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한길만 달려왔다<6>…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이헌원

입력 2017-10-10 13:35:56

제7부 방황

1. 오파상 견습

회사를 떠난 다음주 서울 장한평 서진 무역으로 갔다. 신태우 사장은 부산공장에서 기술부에 근무한 일이 있다. 그는 서울에 와서 자동차 부품 오파상을 하고 있었다. 나도 오파상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오파상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고자 그의 사무실 갔던 것인데 보수 없이 그냥 한 6개월 일을 해 보기로 맘먹었다.

첫날 신 사장이 업무를 추진하는 요령을 죽 지켜보았다. 보유하고 있는 제품정보를 먼저 인터넷에 띄운다. 오후에 전 세계에서 세 군데 회답이 들어 왔다. 이 회답에 대한 답신을 즉각 띄웠더니 한 군데에서 구입의사가 왔다. 요즈음 이렇게 인터넷을 통하여 물건을 사고팔고 한다. 따라서 업무 수행의 질은 어떻게 정보를 검색하는가에 달려있었다.

컴퓨터를 모르고서는 이곳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우선 나의 노트북과 프린터를 아예 이 사무실로 옮겨 설치하였다. 인터넷을 신청하였고 모뎀일랑 기타 필요한 기능을 추가하는데 돈 좀 썼다. 하루 종일 신 사장이 거의 컴퓨터를 떠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을 보니 인터넷 홈 페이지에 팔고 싶은 물품의 사진, 규격, 용도, 가격 등 필요자료를 천연색으로 싣는다. 그 광고를 보고 전세계에서 주문서가 날아온다. 수량, 대금, 결재방식 등이 결정되면 그대로 선적하는 일만 몸을 움직여 확인하거나 검사하고 물건을 출하한다

그러니 우선 이 컴퓨터 다루는 일부터 먼저 배우는 게 옳다. 이 시대 정말 컴퓨터를 모르고서는 장님이다. 노동부 재취업 교육에 컴퓨터가 있으니 이것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때때로 필리핀의 바칼소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어디 사업을 할 만한 것이 없는지 물어보기도 하였다. 달포가 지나갔지만 서진에서 하는 일이 별로 소득이 없다. 원래 목적이 무역실무를 배워보자는 것이었는데 일이 모두 중간에서 흐지부지 흘러가고 성사되는 일이 없으니 재미가 없었다.

두 달 만에 서진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청호 인터내서널이라는 회사에 쉽게 일자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대기업을 빙자한 다단계 판매 조직인 것을 눈치 채고 며칠 만에 그만두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아무 할 일이 없어진 게 무료하게 되었다. 그냥 놀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이력서를 가지고 뛰어 다녔다. 여의도 채용박람회장으로 가서 구직신청서를 접수시켰고 또 국제정보센터에 들러서 국제기구공무원 일자리도 알아보았다.

2. 컴퓨터 수강

노동부에서 실시하는 무료 직업훈련 컴퓨터 과정을 신청하였다. 이 교육은 9월초에 실시하는 3개월의 과정이었다. 한 보름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나는 아내와 함께 아침 식후 철마산으로 매일 등산을 하였다. 퇴직 후 처음으로 매일 아내와 함께 하는 즐거움이었다. 마침 앞 동네에 살고 있던 친구 이석노 부부도 함께 하여 친구와의 우정도 새롭게 다졌다.

이즈음 박찬호와 박세리 두 선수의 선전은 IMF로 고통 받는 국민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마음의 위로를 스스로 받게 해 주었다. 마치 홍수환 선수가 4전5기로 WBC 챔피언을 땄을 때 그들 모녀가 국제 전화로 나누었던 말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오냐 대한민국 만세다"

이 말이 잊혀 지지 않는 것은 너무나 감동적인 순간에서 더 이상 감동을 전할 수 있는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천기능대학에서 오전 4시간 컴퓨터 공부를 할 무렵 집 가까이 세진 컴퓨터가 무료강좌를 개설하였다. 마침 강의가 오후였으므로 나는 하루 종일 컴퓨터 교육을 받았다. 시작한 김에 뿌리를 뽑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내에게도 적극 권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

둘이 함께 하던 등산은 매일 할 수가 없게 되었고 주말에만 가능하였다. 하여간 두 사람이 함께 걸으면 참으로 알게 모르게 많은 말을 나누게 된다

금강경독송은 우리 부부가 빠짐없이 이어 오고 있었다. 금강경 독송의 공덕은 크다. 자질구레한 병치레는 없어졌다. 나는 이것을 벌써 7,8년 전부터 느끼고 있다.

