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한길만 달려왔다<2>…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이헌원

입력 2017-10-10 13:30:32

제3부 부평 승용차 공장

1. 특수사업본부

1979년 6월 회사 내에서는 소형차 대량생산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9월 달로 접어들자 소문은 현실로 다가왔다. 이 사업을 수행할 부서이름을 특수사업본부이고 본부장에는 변윤식전무님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이다. 이 분은 당시 버스공장 공장장이셨다. 생산할 차량은 S-Car 전륜 구동형이고 생산능력은 60 Job (한 시간에 60대 생산), 이라고 하였다.

60 Job이면 1분마다 1대씩 생산해 내는 공장이다, 이런 공장은 대우자동차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Project)는 일찍이 없었던 거대한 사업으로 소요되는 기술인력(Man-Power)과 투자금액이 엄청날 것이었다.

부산에서는 더 할 일이 없었던 차에 나도 이 사업에 참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본부장으로 내정된 분이 부산공장에 계신분으로 이미 버스 증산 프로젝트로 나를 잘 알고 있는 더욱 기대되었다, 때마침 본사 고웅일 부장이 면담 차 내려왔다. 내 의사를 확인한 고부장은 변 전무님께 나를 추천하였고 전무님은 바로 승낙을 하시고는 함께 올라가자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난 두말없이 서울행을 결심하였다.

먼저 올라와서 자리를 잡은 양영길과장 댁에서 두어 달 신세를 졌다. 이 양과장은 GMI(General Motors Institute)에서 1년간 연수를 받고 귀국하는 해에 바로 부평 공장으로 와서 이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또 같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팀 핵심 멤버에게 서독과 미국 연수 계획이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서독 보쿰에 있는 아담오펠(Adam Opel) 엔진부품 가공공장에서 4주간 연수를 받은 뒤 미국 미쉬건 워렌에 있는 지엠기술연구소(GM Tech. Center)에서 또 4주간 연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1월 초에 출발을 해서 3월 초에 돌아오는 일정이다. 따뜻한 부산에서 살다가 갑자기 추운 곳으로 와서 가족들이 몹시 어려워하는 때에 가장이 해외출장을 가고 곁에 없다니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상의를 해서 시골에 가서 지내도록 하였다. 이사한지 한 보름 만에 식구들을 고향으로 떠나 보냈다.

특수사업본부에서 내가 소속된 팀은'트란스엑슬'(Transaxle)이었다. 생소한 이름이다. 팀 구성은 팀장, 과장 1명(본인), 대리가 4명 그리고 사원이 2명으로 총 8명이나 되는 큰 조직이었다. 이 중 대리 3명은 납품 업체 직원을 스카우트한 것이었다. 생산할 차량은 아직도 한국에서는 없었던 전륜 구동형인데 이 차량의 동력 전달 장치를 트란스엑슬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팀장인 고웅일 부장은 동력이 바퀴까지 전달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여 주었다. 여기에는 씨브이 조인트(Constant Velocity Joint)라는 기상 천외의 장치가 있음을 알았다. 이 장치가 있음으로 전륜 구동에서는 차동장치(Differential)를 없어도 되는 것이다.

벌써 독일 Opel 회사에서 생산하고 있는 견본차량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 팀에게도 견본차 한대가 배정되었다. 모든 팀 멤버들은 우선 이 차량을 리프트에 올려 놓고 관련 중요 부품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였다. 우리 팀이 생산해야 할 중요 부품들은 우선 트란스밋숀과 엑슬(CV Joint포함), 맥퍼슨스트러트유니트(Mcpherson Strut Unit), 브레이크 부품들(Brake Disc, Brake Drum Caliper 등), 완충장치들(Coil Spring, Shock Absorber 등) 조향장치(Rack & Pinion, Steering Column 등). 리어 데드 엑슬 아세이(RR Dead Axle Ass'y) 등 실로 다양하였다. 차량을 시운전 하면서 승차감과 주행 안전성을 중점적으로 파악하였다. 팀원들이 차량에 대한 성능을 시운전을 통해서 먼저 파악한 다음 이 번에는 생산해야 할 부품들을 해체하였다. 더 자세히 공부를 한 후에 도로 조립하였다. 12월 초 여기까지 팀원들을 잘 이끌어 왔던 고웅일 부장은 돌연 팀에서 하차해 버리고 김덕배 부장이 대신 부임하였다. 고부장을 믿고 서울 행을 감행한 나로써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난감하였다.

