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도 아슴아슴한 1948년 네 살의 여름에 나는 갓난쟁이 동생을 등에 업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진주시 지수면 승산의 외가에 다녀오고 있었다.
버스는 만원이었고 차장 아저씨는 동생을 업은 어머니를 앞문으로 밀어 올려주고 나를 번쩍 들어서 뒷문으로 태웠다. 그리고는 탕탕 버스 옆구리를 쳤다.
곧 버스는 떠났고 낯선 사람들의 무릎이 옹기종기한 사이에 얼굴이 끼인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차가 떠나가라고 울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고 울다가 지친 나는 시골 장꾼들의 보따리와 다리사이에 주저앉아 꼬박꼬박 졸다가 잠이 들었다. 아주 괴로운 잠이 시작 되었다. 엄마가 골목길 저쪽 모퉁이를 도는 모습이 설핏 보이고 나는 엄마를 부르며 따라가는 꿈을 꾸다가 서럽게 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어디쯤 왔는지도 모르는 결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마가 자리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꿈속에서처럼 나를 버리고 가신 것은 아니 구나 안심이 되면서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외가에 다녀서 친가에 온 나는 다시 할머니가 계신 안방에서 재롱을 피우면서 지냈다. 큰 고모는 시집을 가서 이미 집에 없었으나 내 기억 속에 큰고모의 결혼이 없는 걸 보면 그 일은 세 살 이전의 일이었나 보다. 내게는 아버지 아래로 큰고모가 계셨고 이어서 둘째고모와 셋째인 막내고모, 그리고 그 아래에 두 삼촌이 있었다. 내 고향 거창의 친가는 면사무소가 있는 마상리에서도 2킬로미터 정도 건천이 이어져 자갈길을 걸어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전기도 없고 유성기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 동네사람 중에서 유성기 소리를 듣고 노래를 불러 본 아이는 내가 유일했다. 외가는 유성기도 있고 싱거 재봉틀도 있었다. 외삼촌이 일본에 공부하러 가서 보고 와서 만든 목욕탕도 있었고 식후에는 가끔 커피도 마셨다. 외가에는 참 신기한 것이 많았다. 대문채에 붙어있는 행랑방에는 지수국민학교의 여선생님이 살고 있었는데 나와 동갑인 여 외사촌과 두 살 아래인 남자 외사촌과 앞집 둘레네 자매까지 다섯 명을 모아놓고 유성기를 돌려놓고 노래와 춤을 가르쳐 주었다. 외가의 형제는 두 분의 이모님과 다음이 외삼촌, 아래로 이모님 한분과 막내로 어머니였다. 외할머니는 외아들인 외삼촌의 아들인 손자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셔서 손녀들과 편애가 자심했는데 하물며 외손녀인 우리자매와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외가에 있다가 거창으로 돌아가기 전날은 엄마가 목욕을 시켰다. 목욕탕의 솥은 무쇠로 길고 크게 만들어서 작은 방 한 칸에다 솥전을 걸었다. 바닥은 시멘트로 발랐고 아궁이에 불을 떼서 물을 덥혔다. 무쇠 솥이 불길에 달구어져서 자칫 화상이라도 입을까봐 나무로 만든 작은 디귿자의 나무의자에 수건을 깔고 앉아서 물을 끼얹어서 목욕을 했다. 고향집에서는 여름 내내 벌거숭이로 냇가에 살다가 찬바람이 나면 목욕을 거의 못했다. 추석과 설날 전날저녁에 소죽 끓이는 가마솥에 소죽을 퍼내고 솥이 식기 전에 물을 한 솥 부어 두었다가 차례로 함지박에 물을 떠서 고양이 세수 하듯이 씻는 것이 목욕의 전부였다.