컴퓨터 수업은 재미있게 받고 지냈다.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바칼소(Bacalso)와 자주 전화통화를 한 보람이 있어서 트란스팜의 부장인 다몰리(Damole)여사가 전화를 해 왔다. 대우 마티즈와 티코를 수입해서 판매를 할 계획인데 도와 달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 중이다. LBQ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 창업

다몰리와 여러 번 의견 교환 끝에 내가 그들의 수출 창구(Buyer's Reprentative)가 되어 수출을 도와주고 선적이 완료되면 수수료를 받는 것으로 최종 합의 하였다. 한국 사무실 개설 및 유지비용은 내가 부담하는 조건이다. 수출자를 물색해 보니 신월영업소 이인재 소장이 기꺼이 수출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엔진부 품질관리에 근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별도 사무실을 임대하려면 유지비가 만만치 않을 것이니 자기 사무실 안쪽에 비어 있는 방을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나는 이미 컴퓨터를 많이 배웠으므로 장한평 신사장이 하는 오파상 무역을 해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두 가지 사업을 겸사해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사무실 유지비는 사무실 난로의 연료비, 전화비뿐이니 아주 저렴한 것이다.

다몰리 부장에게 사무실을 개설하였음을 알렸다. 사무실 주소, 전화번호와 팩스번호 사무실 크기 등을 말려주었고 수출 희망자와 가격을 보냈다. 그녀는 내가 빠르게 일을 추진하였음을 칭찬하고 차량 가격의 네고(Nego)와 나의 수수료를 협의하기 위하여 바칼소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컴퓨터 교육 3개월을 수료하는 날 나는 내 사업을 개업하였다고 동료 수강생들에게 알렸더니 모두들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몰랐다. 1998년 12월 5일 드디어 나는 창업을 했던 것이다. 자본금 삼백만원을 아내가 기분 좋게 인출해 주었다. 나는 이 돈을 이제 종자돈으로 삼아서 확실한 사업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한 푼이라도 지출은 우선 꼬박꼬박 적어 나가 결산을 하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어떤 돈인데 함부로 쓸 수가 있나 싶다. 따지고 보면 자기가 가졌다고 모두 자기 것이 아니다. 돈은 어디까지나 공공의 것이다. 공공의 돈을 가지고 사업을 하여서 흑자를 내어야 당연한 의무를 다한 것이다. 조그마한 경리장부를 사서 기록을 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사무실 옆에 중고 매매 센터가 있다고 하길래 거기 가서 한 번 둘러 보았다. 그 규모가 장한평보다 훨씬 크다. 의외로 진열된 차량들이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외국인도 간간이 보였다. 대우영업소에 자동차 중개인이 많이 모여드는 것을 보았다. 앞으로 중고차 거래의 적임지임을 느꼈다. 조심해서 접근해 보기로 맘먹었다. 이왕 사업을 시작했으면 있는 힘을 다해 사업을 성공시켜야 한다. 그것이 나 자신은 물론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미륵존여래불……..

바칼소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날 뜻 밖에 필리핀의 이성수 이사가 전화를 주었다. 지금 세부 시내에 마티즈와 티코가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것이 혹 내가 수출한 것이 아닌가? 하고 물어 왔다. 난 아직 그런 단계에는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더니 이번에는 바칼소가 한국에 있느냐고 물었다. 오늘 입국한다고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어찌해서 소식은 들은 모양인데 그 사람의 방한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였다. 난 솔직히 얘기해 주었다. 한국에 있는 몇몇 회사의 신용 조사와 수입 상담차 온다고 하였다. 이미 그 쪽에서 상륙한 차량 수출 선은 아로운 상사라고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지금 몇 개회사와 손을 벌리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항은 지금 시중소문으로는 트라스팜의 재정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이며 만일 내가 수출에 개입하게 되면 돈을 잘 챙기라고 일러주었다. 능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회사이다. 다몰리가 신용조사를 해 달라는 회사가 이미 제이 디 상사(JD Trading), 경남상사(Kyungnam Trading), 한국재활용품 수출상사(Korea Recycle Export Co) 등이 있는데 아로운 이라는 회사와 거래 중이라니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도대체 한 달에 몇 대를 수입할 것이길래 여러 회사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 재정이 그렇게 어려운 상태에서 사람을 출장까지 보내가면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바칼소를 잘 관찰해 보면 모든 허실을 분명히 가려낼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트란스팜에 기대면서 무역업을 키워가겠다는 발상은 한 마디로 무리한 데가 있다.

