓난애를 받아 그 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니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남편 없이 해낸 그녀의 국경을 초월한 애틋한 사랑에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3천 명의 고아들이 어머니 덕분에 건강하게 성장하여 대한민국의 역군이 되었다.
1912년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56세가 되는 1968년에 생을 마쳤다. 목포 사람들은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녀는 남편의 고향 함평 땅을 찾아 윤학자로 영원히 잠들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대신해 유물이 그녀 옆에 같이 묻혔다. 고치는 그녀의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곳이고 그녀가 일곱 살까지 살던 옛 고향이다.
고향 사람들은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는 강가에 일본 이름 다우치지즈코田內千鶴子의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한국 땅에서 고아들을 위해 일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아내와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고치의 하늘과 바다, 강과 산이 어울려 아름다웠다.
사할린, 얼마나 외롭겠어
재일동포 민단 모임에 가면 팔십이 훨씬 넘은 할머니가 휠체어에 몸을 싣고 나타나곤 했다. 보통 키에 다부진 인상이었다. 그 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민단의 오기문 상임고문이라고 했다. 오씨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한 태도에 목소리는 우렁차고 보통 말씨도 웅변조 같았다. 오씨 할머니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의 집에도 가보았다. 그곳에는 휠체어를 끌고 있는 아쿠츠치즈코阿久津千鶴子씨가 있었다. 그녀는 일본인이고 친딸도 아닌데 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 그가 사는 곳은 서울에서 천안 정도 먼 거리이지만 할머니가 어디 간다고 하면 달려와 휠체어를 잡았다.
오씨 할머니의 젊은 날 이야기기는 소설 같다. 1911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나라 잃은 설움이 복받쳐 우선 신학문을 익혀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께 공부하겠다는 자신의 소망을 말했으나 거절당했다. 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부친은 여자가 무슨 학교냐고 냉담했다. 담임 선생님이 자신의 사비를 털어 학비를 대주었으나 아버지께 들켜 수포로 돌아갔다. 결혼하라는 아버지 말을 번번이 거역해 매도 수없이 맞았다고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낫자루를 들고 나타나 "조상 뵐 면목이 없다. 이제 내가 죽을 차례다"라고 딸에게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노여움을 푸세요."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18세에 일본으로 시집을 갔으나 25세에 혼자 몸이 되었다. 할머니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재일동포로 위문단을 만들어 한국 전선을 돌면서 위문공연도 전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불러 공로를 치하했다.
"당신 소원이 무엇이오?"
"재일동포들에게 모국에 올 수 있는 여권을 내 주는 것입니다."
"대단하오. 남들은 적산가옥이나 과수원 이야기를 하는데…."
그 후, 재일동포들이 조국에 올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할머니는 한국정부의 특별 배려로 전국 어디든 기차를 탈 수 있는 무임승차권을 발급받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방일反共防日 정책을 고수해 교포의 모국 방문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과 함께 찍은 사진과 박지만을 무릎에 앉히고 육영수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도 내게 보여주었다.
어느 날, 오씨 할머니가 대사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민단 단장이 찾아와 이번에도 고문님이 훈장 대상자에서 빠졌다고 불평하기에 나무랬다고 말했다.
"이 사람아, 어련히 알아서 판단했겠는가. 그런 것 갖고 정부 욕하면 안 되지!"
나는 할머니가 큰 그릇이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뭔가 매우 섭섭해 하는 것 같았다.민단에서 수상자 명단에 해마다 올라갔지만 실제 수상자는 다른 후배에게 돌아가곤 했다. 궁리 끝에 광복 50주년 '민족교육상'계획을 세워 교육부와 협의하였다. 광복 후 처음으로 교육 부문만 별도로 대대적인 훈․포장을 하게 되었다. 교토 한국학교의 최영호 이사장과 민단의 민단 중앙본부 오기문 상임고문이 무궁화장을 받게 되었다. 서울에서 '민족교육자대회'가 열어 할머니를 축하해 드렸다.