고모들은 내가 외가에서 묻혀온 신문물들이 신기하신 듯 나를 방 가운데 세우고 노래하고 춤추라고 성화를 대었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반달도 부르고 따옥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도 불렀다. 할머니는 잘한다고 부추기는 고모들 곁에서 웃고 계시다가도 엄마만 보면 "가스나를 사당을 만들라 캣든가 춤추고 소리하기는~~쯧쯧" 하신다. 엄마의 얼굴이 금방 하얗게 질리는 걸 보면서 그 말이 그리 좋은 말은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할머니 방에만 붙어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일변으로는 후련해 하는 것도 같았다. 작은방에는 갓난쟁이 동생에다, 아버지가 공부하시는 육법전서와 또 비슷한 두께의 책들이 쌓여있었다. 엄마는 늘 끼이는 옷을 입은 것 같은 형국이라고 푸념을 하시는 걸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뜻을 이해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시골 면내에서는 수재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분이셨는데 해방 전에 기상대에 근무를 하셨다. 해방 후에 판, 검사 아들이 소원이신 할머니의 뜻에 따라 고시공부를 시작하셨다. 나른한 여름날 책을 보시다 뒤뜰로 향해 난 창틀을 베고 잠드신 아버지 곁에 아버지의 육법전서를 베고 아버지와 나란히 누워 잠들기를 참 좋아했던 기억은 지금도 꿈결 같다. 그런 날이면 목이 부러지는 것 같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섯 살쯤의 어느 날 인가부터 아버지는 당신의 모교인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셨다. 부잣집의 막내딸이셨던 어머니의 자심한 고생은 아버지가 수입이 없어서였다. 모른 척 하시기 힘드셔서 고시를 포기하셨던 것 같다고 후일 나는 생각했다. 방천아래 첫 번째 논에 감자를 심어 감자 꽃이 펴 있던 어느 날, 가족들이 다들 나름의 일에 몰두해 아무도 알은 채를 않아서 외로웠다. 할머니가 어쩌면 걷는 것 까지 애비를 닮았을까하는 모습대로 뒷짐을 지고 탈래탈래 방천 논까지 갔다. 해가 제법 뉘엿해 졌을 때 제방 잔디밭에 앉아서 꼬박꼬박 졸다가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아버지의 등에서 작은방 아기 요위로 뉘어진 뒤였다. 그게 재미가 들려서 그 뒤로 내가 없어지면 고모들이 감자 논으로 찾아왔다. 그러면 나는 아버지 오실 때까지 안가겠다고 떼를 썼다.
"희야 우리 강새이 어디 갔노" 할머니의 소리가 들렸다. 여섯 살 치고는 키가 작았던 나는 냉큼 달려가면서 "왜 할매?" 방문을 부여잡고 머리통만 들이민 채 대답했다. "너 사랑 아궁이에 잔불 남았는지 헤집어 보고 오니라" 하고 말씀 하셨다.
"알았어요" 하면서 쪼르르 내달려 사랑방 아궁이를 부작 대기로 헤집어 본다. 아침에 소죽을 끓인 아궁이에는 아직 불기가 남아 있었다. "할매 아직 불잉걸 남았는데" 하면서 큰 소리로 여쭌다. "에고 춥다 문 닫고 들어 오너라" 언제나처럼 할매의 입가에는 웃음이 맴돈다. "할매 문 닫고 우째 들 오노? 열고 들어 와야 제" 나는 대꾸를 했다. 한낮 방안은 어둑한데 한참 후에야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랫목엔 작은 방이불이 펴 있다. 곱게 쪽진 할머니는 단정히 앉아 두 고모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고 계셨다. 작은 고모가 아랫목에서 인두판을 앞에 두고 저고리 깃을 다리고 있었다. 인두가 꽂힌 화로를 들고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담으려고 나가던 둘째고모가 눈을 곱게 흘긴다. 막내고모가 "조년의 가스나 말대꾸는" 했다.
조신하고 솜씨 좋은 둘째고모와 달리 셋째 고모는 덜렁이라 화로 담당도 못하고 할머니께 꾸중을 도맡아 놓고 있었다. "도련은 겨드랑이에서 살짝 나가다 궁 글려야지 그냥 둥그러면 얻다 쓰겠노?" "깃은 곱게 꺾어서 풀칠은 한 번에 깃본을 넣어 인두로 다려주어야 제대로 선이 살아나지" "한쪽으로 주름이 밀리면 모양도 볼품이 없어지는데 지금 몇 번이나 풀칠을 해서 떡이졌네" 할머니는 연신 잔소리를 퍼 부었다. 막내고모는 고개를 푹 떨구고 꾸중을 듣는 내내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연신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고모가 주무르다 둔 저고리 깃을 펼쳐 보면서 이런 건 울 엄마가 잘 하는데 하며 고모를 헬끔 쳐다보면서 아망을 떨었다. "아야 고모가 꼬집었어" 막내 고모는 내가 얄미웠나 보다. 할머니는 "나이가 몇 살인데 깃하나 못 안치는 년이 와 아는 꼬집노" 하면서 들고 있던 자로 고모의 등짝을 쳤다. "이고 한림 새 같은 가스나" 고모는 벌떡 일어나 가운데 대청을 발을 쿵쿵 울리면서 달아나 버린다."'야 이 분통아 어디가노?" 둘째고모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막내고모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다 말았다. 방문이 열리면서 마루 끝에 화로를 두고 방문을 연 고모는 "희야 또 니가 막내고모 골려 먹었제?" 하면서 화로를 들여놓고 방문을 닫았다. 막내 고모는 유난히 얼굴이 하얘서 분통이라고 불렀다.