바칼소를 공항에 가서 마중하여 내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을 말하였는데. 상담(Contact)할 회사와 살 물건도 있었다. 이 이사한테서 들은 얘기가 있기 때문에 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보다시피 나는 다몰리의 요구대로 이 사무실을 가졌다. 임대료와 유지비용이 만만치 않다. 수출대행업무를 할 수 있도록 창업을 했으니 여기에 상응한 보수를 줄 수 있는가?"

"그렇다. 일단 내가 조사를 끝낸 뒤 얘기하자."

그가 제일 먼저 만나겠다고 한 회사가 제이 디 상사(JD Trading)이었다. 이 회사 사장과 통화를 하고 찾아갔다. 뜻 밖에 그는 이미 트란스팜에 수출을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L/C거래인가?"

하고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트란스팜의 한국지사 책임자로 일하게 되는데 나의 도움이 필요한가?" 하고 물었으나 그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분명히 대금결제가 제 때에 이루어지도록 도와 달라는 말을 하리라 예상했는데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바칼소 보고 우리 집에 가서 지내자고 하였더니 JD 김 사장이 오늘 저녁은 자기가 숙소를 이미 마련하였다고 한다. 바칼소, 이 사람에게 기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칼소와 다몰리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고 LBQ의 배신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무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이인재 소장을 바칼소에게 소개시키고 그의 수출 단가견적서를 주었다.

사무실을 열었다고 시골 동창들에게 알렸다. 신갈 부근에 자기 집을 사게 된 김춘길 친구가 제일 먼저 나의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바둑을 몇 판 두었고 저녁을 먹여 보냈다. 갈 때는 새로 생긴 길로 안내해 주었는데 한 시간쯤 후 자기 집에 도착했음을 알려 왔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집을 사서 지난달에 이사를 하였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짐작이 간다. 그 친구는 노모를 모시고 지내는데 노모가 자기 방을 혼자서 쓰겠다고 고집함으로써 그의 아들과 마루 거실에서 잠을 잔다고 하였다. 자기 아들이 선뜻 할머니의 요구를 받아 주어 아버지로써 대단히 대견한 생각이 들고 또 한편으로 아들에게 좀 미안하기도 하여 며칠 동안은 거실에서 같이 잠을 잤다는 것이다. 나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하고 그들 부자를 칭찬해 주었다.

4. 실패 그리고 방황

1999년 신년을 맞아서 서진에도 가보고 코트라(KOTRA) 자료실 열람도 해보고 또 박찬수 부품상에도 들러보고 하여 여러모로 몸부림을 쳤으나 오파상을 할 단초를 찾지 못하였다. 결국 내 회사를 창업하는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마누라에게서 받은 자본금 3백만원 중 남은 금액은 다시 아내의 손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난로는 집으로 가져왔고 전화 두 대는 사용중지요청을 해 두었다.

1999년 2월 중순 몇 번 연락 끝에 배은효 공장을 방문하였다. 팩스로 보내준 약도를 가지고 찾아갔는데 초행길이지만 비교적 잘 찾아갔다. 하는 사업은 실크 스크린(Silk Screen) 인쇄라고 하였는데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의 안전모에 인쇄된 선전 문구 같은 것이었다. 아주 특별한 인쇄였는데 홍진크라운이라는 회사와 공생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 모기업 홍진은 얼마 전 TV에서 미국 수출업체로 소개되는 것을 우연히 지켜보았던 일이 있다. 안전 헬메트의 수출에 있어서 미국 시장을 40%나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 헬메트는 자동차 경주자들에게도 필수품이라는 것이다. 친구는 그 회사 공장의 2층을 임대하여 생산을 하고 있었다. 그가 공정을 설명하여 주었는데 제품 디자인부터 인쇄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밀한 공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었다. 자동기계가 3대이고 반 자동기계가 6대인데 잦은 기계고장이 가장 큰 애로 사항이라 하였다. 오늘도 내가 있는 동안 기계 부분품이 망가졌다. 새 부품을 사기 위하여 서울 구로동 공단까지 가야 한다고 하였다. 기계 고치는 일은 그의 주 업무이다. 서둘러 외출 채비를 하고 나와서 용인 시내에서 점심을 한 후 헤어졌다. 찾아 준데 대하여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나는 바람 한 번 잘 쐬었다.