2. 서독 연수

연수를 받아야 할 사항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기계가공 분야는 생소하니 무엇이 중요한지 몰라서 무척 힘들었다. 내가 맡은 부품과는 다르지만 그 동안 엔진 가공라인을 오가며 가공절삭도와 대조해 가면서 익힌 지식들을 총 정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리고 해외 여행도 처음이다. 마음은 한 없이 설렌다. 드디어 1980년 1월 12일 서독 행 비행기에 올랐다. 해외여행은 처음이다. 같이 연수를 떠나는 일행은 특수사업본부장이신 변윤식 전무님을 필두로 각 분야의 임원과 엔지니어들로 50명이 넘는 대 부대였다. 대한항공의 첫 기착지는 태국 방콕으로 기억되는데 승객들은 비행기에서 내려 모두 공항 대합실에서 두 세시간 기다려야 했다. 에어컨이 없는 공항대합실은 그야말로 찜통 더위 그대로였다. 출장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기내에서 반팔 여름옷으로 바꿔있고 있었지만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은 서울에서 출발할 때 입은 옷차림 그대로이니 더위에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난 견디다 못해 화장실로 가서 속 내복이라도 벗어 버렸다. 벗은 내복을 잘 개어서 손에 들었다. 보기에 좀 흉해도 그러고 있으니 살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하니 나를 따라 속 옷을 벗는 직원들이 늘어났다. 다음 기착지는 바레인 이었다. 여기도 참 더운 나라이다. 모두들 한번 혼쭐이 났으니 두 번 다시는 실수가 없었다. 바레인에서 도착할 즈음에는 검 붉은 태양이 동쪽 지평선 위로 이글거리며 솟아 오르고 있었다. 열사의 나라임을 실감케 한다. 마지막 기착지는 스위스 취리히인가 생각되는데 거기서 독일행 비행기로 바꾸어 타는 것이다. 대한항공 비행기가 활주로에 조용히 멈추어 서자 장내는 일제히 박수소리로 뒤덮혔다. 승객들이 기장에게 보내는 찬사이리라. 그러나 모든 승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힘찬 박수를 동시에 치는 일은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였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 지면에 닿는 순간의 느낌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연착륙(Shoft Landing)을 하니 대한항공 조종사의 기술이 우수하였던 것이다.

여기 공항에서는 각자 자기 짐을 찾았다. 그리고 독일행 비행기로 환승 하기 위한 수속을 마쳤다.

마지막 비행기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으로 가는 작은 비행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기체의 요동이 너무 심하였다. 속이 뒤집힐 듯이 매시꺼워 오고 머리도 아파서 견뎌내기 참으로 힘 들었다.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땅을 밟으니 몸은 그대로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다. 내 딛는 발걸음이 그냥 구름 속을 헤메이는 듯 하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26시간이나 되었다. 보쿰시에 있는 아담 오펠 공장 근처 회사 기숙사로 가는 길도 꽤나 멀었다. 몸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눈을 좀 부치는 둥 만 둥 했는데. 아침 7시 반 첫 출근시간을 맞았다. 비행기 여행에 지쳤고 게다가 시차적응도 되지 않았는데 출근을 해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정신은 몽롱하고 눈꺼풀은 한 없이 무거운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아낸 며칠 후 난 드디어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뒷날 아내의 유품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은 것을 발견하였다. 편지 내용 중엔 이러 말도 있었다.

"…. 先進 技術을 배워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우리 후손들이 잘 살게 될 것이 아니겠오"

이 편지는 해외출장 중 아내에게 쓴 첫 편지이었다. 이 구절처럼 그 때 우리 같은 엔지니어들은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아담 오펠(Adam Opel) 이라는 회사는 미국 GM이 100% 투자한 회사이었다. GM의 경영층이 몇 사람이나 현지에 와 있는지는 몰라도 엔지니어들을 포함한 모든 관리자는 독일인이었다. 현장 근로자는 대부분 외국에서 온 사람들, 특히 터키와 폴란드 사람들이었다. 기숙사에는 이들과 함께 지냈다. 기숙사 건물은 11층 높이 콘도였다. 중앙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사각형 건물인데 한 방에는 두 사람씩 기거하며, 간단한 조리기구와 전기난로, 그리고 싱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화장실은 방 안에는 없었고 밖에 별도로 설치하여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터키인들은 굉장히 유순하며 동양 사람을 만나 자못 신기한 듯 우리와 곧 친해졌다. 그리고 이 회사에 근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내가 맡은 분야는 샤시 부품(Chassis Part)의 기계가공 및 조립 이었다. 팀장인 김덕배부장과 오인식 사원은 트라스엑슬(Transaxle)을 맡았다. 당시 부평공장에서는 이들 기계 가공공장은 없었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는 이 분야 경험을 가진 엔지니어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첫 길을 가는 셈이었다.

연수과정은 참으로 힘들었다. 독일 엔지니어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나는 독일 말을 모르니 언어 소통이 큰 문제였다. 한국사람 통역 한 사람이 있었지만 여러 사람을 도와야 하니 나에게 할애된 시간은 극히 짧았다. 뒤에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서독파견 광부로 왔다가 그냥 눌러앉아 독일 사람이 된 것이었다.

제일 먼저 부품도면을 요청해서 받았다. 기계가공 기술자에겐 부품설계 도면을 독해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독일어로 표기된 도면을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통역사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 사람은 우리말 기술용어를 몰랐으므로 정확한 뜻을 전달 받기가 힘들다.

궁하면 통한다고 내 머리에는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기술서적을 파는 곳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가면 기술용어사전이 있을 것이다.

난 통역사에게 간곡히 부탁을 해서 퇴근 후 그의 차로 서점에 갔다. 놀랍게도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된 기술용어사전을 찾았다. 또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영어를 독일어로 번역된 사전도 동시에 찾아내었다. 아! 이 기쁨이란! 책 값이 제법 비쌌지만 난 이 두 권의 책을 사 들었다.