금방 불담을 추가한 화로는 온기가 방안을 제법 따끈하게 했다. 고모는 밑의 재를 끌어 올려서 인두로 다독다독 불담을 안으로 다독였다. 나는 고모들이 바느질 하다 남긴 자투리들을 주워 모아 가위질을 해서 도련도 궁글리고 배래선도 볼록하니 맵시를 냈다. 깃도 오려서 밥풀 칠을 해서 붙이고 인두로 살짝 다렸다, "할머니 이 것 봐라 내가 잘 만들었제?"
"에고 내 강새이 제법이네, 작은 고모보다 열배는 났다." 할머니는 유난히 나를 예뻐 하셨다. 이유는 단지 내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여섯의 여름에 그 전쟁이 있기 전까지의 내 유년은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귀염 받으면서 자란 여느 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1950년 6월도 하순이 가까워 오던 날, 아마 15일은 넘었지 싶다. 일손이 부족 했던 우리 집 모내기는 다른 집에 비해 언제나 늦었다. 보통 품앗이가 많은 모내기는 부녀자들의 몫이었다. 우리 집은 들일을 하러 나갈 사람이 없어서 품앗이를 하는 모내기는 늘 다른 집 일이 끝나야 차례가 돌아 왔다. 그해에도 끝물에야 우리 집은 모내기를 했다. 퇴근해 오는 아버지를 무 등을 태운 상머슴 뒤로 동네 일꾼들이 줄레줄레 마당에 들어섰다. 이미 우리 집 안마당에는 멍석이 펴졌고 집안엔 음식냄새가 등천을 하고 있었다.
술은 동이 째 걸러내어 작은 바가지를 띄워냈다. 치마를 다 덮을 만큼 긴 하얀 광목 앞치마를 입은 아낙들이 동동거리고 있었다. 읍내 육수 간에서 사온 돼지고기와 뼈다귀로 육수를 내어 진하게 고깃국을 끓였다. 가마솥에서 끓여진 국물에는 지난 가을에 말려둔 토란대 불린 것과 콩나물, 대파를 숭덩 숭덩 썰어서 가득 담아다 건지를 넣었다. 덤으로 얻어온 돼지 비개가 정구지 적을 굽는 솥뚜껑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날은 대체로 동네 모내기가 끝나는 날이어서 푸짐하게 고기 국 한 대접과 고봉으로 담은 밥은 위가 더 높아 뒤뚱거리면서 밥상에 놓여졌다.
먹고 마시고 한껏 흥이 오른 남정네들이 아버지 노래를 듣자고 막무가내로 졸랐다. 아버지는 음치셨다. 할 수 있는 노래가 노들강변 밖에 없는데 그나마 괴성으로 들렸다. 한바탕 먹고 마시고 흥을 돋워 북과 징에 꽹과리까지 등장했다. 그렇게 농사일로 힘들었던 신을 풀고 냇가로 등목을 하러 우르르 몰려 나갔다. 우물가에는 커다란 장나무 두개를 걸친 위에 판자를 얹고 아낙들이 부지런히 그릇들을 씻어 물기를 뺐다. 그렇게 밤이 이슥해서야 그 많던 사람들이 물러간 집안은 갑자기 싸하게 조용해졌다. 할머니의 불 끄고 이제 자거라 오늘 다들 고생 많았다라고 하시는 말 꼬리는 어둠에 잘려 나간 것 같이 정적에 묻혔다. 그러나 그날이 조용하고 평화롭던 우리 집을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며칠이 지났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전쟁이 났다고 겁에 질려 숙덕거리는 소리에 지레 겁을 먹은 나와 동생도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며칠이 지났다. 유난히도 아버지 바라기였던 나는 엄마에게 "아버지는?" 하면 엄마는 "쉿" 하셨다. 뒤에 들은 말로 외가로 피신을 했다고 했으나 아무도 거처를 묻지도 알려 주지도 않았다. 할머니를 제외한 우리가족은 꼴머슴이 보아 두었던 물이 졸졸 흐르는 앞산 동굴로 며칠 피난을 갔다. 굴이라고는 해도 위가 꽉 막힌 곳은 아니었다. 양쪽 언덕이 거의 맛 닿은 곳에 난 나무와 풀들이 무성해서 골짜기 안이 안 보이는 의지간 같은 곳이었다. 그 골짜기 안에는 비가와도 맞지 않을 정도의 널찍한 곳도 있었고 한쪽에는 맑은 샘물이 솟아나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여름날 며칠 지내기에는 맞춤이었다. 피난을 가려는데 할머니는 집을 비우면 만약 아들이 왔을 때 집이 비었으면 낭패가 아니겠느냐 고 하셨다. 출타한 자식을 두고는 피난을 갈 수가 없다고 끝까지 우겨서 혼자 집에 남았다. 할아버지조차 할머니의 고집에는 어쩔 수 없으셨는지 홀로 남겨 두고 소를 몰고 집을 떠났다. 떠나기 전날 할아버지는 밤을 도와 얼마간의 곡식을 광 바닥에 묻었다. 그 위에 간장을 담은 커다란 항아리로 눌러놓았다.