오 할머니는 1993년 사재를 털어 고향에 대창양로원을 열었다. 징용으로 끌려간 사할린 거주 무의탁 노인들을 고국으로 모셔오기 위해서였다. 동포들을 위해 온 정열을 바치다가 일본 땅에서 2014년 6월 29일 10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쳤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86년을 사시다가 일본 땅에서 돌아가셨지만 끝내는 고국의 품에 안겼다. 내가 할머니를 마지막 뵌 것은 할머니가 백세 되던 해 경북 고령 태창양로원에서였다. 나는 아쿠츠 치즈코의 권유로 그 곳 복지재단의 이사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다. 아내와 함께 할머니가 잠들고 계신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을 찾았다. 고향을 그리며 숨진 재일동포 영령들의 안식을 위해 세워진 곳이다. 할머니 묘소 앞에서 무릎 꿇고 인사를 드렸다. 비석에는 무궁화장을 받은 기록이 있었다. 도쿄에서 만나 할머니 말씀을 듣던 그 때 생각이 났다. 망향의 동산을 조성하는데 공을 세운 분들의 이름이 적힌 기념비에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 다음에 할머니 이름이 올라있었다. 망향의 동산에는 당신이 데려온 사할린 노인 148명 중 125명이 이미 잠들어 있었다.
일본에서 아쿠츠 치즈코가 한국을 찾아왔다. 한국어를 못하면서도 대창양로원 이사로 일하고 있다. 어떻게 한국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88올림픽 때, 남편과 서울에 왔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길을 묻지 않겠어요? 우리가 한국 사람과 똑같이 생겼나 봐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몸이 불편한 오기문 할머니를 돕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이 좋아 아들 둘을 한국으로 유학 보낸 것이라고도 했다.
언젠가 아쿠츠와 함께 동작동 국립 현충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유해가 묻힌 곳도 있다고 했더니 한 번 가보자고 해서 동행했다. 아쿠츠는 분향을 하며 참배했다. 그녀와 만나면 오씨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았지. 일본 패망 이후 사할린에 갔던 일본인들은 속속 돌아오는데, 같은 땅에 강제 징용돼 갔던 한국 사람들은 깜깜 무소식이더라고. 그 추운 땅에서 얼마나 외롭겠어. 일본 총리공관에 수십 번 쳐들어가 '조선 사람 돌려 달라'고 시위를 했어, 재일대한부인회 회장으로 일본 참의원들을 만나 설득했지."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사할린 동포' 문제가 극적으로 타결됐다고 한다. 살아생전에 할머니의 당당한 그 모습을 보고 싶다.
일본 열도를 덮다
1994년 주일한국대사관에 근무한지 얼마 안 되어 조총련이 을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은행 감사이면서 조총련 간부인 정무진이 출자를 해서 실시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민단의 동포들까지 이 검정 시험에 응하고 있었다. 평양 말을 문화어라고 하면서 이를 기준으로 출제한다고 들었다. 정무진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서울은 한반도 중심에 자리 잡고, 조선시대 오백 년 도읍지 아닙니까?"
능력시험은 서울말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중국을 보세요. 국토는 갈라져 있지만 언어는 하나가 되어 있어요."
대만 이야기를 꺼냈다. 대만 텔레비전을 켜면 화면에 북경어 한자 자막이 나온다. 북경어를 표준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서울말을 표준어로 출제하라고 설득했다.
"민단으로 전향하여 서울말 검정시험을 실시하면 좋겠습니다." 잽을 넣어보았다.
민단으로 전향하여 서울 표준어로 검정시험을 실시한다면 한국 정부에 보고하여 사업을 돕겠다고 말했다. 북송한 자식이 둘이나 있어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내친김에 눈 딱 감고 한마디 한 것이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남조선은 왜 외세에 의존해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외래어도 많고 말입니다."