나의 이야기부터 먼저 써보자. 지금은 이 일도 저 일도 되지 않는 때이니 여러 가지로 나의 잠재능력이 무엇인지 찾는 의미에서 이것저것 해 볼 찬스이다. 어차피 인생유전이니 난 내가 무슨 재주를 타고 난 사람인지 알고 있기나 해야 한다. 나 같이 단조로운 인생을 산 사람도 드물다. 왜냐하면 개성도 없는 월급쟁이를 한 군데에서 무려 30년이나 하고 명퇴를 하였으니 그렇다. 회사에서 맡은 일도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극히 단조롭다. 그 단조로운 일을 강산이 세 번씩이나 변할 동안 지켜냈으니 이건 좋게 말해서 끈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어찌 보면 숫기가 없는 인생살이였음에 나 자신이 이제 와서는 화가 나는 일이다. 명퇴 후 직장을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많이도 노력했지만 나이 60이 다 된 사람에게 이것은 애당초 맞지 않는 일이었다. 실업자가 정부 공식 발표로 2백만명을 넘어섰고 실업률은 9%대라고 하니 실제는 이것의 배로 보면 될 것인즉 참말로 아득한 숫자이다. 어떻게 해서 이 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를 것인지 생각하니 한숨이요 어디 대고 하소연도 못하겠고 나도 모르게 "니기미 씨발 놈들"하고 구업만 짖는다.

5. 문학의 길

나의 자가 관보(寬甫)이다. 대동보에는 나의 자가 분명 그렇게 적혀 있다. 이 자를 누가 지은 것일까? 할아버지일까? 삼촌일까? 하여간 나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든다. 내가 필명을 내 세운다면 이 이름을 쓰겠다. 당 나라의 시인 두보와도 이름이 닮았다. "관보" 좋은 어감으로 떠 오른다. 이헌원 이라는 나의 실명은 만약 내가 필명으로 행세하게 되면 잊혀지게 되겠지.

나는 중학교 때 남달리 시를, 또는 글을 잘 지었다. 강상도 국어 선생님께서 많이 칭찬을 해 주신 바도 있었다. 교내에서 상을 여러 번 탔던 기억이 난다. 고교 재학 중엔 여러 번 소설을 시도한 일도 있다. 시를 지으려고 남산을 배회하였던 일이 많았다. 틈만 나면 그 앞산으로 나갔다. 시상을 가다듬으려고 말이다. 그러나 남긴 작품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그 많이 써 오던 일기마저 한 권 남아 있는 게 없다. 쓸 때에는 무언가 열심히 그럴듯해서 써 놓았다가 뒷날 내가 다시 그것을 읽어보면 아주 못 마땅한 생각이 들어 그것을 확 불 태워버리곤 하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앞서가던 감수성은 자신이 도저히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도 시, 수필, 감상문, 단편창작들이 다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남겨진 것이 하나도 없다. 다 아궁이 속에서 불타 버린 것이다.

. 고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린 글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여기에서 내가 이때까지 기억하고 있는 말은 불후의 명작은 진실한 인생을 산 체험에서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면 인생을 한 오십까지는 열심히 살아본 뒤 그 뒤에 창작을 해 봐도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불후의 명작! 사람이 살았다고 이 것 하나는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난 언젠가는 문학의 길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그렇게 생각해 왔다. 인생을 열심히 산다. 참 인생을 산다. 진실한 인생을 산다.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한다. 정직하고 성실히 땀을 흘린다. 이런 생각들이 다 일맥상통하는 말일 것이다. 난 그런 길을 선택하려고 노력하였고 결국 그 노력으로 한 직장에서 30년이라는 세월을 하루같이 견디며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의 시간이 찾아 온 것이다. 열심히 인생을 산 후에 문학의 길을 가 보겠다는 고교 때의 소망을 난 오랜 침묵 끝에 찾아낸 것이다. 나를 찾는 시간으로 다가서고 있다. 요 앞 전 선희가 "남의 전기를 대신 써 주는 신종 직업이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내가 글 쓰는 솜씨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한 번 써 봄으로써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우선 자신의 이야기를 써 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일어났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으니 글 쓰는 일로 내 재주를 시험할 짬새가 충분히 생긴 것이다. 다행히 생각을 가다듬으니 어릴 적 일들이 주마등처럼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일어난다.