제품도면에 표시된 독일어 기술용어 한자 한자를 영어로 번역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 단어로 표시된 용어를 영어로 바꾸어 보니 그 뜻이 아주 명료해졌다. 그런데 긴 문장으로 표시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다. 모르는 곳을 표시해 두었다가 통역사에게 물어보아서 비로서 도면을 완전히 읽어 나갔다. 제품도면은 제조기술자에게는 '바이블'이나 다름없다. 설계자의 뜻을 완전히 숙지하지 않고는 어떻게 그 제품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 다음은 소재도면이다. 소재는 주로 주물이거나 단조품이다. 소재도면에는 기계가공을 할 때에 기준이 되는 면이나 선 또는 점이 표시되어 있다. 기계가공을 할 때에는 그 소재를 고정시키는 크램핑(Cramping)을 해야 하는데 이때 어떤 곳을 기준으로 해서 어떻게 크램핑을 하고 어디를 가공하는가 하는 일이 아주 중요함을 알았다. 제일 첫 번째 가공하는 곳은 다음 공정의 기준이 된다. 한번 가공된 면은 더 이상 소재의 표면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고 이후 모든 공정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소재도면과 함께 제품도면을 완전 숙지한 다음에 받은 자료는 라우팅쉬트(Routing Sheet)였다. 작업설명서 또는 공정설명서라고 할까? 한 공정마다 이루어 지는 모든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절삭공구의 종류, 클램핑 기구(Clamping Device). 검사기구 등이 고유번호로 표시되어 있다. 절삭공구의 교체시기, 사용하는 절삭유, 가공시간, 칩(Chip. 기게가공시 발생되는 쇳조각)처리 등 이렇게 모든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난 부산버스공장에서 작업표준서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라우팅쉬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기술자료는 레이아웃(Layout)이다. 공정번호, 기계의 배치, 공구함의 위치, 검사기구의 위치, 작업자 위치와 컨베어 흐름 등이 모두 표시되어 있다. 한 제품이 생산되어 가는 과정을 표시한 도면이다. 난 이렇게 상세한 래이아웃를 생전 처음 본다. 마치 작업 현장을 눈으로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차례차례 받은 기술자료를 이해 하는 데는 앞서 말한 기술용어사전의 도움이 실로 컸다. 사전을 만든 사람에게 거듭거듭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이 사전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이후 서스편션 공장을 완성하기까지 두고두고 이 책을 써먹었으니까.

이제 현장을 익히는 일이다. 현장에는 일반기능공, 한 두 개 라인을 관리하는 직장(Meister), 그리고 이 직장 3,4명을 관리하는 공장(Over Meister)가 있었다. 마이스터란 한 분야의 기능을 통달한 우수 기능공을 일컫는다. 도제 제도가 있어서 기능인력이 배출된다고 한다.

대우자동차의 경우 기능인력을 양성하는 직업학교가 있다. 다년간 기능공으로 일하면서 탁월한 기술을 연마하였고 다를 기능공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되면 직장으로 승진이 된다. 이 직장 위에는 공장이 있다. 즉 독일의 마이스터와 오버 마이스터 직급과 같은 것이다.

현장에서 마이스터는 소속 기능공들에게 절대적인 신임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 작업 중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점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를 트라불 슈팅(Trouble Shooting) 이라고 한다. 마이스터가 해결하지 못하는 트라블슈팅은 오버 마이스터가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장 기능공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작업현장에 오버 마이스터의 사무실이 있었다. 이때까지 사무실에서 상대하였던 엔지니어가 나를 현장으로 데리고 가서 이 오버 마이스터를 소개시켜 주었다. 내가 아는 독일어는 단지 두 마디 "굿텐 몰겐(Guten Morgen)"과 "이쉬 리베 디히(Ich Liebe Dich)" 였다. 우리말 뜻은 "안녕하십니까?"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쯤이다. 내가 만난 오버 마이스터는 키가 크고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형님과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뒤에 폴란드 출신이라고 하였다. 비록 말은 두 마디였지만 형님을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얼굴에 웃음 가득히 그리고 두 손을 꼭 잡으면서 인사를 드리니 그도 천진한 웃음을 주었다. 내가 받은 첫 인상만큼 그도 나를 잘 보아 주었다. 그 다음 날 나는 한국에서 미리 준비하여 간 선물을 드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꼬마 아가씨 인형이었다. 그는 나에게서 이 선물을 받고 참으로 기뻐했다. "폴란드인(Polska) 아깝게도 이 사람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연수일지를 뒤져보아도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폴란드 출신 오버 마이스터는 자기 휘하에 있는 마이스터 세 사람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서 나를 소개하여 주었다. 모두가 나이가 든 분들이다. "구텐 몰겐" 하면서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였다. 이 사람들은 나에게 크나 큰 호의를 갖고 내가 묻는 것은 무엇이든지 보여주고 설명하여 주려고 애를 썼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레이아웃과 현장 실제를 대조해 가면서 가공 소재가 흘러가면서 최종 완성품이 되는 과정을 살폈다. 중간에 검사하는 공정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대체적인 공정을 파악한 후에는 라우팅 쉬트에 표시된 모든 사항들을 대조하여갔다. 절삭공구와 클램핑 기구 등은 교체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것을 보여 주었다. 가공기준점이 어디이고 소재를 어떻게 클램핑을 하는지를 쉽게 확인하였다. 모든 검사 공정에는 검사게이지, 또는 지그를 사용해서 손 쉽게 검사를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작업을 라우팅 쉬트에 표시된 기술 용어 하나 하나를 짚어 가면서 "이것이 무엇이냐? (Was ist das)" 식으로 물어가니 가능한 일이었다. 마이스터가 바쁘면 오버 마이스터가 나서서 가르쳐 주었다.