"외세 의존이라고요? 한국은 외세와 다 함께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죠. 북한도 그렇게 해야지요."
외래어는 필요해서 쓰는 것이고 일본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도 반문했다.
교육부 담당 국장과 차관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써서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고민 끝에 황급히 귀국하여 그 대책을 논의했으나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교육부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격한 말도 오고 갔다. 끝내는 재촉하는 내게 짜증내며 핑퐁을 쳤다.
"한국어 능력시험은 어문정책으로 교육부가 아닌 문체부 소관입니다"
할 수 없이 문체부로 달려갔다. 6.3세대로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김도현 차관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호소했다. 예산을 마련해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주위에서는 어떤 보장도 없이 어떻게 큰일을 벌이느냐고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조총련이 하는 한글 능력시험을 어떻게 그대로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결심을 굳혔다.
능력시험 준비는 일본에 있는 한국교육재단을 이용하였다. 한국교육재단은 일본에서 공부하는 교포 학생과 본국에서 온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재단이다. 대사관 수석교육관인 나는 재단의 상임이사였지만, 이사장의 협조가 필요했다.
하루는 김태지 대사가 나와 이사장을 함께 호텔로 초청해 저녁을 냈다.
"이사장,김 수석이 하려는 방식은 '한국식'이야, 이해하시고 협조해주세요"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내가 추진하는 방식은 빨리빨리라고 하는 '한국식'이었다. 일본은 일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준비 기간만 2년은 걸릴 것이다. '일본식'으로 하면 빈틈이 없겠지만 시간이 없다.
"그렇습니다. 우선 일을 벌여놓고 뛰면서 보완하기로 하지요."
이사장은 제주 출신 교포 2세로 처음에는 미온적이었지만 그 후 적극 협조했다.
더 큰 산이 가로 놓여 있었다. 근본적인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했다. 한국교육재단의 지원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도쿄에 있는 삼성 저팬의 윤종룡 사장을 찾아가 호소했다.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사장님, 이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윤 사장은 선뜻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다. 연간 2천6백만 엔씩 2년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환율로 7억 원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그 중에 반은 유학생 장학금이었다. 능력시험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당시 도쿄 삼성 사무실은 초라했다. 아키바라는 세계적인 국제 전자시장인데, 삼성 제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사장은 큰 결심을 내려주었다.
이제 출제가 문제였다. 우선 '한국어능력검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수소문 끝에 국내의 저명한 학자를 찾아내 일본으로 초청했다. 태평양이 출렁이는 아타미 한 호텔에서 그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렸다. 서울대 심재기, 박갑수, 연세대 김석득, 고려대 성광수 그리고 명지대 진태하 교수의 협조를 얻어냈다. 김석득 교수가 출제 책임을 맡고, 일본 간다神田 대학의 한국인 교수 김동준 선생이 실무 책임을 맡았다. 조총련이 하는 ,에 협조하고 있던 우메다 히로유키梅田博之 교수는 그곳에서 탈퇴, 우리가 하는 에 적극 협조했다. 도쿄 한복판 신바시 역 부근에 사무실을 내었다. 나의 보좌관이면서 한국교육재단의 김형만 사무국장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드디어 사상 최초로 '한국어 능력 검정시험'을 실시했다. 급별 난이도를 보기 위해 사전에 모의시험도 실시했다. 당시 영어, 일어 능력 검정시험은 있었으나 한국어 능력 검정시험은 본국에서도 없었다. 5등급으로 나누어 실시했다. 삿포로, 센다이, 도쿄, 니가타,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후쿠오카 등 8개 지구에서 일시에 실시했다. 일본의 48개 지방자치단체 중 45개 지방에서 응시자가 나왔으니 일본 열도를 뒤덮은 셈이다. 본국에서도 없었던 검정시험을 일본 전 지역에서 실시한 것이다. 멀리 오키나와나 섬에서 비행기를 타고 후쿠오카에 와서 능력시험을 치렀고, 한국에 유학 중인 일본인 학생과 동포 학생이 일부러 일본에 건너와서 응시하기도 했다. 85세의 일본인 할아버지가 응시해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일본인은 한류가 좋아서, 또 누구는 한국 여행을 가려고, 또 한국인과 싸움을 했는데 한국말을 못해 당했는데 공부해서 멋있게 갚아주겠다는 괴짜도 있었다. 일본 영토는 대만 옆 섬에서부터 멀리 러시아 사할린 건너편까지 펼쳐있는 인구 1억2천의 섬나라다. 나는 이 일을 해냈다. 한국 교육원의 사기는 충천했고 민단은 환호하고 조총련의 위세가 크게 꺾였다. 한국어 붐이 일본 열도에 불붙기 시작했다.