(그래서 나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틈나는 대로 써 내려갔다. 이 글을 별도 수필집에 보관하고 있다.)

6. 사이버 마켓 Cyber Market

퇴직 후 1년이라는 세월이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사이에 속절없이 흘러갔다. ㈜대우환경이라는 곳에서 사람을 모집한다고 연락을 보냈다. 노동부의 구직신청서를 보고 나를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 가서 면접을 해보니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술을 개발하였는데 이 사업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대단히 호감이 갔다. 그러나 차차 알게 되니 이것은 거짓말이고 정수기나 안마기 같은 것을 파는 다단계회사였다. 나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그 동안 이리저리 당한 실패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뿐 금전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없으므로 내 마음만 돌려먹으면 되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부서지는 나를 보고 아내는

"그냥 편하게 쉬이소 마"

하면서 위로를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런 중 신동섬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이 사람은 해외총괄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잠깐 만났는데 ㈜대우 출신이었다. 재직 중 한 두 판 바둑을 둔 일이 있는데 진정 재미있는 바둑을 두는 사람이었다. 그가 좀 만나자고 한다. 신 사장 사무실은 선릉역 근방에 있었다.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신동섬씨는 나에게 먼젓번 트란스팜 서울사무소가 왜 문을 닫았는지부터 물었다. 나는 아픈 기억이지만 그 쪽에서 일방적으로 사업을 단절시킨 사태를 설명해 주었다. 점심을 먹고 커페에 앉아서 그 사람은 자기의 용건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중고차 사업을 해 보고 싶은데 기존 중고 매매 상사들이 하는 방법을 떠나 사이버 마켓(Cyber Market)을 개설하여 수요와 공급을 합리적으로 연결해주고 중간 이익을 대폭 낮추는 개혁을 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할 역할은 차를 정확히 평가해서 적정 가격을 산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파는 사람 사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가격을 제시하는 중요하며, 이는 파는 사람 사는 사람 양쪽이 다 만족하는 수준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일대 개혁인 셈이다. 나는 그 아이디어에 찬동하였더니 같이 일을 하자는 즉각적인 제의가 있었다. 나는 그러기로 하였다. 우리는 곧 사업계획서를 만들 것에 의견을 모우고 당장 내일부터 실천하기로 하였다. 우선은 회사를 설립할 때까지 무보수이나 중식대와 자료조사비는 발생된 날 즉시 지급 받기로 하였다. 이제는 나의 전문 분야인 자동차로 일터를 잡게 된 셈이다. 기존 인터넷 마켓(Internet Market)이 있기는 하나 적극적으로 거래를 주선하는 일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선 현상 파악 차 중고차 시장 조사부터 하기로 하였다. 나는 퇴근 시 백운 영업소에 들려 최찬문소장을 만나 보았다. 요즘 자동차 판매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아보고 또 중고차 매집 경로도 알아 볼 겸해서 말이다. 지금 실정은 많이 바뀌었다. 90% 이상이 대 폐차로 이루어지고 순수 신규 수요는 극히 드문 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판매사원들이 중고차를 제일 먼저 매집 창구가 된다는 것이다. 즉 고객의 중고차를 가격을 결정해서 신차 계약금으로 돌리는 것이다. 판매사원은 그 차를 생활 정보지에 광고를 하여 수요자를 찾아 팔거나 상인들에게 넘기는 방법으로 처분하고 있는데 어느 방법이나 판매 사원은 중간이득을 챙기게 된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옛날 내가 판매를 할 때에는 신규 수요가 80% 정도이고 대 폐차는 20% 수준이었으므로 판매원이 중고차를 처분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저러나 최 소장은 지금 판매가 호황으로 돌아서고 있는 상황이니 자기 회사에 나와서 일을 하도록 몇 번이나 권고하였다. 한 달에 4~5대는 팔기는 거뜬하다는 것이며, 또 중고차로 약간의 당외 수입도 있으니 한 달에 2백만원은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고마웠다. 나는 지금 계획하는 일이 잘 되지를 않으면 이 자동차 판매 일도 해 볼 것이라 맘먹었다. 좌우간 놀고 지내서는 안 된다.