참으로 열심히 도와 주었다. 동양에서 온 키 작은 사람들이 측은해 보였던 것일까? 한국이나 독일 다 같은 분단 상태에 처해 있는 것에 동병상린을 느낀 것일까? 하여간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당시 차범근 선수가 보큼팀에서 뛰고 있었다. 이 곳 사람들은 "차붐"이라고 불렀다. 차범근 선수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였다. 처음 만난 오버 마이스터는 내가 한국에서 온 줄 알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면서 "차붐"이라고 외쳤다. 마이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환대는 차범근 선수의 덕택임을 크게 느꼈다. 축구는 독일사람들의 국민 스포츠이었다.

이렇게 일에 재미를 붙이고 지내는 동안 시차적응도 되고 또 음식에도 맛을 들여갔다. 첫 주말엔 아무데도 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그냥 쉬었다. 그 다음 주말에는 변윤식 전무님을 비롯한 모든 임원과 출장 온 직원들 모두 네델란드로 버스투어를 하였다. 전 국토의 1/4이 바다보다 낮다는 곳 네델란드는 물의 나라였다. 큰 수로들이 많이 있고 그 수로에는 수상가옥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큰 풍차들이 돌아가면서 물길을 바꾸고 있었다. 어느 해변을 갔는데 거기서는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30년 훨씬 전의 일이라서 기억엔 가물가물하지만 뇌리를 스쳐가는 장면이 또 있다 .튜립꽃 정원이며 거대한 궁전의 모습이다.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등 여러 가지 색깔로 화려하고 장엄하기 그지없는 튜립 정원을 본 것도 생각나고 잔잔한 호수가에 크고 아름다운 궁전의 모습도 떠오른다. 네델란드를 다녀오는 동안 베네룩스 3국이라 불리는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등을 경유하게 되었다. 국경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자재로 넘나 들었다. 버스 한 대에 두 사람의 운전기사가 교대로 운전을 하였다. 쉬고 있는 기사는 버스 내에서 핫도그 같은 것을 구어서 승객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버스투어를 다녀 온 후 산뜻한 정신으로 업무에 더욱 정진하였다. 모든 기술자료를 익히고 실제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을 반복해서 확인하였다.

다음날 평시와 같이 출근을 하였다. 머리는 텅 비어 깨끗하다. 몸도 아주 가쁜 하고 하던 일에 의욕이 넘친다. 가금 이런 여행과 휴식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신선한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나머지 연수 일정을 기분 좋게 끝냈다. 임원 중 조항균 이사는 자주 나를 찾아와서 연수과정에 애로사항은 없는지 물었다. 버스공장에서 온 내가 생소한 업무를 맡아서 잘 수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또 조언을 하였다.

3. 미국 연수

예정대로 독일 연수가 끝나고 1980년 2월 9일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사무실 엔지니어와 작별인사를 하였고 현장의 폴란드 출신 오버 마이스터와 굳게 손을 잡아 흔들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세 사람의 마이스터에게도 똑 같이 정말 고마운 마음 가득 작별인사를 하였다. 차범근 선수가 더욱 잘 뛰어서 독일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를 빌었다.

미국 행 항로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동부 뉴욕에 도착하고 거기서 디트로이트 행으로 환승 하는 것이었다. 뉴욕공항 입국심사과정에서 왕영남 이사만 장시간 조사를 받는 바람에 모두들 기다려야 했다. 왕이사와 같은 동명이인이 요주의 인물로 입력되어 있는 모양이다. 미국에 입국 할 때마다 왕이사는 오늘과 같은 곤욕을 치른다고 하였다. 디트로이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모두들 각자 짐을 가지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몇몇 부장이 어디론가 가더니 잠시 후에는 승용차를 몰고 왔다. 그 차에 나누어 타고 호텔로 향하였다. GM본사에서 우리가 연수를 받는 동안 사용하도록 차를 배정해서 공항에 대기시켜 놓은 것이다. 미국에서는 기숙사에 머물지 않고 호텔에서 머물게 되었다. 한 방에 두 사람씩 투숙하게 되었는데 나와 한 방을 쓰게 된 사람은 오인식 사원이었다.

도착 이튿날 GM 본사로 출근하였다. GM 빌딩은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원형으로 된 고층건물이다. 건물 외벽에 "GM"이라는 두 글자를 써 놓았다. 첫날 제조기술담당 임원이 나와서 인사말을 하였다. 그는 말을 천천히 똑똑하게 발음하려고 애썼다.