8만 명에 달하는 응시자를 분석해보니 한국 국적의 재일 동포가 60%가량 되었다. 일본인 숫자도 예상 외로 많았다. 조총련 소속 조선족 응시자도 적지 않았다. 한국어 능력 검정시험에 응시한 동기는 진학이나 취업 준비가 많겠지 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그저 한국어를 하고 싶어서'라는 이유가 의외로 많았다. 어느 일본인은 '한류가 좋아서', 또 누구는 '한국 여행을 가려고', '한국인과 싸움을 했는데 한국말을 못해 당했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멋있게 갚아주겠다'는 답변을 한 괴짜도 있었다.
한국어 능력시험을 마친 후 그 결과를 교육부에 보고했다. 신문 방송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교육부 장차관이나 담당 국·과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 없었다. 일을 하면서 교육부를 너무 괴롭힌 때문일까. 민단 사람들은 황무지에서 큰일을 해냈다고 감사패를 보내 주었다.
사상 최초로 실시한 한국어 능력시험은 그 후 네 번에 걸쳐 실시되고 막을 내렸다. 그 뒤 국내에서 KBS와 국제진흥원이 주관이 되어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러시아, 베트남 등에서 실시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일을 해냈는지 나도 모르겠다. 고통을 거치지 않고 얻은 승리는 영광이 아니라고 자위해본다. 이제 일본 열도에서의 한국어 능력시험은 하나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조총련 조선학교 여선생님
일본에 와서도 나와 이념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었다. 1995년 여름 츠츠미 갓츠오堤千恩씨의 소개로 전에 조총련 조선학교에 근무했던 선생님들을 만났다. 외교관 신분으로 조총련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총련 사람을 자유롭게 만나는 공무원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김일성 장군 만세', '김정일 장군 만세'를 써 붙인 학교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관계기관에 조총련 인사를 만나게 된 경위를 보고했다. 이해를 구하고 조총련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1996년 정초 조선학교 선생님들을 롯폰기에 있는 한국 음식점인 '진로가든'에 초청하여 신년회를 베풀어주었다. 그들은 나도 보지 못한 한국의 TV 드라마 비디오테이프를 내보였고, 가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조선학교에서 전에 교사를 지냈다고 하는 한 여인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최진희의 라고 했다. 그들의 부모님들은 모두 남한 출신이었는데 집안에 한두 사람 북송 교포가 있었다. 북한에 몇 번 다녀온 사람들이라 평양 이야기도 나누었다. 모두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2세들이지만 조선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라 우리말을 잘 했다. 나는 그것이 무척 고마웠다. 자녀들의 장래 결혼을 걱정하기도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조국 해방 후 시누이 내외가 북송선을 탔지요, 일본에 있어 봐야 자식들 결혼시키기가 어렵고, 공화국에 가면 어쨌든 조선 사람하고 결혼할 테니까요"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라니까요"
"민단 사람들은 우리말을 못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우리말을 다 하지 않습니까."