우리에겐 밀과 콩을 섞어 볶아 담은 자루와 찰떡 두어 덩이 밖에 없었다. 나와 동생은 볶은 콩을 먹고 골짜기 물을 마셔서 배탈이 났다. 결국 우리 때문에 닷새 만에 집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집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인민군들이 동네에 들어와 우리 집으로 들이 닥쳤고 광의 간장 항아리 까지 깨어놓고 갔다. 그들은 약탈 해 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꺼내 갔다. 그러나 다행히 할머니와 광 바닥의 곡식은 남아 있었다. 밤이면 묻어 둔 쌀로 쑨 흰죽 한 사발씩으로 배고픔을 이기고 했다. 피해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은 인민군이 퇴각하던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고 하루 이틀은 전쟁 전의 일상으로 돌아 온 것 같았다. 아직 어수선 하니 나가지 말라는 할머니와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학교로 나가셨다. 학교가 걱정이 되신다며 잠깐 다녀 오마하고 집을 나선 것이다. 아버지가 집을 나서자 옆집에 사는 먼 척의 초임교사가 자기도 궁금해서 나왔다면서 따라갔다. 항렬로 손주 뻘 되는 그 사람은 아재가시면 같이 가보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대로 두 사람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러니 두 집이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하회를 알아보려고 나가셨던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이 퇴각하던 인민군 패잔병과 함께 떠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을 만났다 했다. 지방 좌익 활동 하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끌고 갔다는 것이다. 아마 전쟁 초기에 그 사람들의 손에서 풀려 나기위해 그들이 권하는 서류에 수결을 한 것이 올무가 되어 꼼짝없이 끌려 간 것 같다고 하셨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집안 분위기에 눌려 나와 울보인 내 동생은 소리조차 죽여야 했다. 되도록 어른들 눈에 안 뜨이는 거처한지 오래 된 행랑이나 사랑채 마루 밑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소꼽이라고 해야 깨어진 사금파리를 둥글게 다듬어 큰 것은 쟁반, 작은 것은 종지라 하면서 놀았다. 후에 부산으로 이사하고 부산아이들은 크기도 다양한 조개껍질을 그릇삼아 소꿉놀이를 하고 있어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만삭이 다 되었던 엄마에게 쏟아지는 할머니의 트집은 어린 나에게도 곱지만은 않았다. 할머니는 외가에서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가서 이런 사단이 났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일찍 집으로 오신 것은 처가에서 집을 비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주는 안전할거라고 처가로 피해간 아버지가 진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해로 피난을 가고 난 뒤였다. 그때 외가동네에 아버지의 외숙모님이 친정에 살고 계셔서 우선 그곳에 남았다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외삼촌이 전쟁 전에 이미 작은집을 두고 서울살림을 차려 본댁을 돌보지 않는 상태였다. 어려운 친정살이를 하는 터라 시누이의 아들이 고울 리 없어서 오래 신세를 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찍 집으로 돌아 왔기 때문에 끌려 가셨다며 어머니를 들볶았다. 어린 우리 자매에게도 심술 섞인 보리밥이 배당 되었고 철없던 나는 밥을 안 먹겠다고 울어 댔다. 그럴 때면 엄마의 화풀이 대상은 결국 나였다. 늘 고모들이 돼지꼬리라고 놀렸던 머리도 단장해 주던 엄마의 정성이 끊어졌다. 엄마가 방임한 사이 나와 동생의 돼지꼬리는 동네 이발쟁이 아저씨에게 싹둑 잘리고 말았다. 그래도 엄마는 세상이 귀찮은 듯 모른 척 했다. 엄마는 그 배를 안고서도 많은 식구들의 식사와 빨래와 농사 뒷바라지까지 해냈다. 그리고도 할머니의 질책까지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보시다 못한 작은 할아버지가 오셔서 할아버지와 의논을 하고 이튿날 새벽으로 우리 세 식구는 걸어서 재를 넘어 합천 묘산으로 향했다. 외가로 가는 길이다. 떠나는 새벽, 큰 머슴의 바지게 위에 앉은 나를 향해 할머니는 "희야 지게 목발 꼭 잡아야 된 데이 졸면 큰일 난다" 하시며 치마로 눈물을 훔쳤다. 동생은 꼴머슴이 업고 작은 할아버지 뒤를 작은 보따리 인 엄마가 따랐다. 할머니가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나는 꼬박꼬박 졸았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에 깜짝 놀라 휘이 둘러 본 하늘에 총총히 빛나던 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많은 별들이었다. 새벽길을 다잡아 걸어서 묘산에 도착하고 머슴은 돌아가고 일행은 다섯으로 줄었다.