"여러분들 중에는 영어를 잘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곳 엔지니어와 같이 일을 하면서 의사전달을 확실히 해서 반드시 이해를 하고 넘어가 주십시오. 잘 알아듣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몇 번이고 알 때까지 질문을 해서 확실히 이해를 한 후 다음 일로 넘어가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나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실무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김덕배 부장이나 오인식 군은 GMI 출신으로 영어가 능통하였다. GM 본사 빌딩으로 출근하는 일주일 동안은 난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 주일간 한 일은 회사가 직접 가공할 부품과 외주를 할 부품의 구분이었다. 먼저 트란스엑슬(Transaxle)부품에 대해서 토의를 한 후 그 소스(Sauce)를 정해 나가는 것이었다. 즉 직접 만들 것인지 외부 업체에 발주를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의견이 상충되는 부품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로 해 두는 것이었다. 내가 맡은 서스펜션 부품에 대해서 검토하기 전에 독일에서 공부한 것을 다시 훑어보면서 내 나름대로 의견을 메모하여 두었다. 드디어 서스펜션 부품들에 대한 검토회의가 시작되었다. 내 의견에 크게 빗나는 가지 않았다. 스티어링넉클(Streering knuckle), 브레이크드럼(Brake Drum), 브레이크디스크(Brake disc)등의 단품과 리어엑슬(Rear axle) 구조물의 기계가공 및 리어 휠 스핀들(Rear wheel spindle)의 원주용접 등이 자가작업으로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외주로 정하였다. GM엔지니어는 오인식 군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서울대 공대 기계과 출신이며 GMI에서 수학하여 영어가 능통하였다.

GMI란 GM이 설립한 단기 교육기관이다. 세계 각처의 관련 투자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중 자질이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아 1년 또는 2년간 교육시키는 기관이다. GM의 업무 시스템(System)을 이해하고 공감을 갖게 하여 해외자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게 하는 인재양성기관이었다. 무엇보다도 영어를 많이 가르쳐 확실한 의사소통 통로를 마련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 부산 버스공장에서는 매년 한 사람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부평공장에서는 5~6명씩 선발되어 미국연수를 하였다.

이번 연수길에는 GMI 출신들이 많이 동참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영어가 능통하여 회사업무를 잘 수행하였고, 일상생활에서도 처음 출장 온 동료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독일에서는 출퇴근용 셔틀버스를 기숙사에 같이 지내는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 미국에서는 팀 별로 차량을 배차하여 손수 운전을 하게 하였다. 룸메이트(Roommate) 오군이 호텔 로비에 내려가서 시내 지도를 사 와서 지도상에 호텔에서 GM 빌딩까지 길을 표시하였다. 이런 지도는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출근 첫날에는 김부장이 운전을 하고 옆 자리에 오군이 지도를 펼쳐놓고 앉아서 미리 표시한대로 길을 안내하였다. 교차로를 앞두고 "직진입니다, 다음은 좌회전입니다, 또는 우회전입니다" 하는 식으로 알려주면 김 부장은 거저 운전만 하는 것이었다. 둘째 날부터는 오군이 운전을 하고 내가 옆자리에 앉아서 길을 안내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지금이야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서울 김서방네 집도 잘 찾아가지만 그 시절에는 이렇게 길을 찾아 다니는 것이 신선한 감동이었다.

둘째 주부터는 나 혼자서 미쉬간 주 워렌에 있는 지엠테크니컬센터(GM Technical Center)로 가서 연수를 받았다. 호텔에서 거기까지는 꽤 먼 길이었는데 에릭엥브롬(Eric Engbroam)이라는 엔지니어가 출퇴근을 시켜 주었다. 이 사람은 코디네이터로 연수분야(칼리커륨)와 일정을 세워주었다. 나는 여기서 많은 엔지니어를 만났다. 영어가 부족한 나는 몇 번이고 질문을 해서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나의 이런 노력을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차차 알게 되었지만 지엠 태크 센터의 규모는 엄청났다. 근무하고 있는 연구원 엔지니어가 무려 2만 명이 넘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자동차의 온갖 부품들을 설계하고 시작품을 만들고 내구성을 테스트하는 과정을 통하여 최종 설계도면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시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별도의 기계공장이 있었고 테스트장비 또는 기구를 만들고 있었다. 거대한 테스트룸 에서는 온갖 부품들이 제마다 온갖 형상의 기구에 물려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참으로 부럽고 놀라운 광경이었다.

또 하나 완성된 차 주행시험장(Proving Ground)의 위용은 엄청났다. 거대한 벨로드롬 에서는 자동차들이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가 하면 자갈길, 울퉁불퉁한 요철길 위를 달리는 차량도 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결함들이 걸러지고 수정되고 하여 비로서 좋은 차량이 운전자의 손에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GM이었다.

미국에 온지 첫 주말에 에릭(Eric Engbroam)씨는 우리를 자기집으로 초청하였다. 그의 집은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시 외곽에서 사람 사는 주택은 울창한 나무 숲 속에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집은 단층으로 밖에서 보기에는 별로 크지도 않고 그저 수수한 모양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꽤 넓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밖은 아직도 눈이 녹지 않은 추운 날씨지만 실내는 난방이 잘 되어 있었다. 그의 자녀들은 모두 출가를 해서 따로 살고 있었고 안 주인 혼자만 우리 일행을 아주 친절이 맞아주었다. 준비해간 꽃 바구니를 받아 들고 참으로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들 부부는 자기들이 사는 방식대로 우리일행을 따뜻이 환대하여 주었다. 머나 먼 이국 땅에서 이런 대접을 받으니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났다. 지금쯤 한국의 가족들은 시골에서 올라와 부평에서 지내고 있을 것이다. 겨울방학이 끝나 개학을 했을 것이고 큰딸 둘째 딸은 학교에 다닐 것이다. 낯선 곳에서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을 하고 있는지, 다섯째 아기를 가진 아내는 낯선 곳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동전을 한 움큼 바꾸어 쥐고 공중전화부스에 들어가서 부평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전했다.