나는 "현재 우리가 속고 있다. 그런 사람이 20%가 넘으면 체제가 무너진다."는 어느 정치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했다. 그런데 북조선은 이미 20%가 넘었다고 했더니 저녁 먹는 술자리이기는 했으나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는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여러분들 걱정하지 마세요. 북조선의 20%는 하류층이 아니라 상류층 사람이지요. 하류층은 캄캄해서 잘 모르지요. 사회 구조는 피라미드처럼 생겨서 아래 20%가 흔들리면 무너지겠지만 위 20%가 무너져봐야 끄떡없지요. 엊그제 아프리카에서 외교관이 넘어왔다지만 그게 뭐 큰일입니까."
우리는 옛 조상들 이야기를 하며, 일제 치하에서 고생한 이야기로 밤늦게 담소를 나누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한없이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리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도쿄 이케가미에서 불고깃집을 하는 조총련 여선생님 강康씨가 나를 초대했다. 일본 태생으로 부모 고향은 제주도라 했고 그분의 남편도 조선학교 선생님으로 일했다고 했다. 하루는 내게 평양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침에 쌀겨 떡을 먹고 왔다는 제자에게 "내가 북송선을 타게 해서 미안하구나." 하고 말했더니 제자가 깜작 놀라 항의 투로 말했다고 한다.
"아닙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는 공화국 품안에서 잘 살고 있어요. 행복해요." 그 여선생님은 내게 제자가 정색을 하면서 하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영화 한 편을 본 이야기도 했다. 고장 난 기계를 고치는 사람들이 영웅 칭호를 받게 된 내용의 영화라고 했다. 공장에 불이 나서 뛰어 들어간 첫 번째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은 희생되었는데도 어느 사람이 용감하게 세 번째로 들어가 수리에 성공하여 열렬한 환영 속에 영웅칭호를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영화를 보고 다시는 평양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오라버니로 부르겠다고 했다. 굶주리는 북조선 인민에게 남쪽에서 쌀 좀 보내주면 안 되느냐는 이야기도 했다. 내가 일본을 떠나기 직전에 조선학교 선생님들은 나의 귀국환송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황장엽 선생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망명했다. 긴장한 조선학교 선생님들이 환송회 취소를 통보해 왔다.
귀국 후, 황 선생을 세 번 만난 적이 있다. 작고하시던 해 추석이 며칠 지난 후였다. 혼자 쓸쓸히 보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몇 분이 주선을 해 어느 대학 총장이 자리를 마련했다. 탈북 인사 몇 분도 동석했다. 그때 나는 1997년 초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꺼냈다.
"저는 선생님 때문에 조선학교 선생님 송별만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더니 황 선생은 씩 웃으며 별 말씀이 없었다. 김일성대학 총장에 유일사상을 창시했던 노 철학자는 무표정했고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 안타까웠다.
조총련 조선학교 여선생님을 한국으로 초청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소식이 왔다. 워커힐에서 세계 권투 챔피언대회가 있어서 온다는 소식이었다. 2001년 5월 31일 슈퍼플라이급 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조총련 동포 홍창수가 쉐라톤 워커힐 호텔 특설 링에 올라왔다. 남북 대결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세계 권투 챔피언 방어에 성공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녀에게 서울 시내 곳곳을 구경시켜주고 싶었지만 단체관광이라 개인적 행동이 금지되었다고 했다. 잠실 롯데호텔에서 잠시 만났다.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시집 한 권을 선물했고 그녀로부터 세타를 받았다. 그녀가 본 서울은 김포공항에서 잠실까지 그리고 잠실에서 워커힐까지 왕복 코스가 전부였다. 조총련 동포들은 잠실 롯데호텔에서 잠자고 권투 응원만 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다.
일본 근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을 때였다. 아내와 나는 짐을 한국으로 부치고 승용차를 여객선에 싣고 도쿄 항을 떠났다. 태평양으로 나와 규슈로 가서 일주일 간 승용차로 두루 여행을 하고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츠츠미 갓츠오 씨와 조총련 여선생님이 항구에 나와 '사요나라'로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내가 대사관 사무실에 걸어두었던 한국 들판을 그린 풍경화 한 점이 그 녀의 가게에 걸려 있다. 그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부모가 태어난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남북이 통일되는 날 나는 제일 먼저 그 여선생님을 한국으로 초청하리라 마음에 새겼다.