그 때부터 여섯 살 타박 네의 타박타박 고행이 시작 되었다. 벼가 누렇게 익어 가기 시작하는 초가을 이었어도 한낮의 뙤약볕은 살갗이 따가웠고 아무리 걸아도 길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나는 울어도 보고 주저앉아 떼도 써 보았지만 어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울다가 목이 쉬어 소리조차 잘 나지 않아도 그냥 두고 가 버렸다. 할 수없이 달음질 쳐서 엄마가 보이기만 하면 또 흙바닥에 뒹굴었다. 얼굴에 지렁이를 수없이 그리고 어두워져서야 삼가 이모 댁에 도착했다. 엄마의 맏언니인 큰 이모님은 엄마와 나를 끌어안고 이런 거지꼴을 하고 하면서 우셨다. 작은 할아버지와 꼴머슴은 사랑채로 들고 일찍 잠이 든 엄마 곁에서 이모가 이것저것을 물었다. 나는 그동안 소외 됐던 내게 자상히 대해 주는 이모가 정말 좋았다. 다음 날 아침 이모 집을 떠날 때는 이모 집에 살겠다고 떼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꼴머슴은 농번기에 손이 모자랄 것 같다면서 작은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려보냈다. 잠이 든 동생은 이모 집 약 써는 총각이 대신 업고 길을 나섰다. 이모 댁에는 시동생이 결핵으로 몸이 약해서 집에 반 약국을 차려두고 늘 녹용과 인삼을 써는 총각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동생이 잠에서 깨더니 약 총각이 낯설다고 늑장거리를 하는 통에 도저히 업고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총각은 돌려보내고 배불뚝이 엄마는 동생을 업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내 투정은 말도 안 되는 사치였다.
해가 꼬박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는 의령에 도착했다. 엄마는 한 짐 지고 한 짐 안고 걷는 이중고에 시달렸으니 얼마나 힘이 드셨을지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작은 할아버지는 의령에서 일가 집을 찾아가서 사정을 말하고 일가 댁 이웃의 작은 토방 하나를 얻어주셨다. 그리고 당신은 일가 댁 사랑에 들었다. 그 토방은 흙바닥에 떨어진 거적이 깔려 있었다. 작은 접시에 들깨 기름에 켠 불은 까물까물했다. 그마저도 시래기 갱죽 한 그릇을 먹고 나니 꺼져 버렸다. 엄마는 얼마나 피곤했는지 고꾸러 지 듯 동생을 끌어안고 쓰러져 버렸다. 그 옆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너무 가려워 잠에서 깬 나는 다시 잠 들 수가 없었다. 엄마를 부르며 제발 좀 일어나라고 아무리 흔들어도 응답이 없었다. 그러다 지쳐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았는데 골목 쪽으로 난 작은 봉창이 희뿌연 빛이 비쳤다. 날이 새는가 보았다. "엄마 날 샜어, 봐요 봉창이 환 해졌어" 나는 엄마를 흔들고 또 흔들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날이 새고도 한식경은 지나서야 엄마가 일어났다. 주인집에서 생원님은 일찍 떠나셨다고 했다. 그제서야 작은 할아버지가 먼저 집으로 가신 줄을 알았다. 우리 세 식구의 얼굴은 붉은 반점으로 가득했다. 빈대의 습격에 밤새 시달리느라 한잠을 못 자고 가려움으로 연신 긁어 대는데도 엄마는 별 말이 없었다. 아침도 못 먹고 우리는 의령 화정면 남강의 염창나루로 향했다. 가면서 주막에 들러 밥을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작은 할아버지는 사돈댁 볼 면목도 없으니 이제 잘 가라고 하셨다는 전언만 남기셨다. 그렇게 힘들었을 질부를 보면서도 우리 때문에 못 따라 걸어도 서서 기다려 주는 정도 밖에 아무 도움도 주시지 않으셨다. 그 어른은 당신에게 지워진 일만 해내는 철두철미한 유학자셨다. 형님이신 우리 할아버지의 온갖 트집도 묵묵히 견디면서 큰 집일을 자기 집 일보다 우선으로 하신 분이셨다.