GM 기술연구소의 3주간의 연수는 무엇을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 배우라는 뜻이 아니고 여러 분야의 박사들이, 엔지니어들이 무엇을 연구하고 있고, 어떻게 설계를 하고, 또 시작품을 만들어 어떻게 테스트를 하는지를 보고 느끼라는 뜻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에릭씨는 처음 일주간은 독일에서 배운 바를 다시 검토(Review)하는 정도로 끝냈고 나머지 기간에는 틈나는 대로 기술연구소의 여러 곳을 돌아보게 배려하여 주었다. 도보로써는 둘러 볼 수 없는 넓은 지역이니까 나를 자기 차에 태워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선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 지와 엔지니어들과 인사를 시켜주었다.

돌아보던 중에는 한국인 박사 한 분이 '진동'을 연구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독일에서는 폴란드 사람이, 이곳에선 에릭이 진솔하게 나를 가르쳐주려고 애를 썼다. 두 사람이 베풀어 준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한다.

두 번째 주말에는 지난해에 연수를 마친 양영길 과장과 부산공장에서 GMI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온 강순규 대리가 폰티악 공장에 근무하고 있는 한 교포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교포는 GMI 연수생들을 가끔 그의 집으로 초대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 이민 사회이지만 한국을 잊지 않고 사는 모습이 거저 좋게 보이고 감사하였다. 그는 집 앞의 텃밭을 갖고 있었다. 이 텃밭에서 배추나 무, 상치 등을 가꾸어 먹고 있으며 남으면 이웃과 나누어 주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날 밥상에 올려진 배추김치며 총각김치 등은 이 사람이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이라 하였다. 특히 고사리는 그의 집 주위에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줄기가 굵으면서 부드럽고 맛과 향이 일품이었다. 미국사람들은 이 고사리가 독이 있다고 하여서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교포 집이 베풀어 준 따스한 정이 고맙고 고마웠다.

세 번째 주말엔가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번 전화를 한지도 한 열흘 넘게 지났다. 또 전화를 하는 것 보다 이번에는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안부와 함께 귀국하는 일정을 적었다.

출국 이틀 전에는 GM빌딩으로 다시 출근하였다. 테크 센터에서 마지막 떠나던 날 난 그 동안 낯이 익은 엔지니어들을 찾아 다니며 일일이 인사를 하였다. 물론 에릭씨에게는 더 큰 고마운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드렸다. 호숫가 잔디밭으로 올라와 유유히 놀고 있는 검은 백조들이랑 물속에서 무리를 지어 헤엄쳐 다니는 천둥오리에게도 작별을 하였다.

출국 전 날에는 좀 일찍 퇴근하여 모두들 선물을 사러 백화점으로 갔다. 난 딸들에게 줄 학용품을 샀다. 질 좋은 연필을 많이 샀고 또 연필 깎기와 공책 지우개 및 필통 등을 고루 나누어 줄 수 있게 장만하였다. 마누라에게는 조그마한 반지와 금도금 팔찌를 샀다. 장인과 삼촌 그리고 매형과 제매 들에겐 가죽지갑을, 장모님에게는 잠옷 한 벌 등을 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동리 시골집 친척들이나 창녕 장인 동네 처족들과 한잔 나눌 수 있도록 조니워카 블랙 2리터짜리 두 병을 샀다. 이렇게 선물을 준비한 나는 즐겁고 신명이 났다. 귀국하는 날 승용차에 짐을 실어서 GM본사 빌딩으로 출근을 하였다.

대회의실에서 첫날 인사말을 하였던 GM측 연수담당자가 그날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말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측 변윤식 전무님이 많이 도와 주어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였다. 앞으로도 이 큰 프로젝트가 한국의 대우자동차에서 완만히 성취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바란다고 말씀도 덧붙였다.

대 회의실을 나온 우리들은 제조기술부로 갔다. 공항으로 가기까지는 한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마지막 점검회의(Wrap Up Meeting)을 위해서다. 첫 주 협의 중에 보류로 남겨 두었던 몇몇 부품들의 소스도 결정하였다. 드디어 작별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와서야 난 외투를 걸어둔 체 그냥 온 것을 알았고 다시 사무실로 갔다. 눈이 둥그래진 사무실 직원들이 나를 쳐다보고 의아해 하고 있다가 내가 옷장에서 외투를 들고 나오자 한 바탕 폭소를 터트렸다. 웃음이 좀 잦아질 무렵 나는 재치 있게 "나는 마누라가 너무 보고 싶다" 고 하였다. 나의 이 말이 진지하게 들렸는지 그들은 곧 웃음을 멈추었다. 다시 한번 난 그들한테 손을 흔들면서 여유 있게 작별을 고했다.

4. 귀국

귀국길에 올랐다. 디트로이트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미대륙을 가로질러 LA로 왔다. 낮 시간이고 또 날씨가 청명하였기 때문에 밑을 잘 내려다 볼 수 있었다. 5시간을 넘게 날아오는 동안 산이 보이지 않은 광활한 평야만 보였다. 이것이 바로 미국 대평원이다. 로키산맥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산을 볼 수 있었다.