뭐 배울 것이 있겠어
국민일보는 특별취재반을 편성해 일본으로 건너가 보육원, 유치원, 초등학교 교육을 샅샅이 취재한 후 보도하고, 이를 묶어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그런데 몇 년 후 일본에서 '학교 붕괴'라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국교육정책연구회 창립 1주년 기념 세미나가 2000년 4월 1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학교 붕괴'의 저자 가와카미 료이치河上亮一 선생을 초청하여 '일본의 학교 붕괴 원인과 처방'이라는 강연을 하도록 했다. '학교 붕괴'라는 책은 일본에서 4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변해버린 아이들, 무너지는 학교'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가 번역 출판한 바 있다.
가와카미 료이치 선생은 도쿄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사이타마현에 있는 조낭중학교의 사회과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일본 총리 자문기구인 교육개혁국민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일본 교육개혁의 밑뿌리는 일선 학교현장의 목소리임을 실감케 했다. 한국교육신문은 가와카미 선생과 나의 대담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일본과 한국의 학교 붕괴'라는 주제를 놓고 대담을 하고 이를 보도했다. '학교 붕괴'의 저자와 '교육, 문제 많지만 대안도 있다'의 저자의 대담으로 소개되었다.
학교 붕괴에 대한 체감도에 차이가 있었다. 일본인은 우리보다 매사에 세심한 편이다.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면서 대책을 세운다. 일본 교육은 비교적 내진 설계와 브레이크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편이나 우리나라는 내진 설계가 허술한 데다 브레이크 장치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내가 일본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일본 교육을 유심히 살펴보고 신문을 통해 본국에 전했다. 한국 교육신문에 일본 교육에 관한 8편의 글을 시리즈로 올렸다. , , , , , , , , 이었다.
일본은 '시즈케'라고 해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생활 습관 지도를 철저히 한다.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장 큰 교육 덕목으로 삼고 있다. 일본에 거주할 때, 전철 안에서 아이들이 울고 보채면 부모가 중간에서 내려 아이들을 혼내주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추운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힌다. 자기 잠자리를 스스로 치우게 한다. 유치원에서 어린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청소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인사하기, 차례 지키기, 청결하기, 폐 안 끼치기를 철저히 지도한다. 반복 연습을 통해 몸에 배게 한다. 여럿이 있는 곳에서는 큰 목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버스나 전철 안에서 핸드폰을 쓰지 않는다.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마츠리祭라고 해서 동네 축제를 일 년에 몇 차례 벌이는데 이때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마을 발전을 빌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협동과 단합을 다짐한다. 일본의 지역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학교요 교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우쯔노미야 부인회, 신주쿠 로터리 클럽 초청으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 제목이 였다. 모두 재미있어 했다.
"첫 번째, 일본은 미신의 나라다. 그런데 세계 첨단 과학기술이 발달됐다."
"두 번째, 일본인은 서양을 좋아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발을 붙이지 못한다."
"세 번째, 일본인은 담배를 많이 피운다. 그런데 세계 최장수국이다."
"네 번째,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신사를 못 봤다."
강연을 듣고 다시 말해 달라고 요청도 하고 노트에 적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사나 절에 가서 온갖 기원을 한다. 결혼, 건강, 취직, 교통사고 예방,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글을 종이에 써 붙이면서 왜 지진 이야기는 안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일본은 물질적으로는 서양을 받아들이면서 정신적으로는 일본 혼을 철저히 지킨다는 사실이다. 자기들의 정신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자기가 갖고 있는 전통과 문화는 고이 간직한다. 그들은 옛것을 버리지 않는다. 유리가 보기에 별것도 아닌데 소중히 간직한다. 나는 그것이 무척 부러웠다.