강가에서 바라 본 건너편 지수 쪽에서 나룻배가 건너오고 있었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가렵기도 해서 강물로 뛰어 들었다. 외마디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내 저고리 고대를 잡아들고 끌어냈다. 그리고 엄마는 마구 퍼질고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도 참고 참았던 설움이 멀리 친정 쪽에서 오는 배를 보면서 터져 버린 것이다. 배가 건너오고 내리는 사람들 틈에서 "에고 이게 뭔 일 인교 애기씨 세상에...." 외갓집 안잠지기였던 아낙이 엄마를 붙들고 사설 섞어 눈물을 찍어 냈다. 외가도 진해로 피난 가면서 머슴이 쌀 두말과 싱거미싱을 지고 가서 한 달여를 지내면서 재봉틀을 빌려주고 쌀 되값을 받아서 배를 채우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너무 힘들어서 죽어도 집에 가서 죽자고 집으로 돌아 왔다는 이야기를 그녀가 전해주었다.
지금 그 댁도 이 빠진 밥그릇하나 없는 그야말로 극빈의 형세라 아직 여물지도 않은 벼를 베어다 온 마당에 펴 널어놓고 있더라고 했다. "어서 안타요" 소리치는 사공의 채근에 다시 돌아가는 배에 우리와 아낙까지 되돌아서 배를 탔다. 건너편에 도착하고 안잠지기 아낙이 동생을 업고 가려고 등을 들이댔지만, 낯가림이 심했던 동생은 또 죽어라고 울어댔다. 그래서 그 등이 내 차례에 와서 난 모처럼 업혀서 잠들 수 있었다. 아낙은 우리를 외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외가로 들어서는 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엄마 뒤를 쫓아 치마꼬리를 붙잡고 들어선 우리에게 쏟아진 냉대란 말로 하기가 어려웠다. 외숙모님은 우리를 보더니 그냥 건넌방으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 외할머니가 우리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작은 소리로 자초지종을 물었다. 엄마의 울음 섞인 하소연을 들으며 나는 또 쏟아지는 잠 속에 빠지고 말았다. 해가 기웃해진 녘에야 설익은 찐쌀로 끓인 흰죽 한 그릇에 깨소금도 없는 말간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진 상 앞에 앉은 동생과 나는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었다. 눈치 없는 동생은 엄마 몫까지 자꾸 숟가락을 들이 대고, 엄마는 그 죽 마저 술을 들지 못했다. 남편은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그제야 맘을 놓고 보니 서러움이 몰려 왔나 보았다. 엄마는 일어날 기운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동생의 숟가락을 손으로 눌려 잡고 있었다. 칭얼거리는 동생의 소리에 엄마가 그만 놓아 줘라 해서야 우린 또 그 죽 그릇마저 비워내고 말았다.
외할머니께선 '우리 집 살림살이 그 많던 옷가지를 도둑질 해 간 사람이 피난 안 가고 남아있던 동네 사람'이라고 원망을 쏟아놓았다. 외가집 살림을 가장 잘 알던 안잠지기를 의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녀도 외가에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속절없는 세월이 가서 외가에도 가을 추수를 하고 외삼촌이 다시 진주에서 하던 사업을 추 스린 다고 나 다니셨다. 그런 어느 날 외할머니와 엄마의 목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외할머니는 '내 팔자야' 하시면서 두 가시내에 금방 낼모레 하는 아인 어쩔 거냐고 우격다짐을 하셨다. 소리죽여 우시는 엄마를 알은체를 할 수도 없어 불안한 맘에 엄마 곁을 뱅뱅 도는 날들이 이어졌다. 언제 우리가 엄마와 헤어져 고향집으로 내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쌓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동생은 날마다 울어대고 나는 눈치꾼이 되어갔다. 그리고 엄마는 셋째 딸을 출산했다.