신 사장이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사항은 중고차를 기술적으로 점검해서 적정 가격을 책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중고차 시장에 뛰어 들어 체험을 해 봐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라야 진실로 터득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장한평 매매시장에 뛰어 들었다. 여기에서 2~3개월 실제 판매인 역할을 수행해 보는 것이다. 체험이상의 좋은 방법은 없는 것이다. 나는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는 신념으로 무조건 장한평으로 향하였다. 상인들 틈에 앉아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한 끝에 전에 내 입사 동기생이던 조성일 이가 창업했던 대우국민차 영업소를 방문해 보기로 하였다. 물론 그 친구는 그 사업에 실패하고 떠났지만 후임 사업자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라도 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서였다. 내 예상은 맞았다. 국민차 영업소를 인수 받은 사람은 조성일의 매제인 임 사장이라는 사람이었다. 비록 첫 안면이지만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판매현안에 관한 많은 아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가 하였던 이야기는 대충 이러하였다.

대우자판은 딜러 정책을 육성할 계획이고 많은 지원을 한다. 그것이 유리하다고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영을 30%수준 유지하고 딜러를 70%까지 확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딜러 지원책으로는 딜러가 신입 사원을 채용하면 6개월간 500,000원씩 임금을 보조한다. 판매 수수료를 상당히 상향 조정했다. 소형 승용차는 8%까지 대형승용차는 4%까지 상향 조정했으며 인센티브(Insentive)를 대폭 걸었다. 지속적으로 딜러 오너가 한 달에 5대 이상 팔 수 있으면 시작해 봄직하다. 오너가 10대 정도 팔 수 있으면 흑자를 실현한다. 판매 사원들의 실적을 통해 수익을 올리려는 생각은 어렵다. 지금은 판매차종이 다양해서 옛날 보다는 판매하기가 쉽다. 등등. 최찬문 소장이 나를 채용하려고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본 마음을 내 비치지는 못했다. 매매상사 직원으로 추천해 달라는 말을 못 꺼낸 것이다.

다음 날 장한평 임 사장에게 다시 찾아가서 내 뜻을 간곡히 말씀 드리고 선처를 부탁 드렸으나 거절당하였다. 장한평에서는 남 밑에서 일을 배운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라고 하였다. 흔히 말하는 '시다'라고 하는 개념은 여기서는 통하지 않고 그냥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뛰면서 배운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 위험이 있다. 처음에 잘 모르면서 우습게 기천만원 날리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라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매제의 친구이니 까딱 잘못하여 내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역시 쉬운 일은 아니구나 싶다.

그래서 장한평은 포기하고 이번에는 신월동 서부자동차 매매단지에 들렸다. 그래도 안면이 좀 있는 곳은 그곳뿐이다. 꼭 4개월간 신월 영업소에서 내 무역 업무를 보고 있었으니까 자주 매장을 찾곤 했던 것이다. 더디어 나는 결심하였다. 경성매매상사 사장님을 찾아뵙는 계기가 되어 직원으로 일하겠다는 의사를 말하였더니 쾌히 승낙한 것이다. 딱 3개월간만 이 시장에 뛰어들어 장사 속을 익히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중고 자동차 시장의 현상파악을 정확히 하고 앞으로 신 사장의 사이버 마켓(Cyber Market) 사업을 해나가는데 필요한 기술 습득을 미리 해 두는 것이다. 사업 아이디어의 구체화는 신 사장이 할 것이다. 나는 크게 욕심내지 않고 거저 직원의 한 사람으로 회사에 힘이 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오래 동안 일하는 즐거움만 가질 수 있으면 최상의 행복인 것이다. 아이들 다 출가할 때까지 최소한 어버이로서의 의무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나의 건강에도 무척 좋을 것이다.