일본의 학부모들은 무조건 상급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자녀의 소질과 적성에 따라 대학 진학을 시키지만 대학 가지 않고 취업 준비를 하는 학생도 많다. 대학에 가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인생의 낙오자라는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본의 힘은 신용이고 신용은 교육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귀국을 몇 개월 남긴 1996년 가을, 긴자에 있는 미스비시 백화점에서 이태리제 응접세트를 구입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앉아보니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마음에 걸렸다. 일주일이나 사용해도 적응되지 않았다.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일주일 사용했으니, 어느 정도의 가구 값을 물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일부 변상할 각오를 하고, 백화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 물건을 팔아 대단히 죄송합니다. 가지러 가겠습니다."
반응이 의외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물건을 가지러 온다는 그날, 아내와 내가 외출했다가 10분 늦게 집에 도착했는데 현관문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3시에 도착했는데 안 계셔서 돌아갑니다. 연락주시면 곧 오겠습니다."
다음 날, 물건을 가져갔고 지불했던 돈은 전액 돌려받았다.
1997년 도쿄를 떠나오던 초봄이었다. 큐슈 여행을 하고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들어 올 계획으로 도쿄 항에서 미야자키로 가는 여객선을 탔다. 큐슈를 안내하는 책자를 보고 승용차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다녔다. 큐슈 땅을 밟던 첫날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간신히 찾아 간 민박집이 허술하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안에 들어서자 반사형 전기난로가 눈에 띄었다. 그 난로는 1960년대 후반 한국에서 인기가 대단했던 일제 내셔널 제품으로 한국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다. 선진국인 일본에 아직도 이런 고물이 남아 있다니…. 우리는 쭈뼛거렸다. 눈치를 챈 민박집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말했다.
"이 부근에 호텔이 있는데 그곳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이게 무슨 말인가.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다른 집으로 안내하겠다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곳에 머무르겠습니다."
그렇게 마음먹고 아까의 난로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것은 낡은 집의 고물이 아니라 박물관의 보물처럼 느껴졌다. 밤새도록 바닷물 출렁이는 소리도 클래식 음악소리 같았다. 이튿날 아침, 커튼을 열고 밖을 보니, 끝없는 태평양이 출렁이고 태양이 그 끝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운명의 이웃사촌
츠츠미갓츠오堤千恩라는 분이 대사관으로 찾아왔다. 일본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유골을 수습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995년 나는 아내와 함께 선생의 초청을 받아 명승지 닛코 부근에 있는 그의 별장을 찾아 갔다. 별장에는 남북통일기원소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방안에는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제단이 있었다. 밖에는 넓은 정원이 있는데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둥근 큰 무덤이 있었다. 잔디는 잘 가꾸어져 있었다.
"이것이 누구의 무덤입니까?"
"징용으로 끌려왔다가 죽은 조선 사람의 무덤이지요."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죽은 한국 사람의 무덤이라고 했다. 실제 그곳에는 유골은 없었다. 상징적인 가묘였다. 어떻게 일본인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한국의 분단을 가슴 아파하며 조총련과 민단 사람을 서로 만나게 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나의 한국, 소위 완 코리아(One Korea) 운동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제2차 대전 중 사망한 한국인을 위해 위령제를 지낸다고 해서 참가했다. 한국식으로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다.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삼십여 명의 한복을 입은 일본 여성들은 사죄하는 뜻으로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참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말도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은 일본 문화는 먼 옛날 반도에서 건너 온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도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의 후손이라고 했다. 일본 천황도 백제계라고 귀띔해 주었다.
내가 귀국한 후에도 츠츠미 선생은 한국을 자주 찾아왔다. 그는 일본의 스승이라 하면서 전남 왕인 묘소를 자주 찾곤 하였다. 나와 지방 여행도 했다. 동아일보와 인터뷰도 내가 추천해 마련해 주었다. 선생은 항상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했다.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떠나오던 날, 항구에 나와 배웅해주었다.