그나마 아들이라도 낳았으면 기다리시던 고향집에선 이제 완전히 나 몰라라 하셨다. 건성으로 작은 할아버지가 한번 다녀가셨을 뿐이다. 내가 장성해서 든 생각에 그나마 사돈 대접이 아니다 싶어 염치 빤 하셨던 작은 할아버지께서 형님 모르게 다녀가셨지 싶다. 외할머니께서는 젖먹이까지 떼 놓으라고는 못하시고 우리 둘을 자꾸 친가로 보내라고 채근을 하셨다. 그리고 나는 자주 울고 계신 엄마를 보았다. 그래도 할머니가 그렇게 위하는 손녀니까 내 걱정은 덜 하셨는지 동생을 끌어안고 우셨다.
그때 고성에 사시는 엄마의 바로 위 언니인 이모님이 나와 동갑이나 생일이 먼저인 이종사촌 오빠와 내 동생과 동갑인 여동생을 데리고 친정에 오셨다, 그 이모님은 위로 아들 셋을 낳으시고 밑으로 딸 둘을 낳으셨고 살기까지 편 하셨다. 친정에 와서도 떳떳하기가 내 집보다 더 했다. 엄마는 자랄 때 귀염 받고 자란 막내딸이 천덕꾸러기가 되어 눈치 만 보며 살았다. 그런 중에 나와 내 동생에게 준 먹을 것을 이종사촌 오빠가 자기 몫을 다 먹고 빼앗는 실랑이가 생겼다. 악에 바친 내가 오빠 손가락을 물었다. 이모는 못된 년 하시면서 내 등짝을 후려치셨고 서러우신 엄마는 우리 셋을 데리고 다시 고향집으로 오셨다. 그런데 그 때엔 어떻게 왔는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내 기억에 하나도 남아 있는 게 없다. 아마 사람이 잊고 싶은 때를 무 자르 듯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이런 것일 거라고 가끔 생각한다. 엄마는 성격이 물러터진 나를 보고 태를 키워도 저보단 나을 것이 라고 늘 말했다. 그런데 그때는 무슨 용기로 이종 오라비에게 그렇게 덤볐는지 불가사의라고 하셨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소식이 없었다. 엄마에게 퍼부어지는 질책은 점점 심해가고 나는 우정 못 본채하고 할머니께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었다. 물자가 귀한 그때에 외가에서 가져온 아기 기저귀까지 시새움의 대상이 되었다. 생판 옷을 해 입어도 남을 광목으로 기저귀를 했네 하면서 고모들이 도끼눈을 떴다. 춥기가 고추같이 매운 날에 네 살짜리 어린 동생이 아기 기저귀를 개고 있는 엄마를 돕겠다고 나서도 나는 모른 채했었다. 왜 그랬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뱃속에서부터 온갖 고생을 하고 태어난 갓난이는 시름시름 앓았고 이름도 없이 아버지도 못 본 채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피를 토하듯 울던 엄마 모습은 지금도 가슴에 선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엄마가 내게 조금 언짢게 해도 나는 엄마를 원망 할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아버지께서 돌아 오셨는데 안채에 있던 우리는 아버지 오신 줄도 몰랐었다. 밤중에 오신 아버지가 작은 할아버지를 앞세우고 거창지방 치안을 담당하셨던 분을 찾아 가셨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치안대장이 지금은 전시라 죄의 유무를 가릴 처지가 아니니 무조건 피해 있으라 했다는 이야기도 후에 알았다. 인명이 많이 상한 전쟁이 끝나면 인재가 많이 필요 할 텐데 죄 없는 사람까지 희생 시킬 수 없다 했다는 것이다.
그 뒤에 불어 닥친 이웃과의 전쟁은 진짜 전쟁은 전쟁도 아니었다. 우리집에서는 입에 걸기가 두려워서 쉬쉬 했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옆집 손주인 그 사람의 어머니가 날마다 찾아와 자기 아들 찾아내라고 난리를 쳤다. 술을 한잔하고 나면 우리 집 마당에서 울고 뒹굴었다. 세상에 어느 할애비가 손주를 사지에 놓아두고 혼자 살아오느냐며 넓은 마당이 좁게 뒹굴었다. "에고 불쌍한 내 새끼야 세상에 믿을 게 어디 있다고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라고 하는 넋두리에 마당에다 신발을 벗어 탕탕 내리치곤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당신이 죄지은 사람마냥 안절부절 하셨다. 할아버지는 옆집에다 매번 "네 처 데려가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 집 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 보기가 민망해서 인지 대문간에 지켜 서 있다가 거품을 물고 쓰러진 아내를 업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소동이 계속되니 아버지가 오셔도 아무도 모르게 다녀가시고 했다. 그로부터 2년여를 우리는 아버지 얼굴도 못보고 살았는데 그 시기에 학교에 입학한 나는 두어 달을 학교에 다녀도 숫자도 내 이름도 못 쓰는 아이였다. 세상이 귀찮아 지신 엄마는 여전히 누워 지내셨다. 학교를 가는지 마는지도 챙기지 않으셨다.