LA에서 한 세시간 기다린 끝에 한국으로 오는 대한항공으로 바꾸어 탔다. 이번에는 태평양 상공으로 날아올라서 알래스카에 기착하였다. 공항 활주로 군데군데 눈 더미가 쌓여 있고 활주로 자체도 빙판으로 보였다. 공항 면세점에서는 훈제 연어를 팔고 있었다. 난 마지막 조금 남은 돈으로 이 연어를 샀다. 비행기는 다시 이륙하였다. 한국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좀 늦은 시간이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였으니 지구를 한 바퀴 돈 셈이다. 첫 해외여행에서 세계 일주를 한 것이다. 지나온 나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태국, 바레인, 스위스, 독일,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캐나다 등 10개국이다.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고마운 마음은 한량없고 거듭 감사한 마음을 보낸다.

김포공항엔 뜻밖에도 배가 불룩해진 아내가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마중 나와 있었다. 회사에 남아있던 직원이 우리 가족들을 회사버스에 태워 같이 공항으로 나왔던 것이다.

아이들이 "아빠!" 하면서 우르르 달려오고 그 뒤 아내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서 있다. 떨어져 있은 지 그새 두 달이 지났다. 가족들과 재회의 기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다. 산달이 가까워진 아내는 배가 더욱 불룩하였다.

"여보! 나 없는 동안 고생이 많았소!"

"아니…… 뭘요, 당신은 잘 지내다 왔어요?"

아내와 아이들을 공항에서 만나니 거저 기뻤다.

5. 엔진부

회사에서는 나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신차생산 프로제트를 보류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시해되고 5.18 사태 등 급변하고 있는 정세 속에서 회사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진 모양이다. 이 프로젝트가 중단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특수사업본부로 발령을 받은 지 딱 일주일 만에 10.26 사태가 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 당하였다. 그때 느낀 직감으로는 (아차! 이것 잘못 되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1980년 6월 중순이었다. 특수사업본부를 해체한다고 회사에서는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특수사업본부가 존속한 8개월 동안 얻어진 모든 기술자료를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이 자료들을 총무부가 일괄 보관한다는 것이다. 자료제출이 끝나면 이제는 뿔뿔이 헤어지는 일만 남았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원 소속부서로 복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나의 경우는 달랐다. 나는 다시 부산공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부산에 가면 이젠 전세 집을 구해야 하는데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김승언 부장이 엔진부로 가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특수사업본부로 와서 한 일이 기계가공분야이니 엔진부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가공기술을 체험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던 것이다. 또 한편 진영무 차장은 승용차 조립기술부로 같이 가서 일하자고 하였다. 그는 부산공장으로 자주 출장을 와서 일을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친숙한 사이가 되었으며 내가 부산공장에서 이룩한 업적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난 누구를 따를 것인가 오랫동안 고민을 하였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 나이 어린 사람을 상관으로 모시고 일한다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부산공장에서 승진이 늦은 나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난 이미 가공기술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바이니 이것을 계속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엔진부 행을 택한 것이다. 엔진부 가공2과 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가공2과에 부임해 보니 공장이 한 사람이고 직장이 네 사람이었다. 공장은 김호민 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중 드럼라인 공장은 주야 맞 교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난 현장 경험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그 첫 번째는 부산 동래공단 제조부 프레스 과장을 맡은 일이 있었다. 그때 현장 기능공이 사백칠십명이고 공.직장이 모두 30여명이나 되었다. 각종 버스와 대형 트럭용 후레임을 찍어내는 대형유압프레스가 있었고 2교대 작업을 하였다. 난 이런 현장관리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을 할 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 같은 기계공장이었지만 작업은 판이하게 달랐다. 프레스 공장의 기계들은 대부분 수동이고 극히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엔진부품가공작업은 자동기계 라인으로 관리해 나갈 점이 다양하였고 어려운 것이 많았다. 이미 독일에서 몇 개 부품의 가공라인을 공부하였지만 현실에 딱 부닥치니 너무나 어렵고도 어려웠다. 기계가 멈춰서는 일이 빈번했고 불량이 발생하기도 했다. 문제점이 있을 때마다 직장. 공장이 해결하려 나서고 기계 고치는 보전부 직원들과 밤샘 하기가 다반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문제가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설명을 들어도 몰랐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현장에서 벌어진 일을 김승언 부장에게 보고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과장이라는 직위까지 되어서 가공기술을 배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원이라면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있겠지만 난 그게 아니다. 엔진부 현장 과장으로 온 것이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년이면 승진을 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입사동기생보다 한해나 두 해쯤 늦어 있는 터이다. 최선을 다 한다는 성의를 보이자. 멈춰 선 기계가 다시 돌아갈 때까지 현장을 지키고 밤샘도 마다 하지 않았다. 맞 교대로 돌아가는 드럼 라인이 있기 때문에 밤에도 마음 놓고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런 중에도 김 호민 공장은 웬만한 트라불슈팅을 해결해 내는 기술력과 리더쉽을 갖춘 사람이었다. 마치 독일에서 만난 오버 마이스터처럼. 이 사람은 나이가 나보다 두 살 위이니 나는 솔직히 내가 느끼는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다.