나가노에 있는 지하 도시에 가보았다. 산속에 땅굴을 파서 지하 벙커를 만든 곳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군기 폭격이 심해 천황을 피신시키기 위해 건설한 지하 궁전이라고 했다. 건설 중 항복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그 땅굴 속에는 큰 광장과 회의장 그리고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배가 고프다'는 한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곳에 대구부大邱府라는 한자도 보였다. 일본 교원노조가 이 땅굴을 발견하고 이를 폭로했다. 일제가 한국인을 징용으로 끌고 와 강제노동을 시켰고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 만행을 잊지 말라고 일본 학생들의 체험학습 코스로 권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봄날 황궁 옆에는 벚꽃이 만발했다. 아내와 함께 도쿄 한국학교 김정규 교장 내외와 봄맞이를 나와 한국말로 지껄이며 길을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벚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를 향해 말했다.
"용서해 주세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괴롭혔습니다. 사죄합니다." 자신을 은행원이라고 소개한 그는 계속 허리를 굽혔다. 선조들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비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귀국 길에 큐슈 중심에 있는 한국악韓國岳에 올라갔다. 일본어로 가라쿠니다케. 산 아래 약수터에 있는 주민들이 산 위에 오르면 한국이 보인다고 농담을 걸어왔다. '가라'는 '가야'와 같은 말이고 삼한三韓 시대의 한韓자를 그렇게 읽는다. 한국을 간고쿠라고도 하지만 가라쿠니라고도 한다. 큐슈에는 우리나라 옛 조상의 얼을 엿볼 수 있는 유적과 보물이 곳곳에 있었다. 가야와 백제의 숨결을 느꼈다. 임진왜란 때 도공으로 잡혀와 오늘의 화려한 일본 자기를 꽃피운 가고시마의 심수관 댁을 찾아갔다. 귀중한 자기 한 점을 선물로 받았다. 현해탄에 있는 두 개의 섬으로 이뤄진 대마도對馬島를 일본인은 쓰시마라고 부른다. 이 말은 우리말 두 섬이 쓰시마로 변한 것라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를 괴롭혔다. 그런 가운데도 일본인 중에는 식민지에 살고 있던 우리에게 일제가 저지른 죄를 사죄하며 봉사하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다.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를 보여준 것이다.
나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시대에 태어나 가난과 고초를 겪으면서 자랐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상대 탓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나는 제자들에게 주변 열강도 문제지만 이에 대처하지 못한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더 크다고 가르쳤다. 남을 원망하고 탓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책임을 강조했다.
한 여론조사가 눈길을 끈다. 세 가지 질문을 했는데 가장 응답이 많은 것 하나만 뽑아보았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본받을 나라가 어느 나라인가."
답은 일본이었다.
"가장 경계해야 할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답은 또 일본이었다.
"가장 가까이 지내야 할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마지막 답도 일본이었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인 친척보다 우연히 만나 서로 돌보며 사는 이웃이 더 낫다는 말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 우연히 만난 이웃사촌이 아니다. 운명적인 이웃사촌이다. 태곳적엔 하나로 붙어 있던 육지가 지각 변동으로 찢어지고 튕겨져 나갔다. 그곳에 깊은 상처가 생겼고 틈새가 벌어져 서로 싸웠지만 서로를 그리워했다. 한반도에 봄이 오면 일본 열도에도 봄이다. 해와 달도 함께 뜨고 진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잠자는 일일 생활권이다.
해와 달이 아무리 밝더라도 엎어놓은 항아리의 밑은 비추지 못한다. 그늘진 역사에 햇빛이 비추도록 하자. 가깝고도 먼 나라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만들어가는 것이 역사의 순리요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이념도, 체제도, 그리고 현해탄도 순수한 우리 인간의 마음을 갈라놓지 못했다. 나는 현해탄을 건너가 이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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