7.중고차 매매 단지

경성자동차매매상사에 출근하였다. 안중대 사장이 사무실내에 있던 여러 사람들을 인사 시켜 주었다. 그들 중에는 대우에서 근무한 사람도 있었다. 얘기를 해보니 생각했던 만큼 그렇게 험악한 곳은 아니다 싶은 느낌이 왔다. 내가 대우자동차에서 오래 근무한 전직을 높이 평가해주었고 모두들 여기서 일을 잘 할 것이라고 격려를 보내 주었다. 나이가 많아서도 충분히 이 일은 가능하다면서 일을 해 보면서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물어봐도 좋다는 것이다. 사무실 분위기가 이만하면 그렇게 살벌하지는 않다고 감이 왔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식사를 미친 후 이용준 과장이 차를 흥정하러 가는 길에 동행하였다. 처음 간 곳은 문산 이었다. 문산은 내가 판매에 파견을 나와 1년 반을 근무했던 곳이다. 그 때 근무 이후 6년 만에 와보는 것이다. 자유로가 판문점까지 이어져있고 많이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차의 가격 결정은 쉽게 났다. 왜냐하면 문산 매매상사의 매물을 인수해 오는 것이니 사전에 전화로 네고(Nego)가 된 듯하였다. 차는 97년 6월식 기아 세피아 수동인데 돌아 올 때에는 이 차를 내가 운전하면서 왔다. 나는 기아 차를 타 보기는 처음이다. 자유로에 들어서서 마음껏 시운전을 해 보았는데 차가 쌩쌩 잘 나갔다. 에어컨 성능도 시원스럽고 엔진 소음도 조용하고 아무 잡음이 아직 없고 …나는 신경을 써서 주의해서 차의 결점이 있는가를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별로 이상한 데를 찾지를 못하였다. 이 정도면 양호한 것이다. 매장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이 매장 내에 있는 광택 내는 곳이다. 오늘 산 차는 4백만 원에 가져온 것이며 매매상사 내에서 비용 수수료 십오만 원과 광택 비용 오만 원 기타 경비 오만 원 정도 감안 4백오십만 원에 팔아 이익 실현을 2십오만 원 정도로 잡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객으로부터 직접 사 올 경우에는 적어도 삼십만 원 이상은 순익이 예상된다. 돌아온 후 즉시 여의도로 두 번째 흥정으로 나갔다. 여의도 증권 빌딩 지하 주차장에 팔 차가 주차 되어 있었다. 차주와 이 과장을 중간에서 연결한 보험회사 직원 등 일행이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보고 검차하여 가격에 대한 의견 접근을 시도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 과장은 어두컴컴한 지하 공간에서 차를 제 빨리 검차를 하였다. 맨 먼저 문짝을 열어 본다. 다음 뒷 트렁크(Trunk)를 열고 라이타를 켜고 매트를 들쳐 올리고 밑바닥을 조사한다. 그 다음 앞 외관을 살폈는데 앞부분이 사고가 나서 수리한 것임을 말하였다. 다음 본넷(Bonnet)를 열고 외관을 본 후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에어컨(Air-Con)을 켠다. 에어 컴프레사(Air Compressor)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검차를 그렇게 해서 끝내고 바로 가격 네고(Nego)에 접근하였다. 가격도 소유자와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는 듯 지상 휴게실에서 매듭을 짓기로 하고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마지막 등록 일자 확인에서 오류가 발생하였다. 이 과장이 들은 바로는 96년 7월식이고 소유자가 다시 확인 해주는 날자는 일년이 앞선 95년 7월식이었다. 전화 통화과정에서 미스 컴뮤니케이션(Mis-Communication)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 그래서 가격 네고는 실패하였다. 오늘은 한 건은 성공하고 다른 한 건은 실패한 셈이다.

나는 좋은 실습을 한 셈이다. 이 과장의 능란한 솜씨가 돋보였다. 어느 정도 하면 저렇게 일순간에 모든 걸 파악하고 시원시원하게 가격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좋은 선생을 만난 셈이다.