연말까지 6개월을 정말 힘겹게 보냈다. 그 결과 난 연말에 차장으로 승진을 하였다. 참으로 바라고 바라던 일이니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김승언부장은 나에게 많은 질책을 하면서도 나를 진급시키는 데는 크게 노력을 하였을 것이니 고마운 마음 한량 없다. 차장 승진이 된 며칠 후 나는 아내와 상의하여 직원들을 초청해서 자축 파티를 열었다. 초대한 직원은 사무실 직원 안성호와 현장 김호민 공장 이하 직장 네 사람 등이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나의 승진을 축하해 주었다.

5.18 광주사태 이후 신 군부는 노골적으로 정권을 쟁취하였다. 전두환은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다. 사회는 극도로 불안했고 경기 침체가 왔다. 경기침체는 2년여 계속되었다. 자동차가 팔리지 않아 조업이 자주 중단되었다. 엔진공장은 더 심했다. 회사에서는 기아 브리사 1.3 엔진을 탑재하여 판매에 나섰던 것이다. 엔진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치욕감을 느꼈다. 엔진부 현장 기능공들은 몇 개월씩 60% 휴무 수당을 받고 집에서 쉬었다. 현장이 쉬고 있는 부서의 관리직 직원들은 판매 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승진한 기쁨으로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유용한 시기였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공부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김승언부장은 직원들을 회의실에 불러 모아놓고 각 부품가공에서 특별히 주의할 점과 절삭이론을 강의하였다. 가공1과에서 크랭크샤프트, 켐샤프트, 컨넥팅로드 등의 가공라인이 있었는데 나는 여기에 대해서도 공부하는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내가 맡은 시린다헤드의 발브시트를 가공하는 데는 실로 심오한 이론들이 있음을 알았다. 발브시트 가공에만 부피로 오차한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김 부장은 인하대 금속공학을 전공하였다는데 어떻게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보다 기계가공분야를 더 잘 알고 있었다. (도를 이룬 분이다) 난 그렇게 생각되었다.

1981년은 내내 불황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엔진공장의 가동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다. 물가가 요동을 쳤다. 5공 정부는 물가 잡기에 비상을 걸었다. 회사에서는 연말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었다. 이 때 변윤식 전무님은 엔진공장의 트란스밋션하우징 가공라인을 그대로 가지고 나가 독립을 하셨다. 회사에서는 그 분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였고 퇴직 후에 생활 방편을 그렇게 해서라도 마련해 준 것이었다.

김승언부장은 옮겨간 가공라인이 안정을 찾은 때까지 적극적으로 도왔다.

"변 사장의 공장을 엔진부와 똑 같은 공장으로 생각해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엔진부 전체 직원 조회에서 강조하였다. 나도 맡은 분야는 아니었지만 몇 차례 공장을 방문하였다. 어떤 때는 점심 때가 되어 근처 중국집으로 변 사장님은 나를 데려 가서 짜장면을 사 주기도 하셨다.

1980년과 그 다음해까지 경기가 좋지 않았으나 1982년도부터는 경기가 차츰 풀리기 시작하였다. 5공 정부는 물가 하나만은 확실하게 잡았던 것이다. 엔진부 현장 근무는 별일 없었다. 부평으로 와서 3년 만에 생활에 안정을 찾았다. 내가 해외출장 중에 막내 여동생의 혼사가 이루어져 시집을 보냈으며, 그리고 남동생은 부산으로 이사를 하였으므로 시골에 혼자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이제 아무에게도 걸림이 없었고 마음의 여유가 생겨났다. 일요일엔 좋아하던 테니스도 하였다.

경기는 완전히 풀렸고 회사는 쌩쌩 잘 돌아갔다. 김 공장의 탁월한 리더쉽과 기술력은 나날이 빛을 발했다. 그는 부하직장들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나와 사무실 직원 한 사람과 공장 그리고 직장 네 사람 도합 일곱 사람은 매달 돌아가면서 한 집씩 방문하여 술 한잔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형편이 닿는 대로 등산도 같이 하였다. 이런 중에 영종도가 고향인 이세근 직장은 여름엔 자기집으로 초대해서 천렵을 즐겼다. 그물로 숭어를 잡아 회를 처 먹으면서 밤새 즐겁게 놀았다. 이 그물을 사는데 반쯤은 내가 부담하였다. 때로는 나는 딸 넷을 데리고 갔는데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여름 밤을 보낸 것은 좋은 추억이 됐다.

훗날 몇 년 후 김호민 공장은 국가에서 명장제도를 시행한 첫 해에 대우자동차에서는 명장 1호가 되었다. 엔진부에서 그것도 나의 부하였던 사람이 명장이 되었으니 대단히 기뻐할 일이었다.

현장이 안정이 되었으므로 나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였다. 전용기계의 특성, 지그 픽스쳐(Jig & Fixture) 설계개념, 공구의 연마와 교체시기, 간단한 검사기구 등등 배운 게 많았다.

이듬해 1984년에는 자동차의 판매가 활기를 띄었다. 정상근무시간외 3시간의 연장근무가 이어졌다. 자연히 생산량을 늘리는 작업개선과 설비보안 등이 많이 따랐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