자동차 중고 매매업을 이제 주업으로 하기 위해서 나는 단단히 준비를 갖추었다. 우선 서류를 완결하여 정식 직원으로 등록을 필하게 되었고 나는 집 사람과 의논한 끝에 2천만원을 사업 자본금으로 책정하여 별도 은행계좌를 텄다. 텔리 뱅킹(Tele-Banking)도 구축해 두어서 돈의 사용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나는 옆 사람이 실패한 장물 취득에 극히 조심하면서 일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 참이다. 또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방노준이라는 사람을 눈여겨 보았다. 확실히 전문가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본인 이야기로는 한 달에 한 20대 정도 처리를 한다며 이익은 5백만 원 정도는 쉽게 번다고 한다. 상사 사장은 그 사람보고 한 달 수입이 8~9백은 족히 된다고 하니 확실한 배트랑임은 틀림없다. 이 사람은 대우 자동차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자로 나를 선배님이라고 깍듯이 대접을 해 준다. 나는 이 사람과 이용준 과장이 하는 양을 잘 지켜보고 출발을 잘 해야겠다.

전에 판매 영업소에서 치열하게 판매 수업을 하였던 것을 이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우선 내가 중고차 장사를 시작했다는 것을 먼저 알렸다. 시골 동창들과 고등학교 동창들에게도 거의 다 알렸다. 알리는 방법은 찾아가기도 하고 전화를 해서 이야기하기도 해서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솔직히 청하고 있다. 자동차 회사 30년 근무에 남는 이력은 자동차뿐이다. 제일 잘 안다는 것이 자동차이다. 내가 제일 잘 아는 분야의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에 대단히 행복감을 느낀다.

이 용준 과장을 열심히 따라 다니면서 차량을 점검하는 요령을 배웠다. 그리고 그가 자금이 모자랄 때에는 이익 반분 조건으로 차량 대금을 내가 대신 지불하고 차를 인수해 오기도 하였다. 방노준씨와도 이런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익 반분이란 허울 좋은 명분이고 실제로는 그렇게 따라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차량을 흥정하는 과정을 지켜보지 않으면 도저히 믿지를 못하는 일도 있었다.

웬만큼 차량을 점검해서 적정 가격을 사정할 수 있을 때가 되었으나 신동섬 사장이 하는 사이버 마켓(Cyber Market) 사업은 무슨 일인지 개업도 못하고 있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한 6개월 열심히 뛰어다녔으나 결국 아무것도 소득이 없었다. 결국 경성 중고 자동차 일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8. 주식에 손을 대다

2000년 4월 2일자 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매일 이렇게 늦게까지도 잠을 자지 못한다. 그야말로 지옥이다. 내일 주식 시세가 어떻게 전개될지 불안한 마음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기는 난생 처음이다. 다 과욕이 불러온 순간 업보이다. 이미 크게 손해가 났고 내일 장에 따라서는 더 크게 손해를 볼지 아니면 다소라도 손해를 줄여갈 수 있을 지가 걱정이 되니 잠이 올 수가 있나. 아무리 내일 일은 내일 걱정을 하자고 맘먹어도 그렇지 못하다. 심지어 하루 종일 배은효 부부와 우리 부부와 만나 산본 수리산으로 고단하게 등산을 하고 왔는데도 잠은 다 달아나 버렸다.

오래간만에 등산을 하니 체력이 많이 달렸다. 앞에 가는 배은효를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어서 항상 뒤쳐지곤 하였고 다리도 아팠다. 마누라도 현저히 체력이 약화된 것이 눈에 띄었다. 꼭 60대 할머니 같은 걸음이다. 배은효 부부는 체력 증강에 대해 많이 걱정도 해주고 권고도 해 주었다.

그리고 6월 3일자에는 이렇게 종말을 고하고 있다.

주식투자. 이젠 손을 들어야 할 순간들이 다가 오는가 싶다. 손해를 만회한다는 생각이 자꾸 마음만 조급해지고 잘 될 리가 없다. 감각이 많이 무디어졌다. 결국 개미들은 환상만 쫓다가 불나방처럼 제풀에 모두 꺾이고 만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 주식투자에도 손해를 보았다. 자그마치 3천만 원이다. 근 2년 동안 내가 허비한 돈이 2천만 원이니 총 5천만 원을 날렸다. 그 알토란 같은 퇴직금의 반이 날아간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 봐도 너무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을 해왔다. 막내딸이 아직도 대학생이고 돈 들어갈 일은 많은데 어찌할까? 게다가 마누라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덜컥 병이라도 나 버리면 무슨 수로 감당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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