어느 토요일 오후 둘째 고모가 뒷논 봇도랑에 미나리 캐러 가자고 나를 데리고 나섰다. 고모는 길바닥에다 나물 칼로 커다랗게 내 이름자를 써 놓고 "희야 이기 니 이름인기라" 하면서 보고 써 보라고 했다. "니는 자랑스러운 울 오빠 딸 인기라 바보가 될라 캤더나" 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고모의 눈이 빨갛게 충혈된 것을 보고 나도 같이 울고 말았다.
나는 공책도 없었고 연필도 막내 삼촌이 쓰다 버린 몽당연필을 주워서 학교를 다녔다. 그날 저녁부터 축담에 주저앉아 숯덩이를 주워서 이름도 쓰고 숫자도 쓰고 책을 펴서 더듬거리며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해서 선생님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는 담임도 없이 시간 남는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돌보아주셨다. 이틀을 얼마나 쓰고 또 썼는지 월요일 학교에 가서는 이름은 물론책을 곧잘 읽었다. 교장이신 고모부님이 보시고 머리를 쓸어주셨다. 저녁에 고모부는 집으로 오셔서 "그렇지 네가 누구 딸인데" 하시며 기특해 하셨다. 그 고모아재는 수재로 소문났던 재종처남의 딸이 바보처럼 되어가는 것을 속으로 많이 안타까워했었나 보았다.
1953년 새해를 맞았고 겨울 방학 중이었다. 그때 내 유일한 남동생이 태어났고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고구마를 가지고 와서 두엄을 잔뜩 두어서 온상도 만들었다. 지금처럼 비닐이 있는 시기가 아니어서 두엄위에다 고구마를 심고 대나무로 지붕을 만들었다. 그 위에 짚을 덮어 순을 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고 가셨다. 부산에서 학교에 복직을 했는데 봄 학기에는 부산에 피난민이 많아서 사택이 차례에 오지 않을 것 같다 하셨다. 사택이 비는 대로 데리러 오마고 약속을 했다. 여름 방학을 하고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오셨을 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그 한 많은 고향집을 뒤로하고 다시 외가로 향했다. 아버지가 가져다 주신 고구마를 우리 가족들은 밭에 모종을 내어서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그 고구마는 결국 먹어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는데도 뒤돌아 볼 마음 따위는 이미 내 생각 속에는 없었다.
아버지가 외할머니께 사택이 곧 빌 것 같으니 한 달만 우리를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 가셨다. 그 후로 외할머니와 외숙모의 대우가 확연히 달라져 있기도 해서 우리 자매는 꽤 행복한 외가 살이를 했다. 그리고 나도 철없이 외사촌들과 다투던 객기는 사라진 뒤였다. 방학이 끝나고 외사촌들이 다 개학을 해서 학교를 가는데도 아버지께는 연락이 없고 학교를 못가는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외삼촌이 외사촌들과 똑 같이 사다 준 공책과 필통에 연필까지 깎아서 가지런히 담아두고 기다렸다. 하루에도 여러 번씩 열어보고 누가 보면 닳을세라 얼른 닫아 두곤 했다. 새 연필 새 필통 새 지우개를 가진 기분이 어떤 것이었는지 어렵게 얻어 본 사람이 아니면 상상도 못할 것이다. 2학기에 들어서고 나서 거의 한 달이나 지나서야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부산에 와서 내 2학년 2학기는 낯선 환경에다 늦어진 학업진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겨우 숫자를 쓰고 한자리수 더하기를 하다가 전학을 온 와중에 생긴 한 달 여의 공백이 너무 컸다. 처음 대하는 위, 아래 두 자리 수 덧셈은 머릿속을 헝클어 진 실타래로 만들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듣는 표준말도 생경스러웠다. 그때 부산은 서울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넘쳐 나고 있었다.
부산에서의 생활도 늘 화창한 것이 아니어서 수없는 부침을 거듭했다. 결국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칠 무렵 아버지는 교직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 전쟁 시의 아버지 행적 때문임을 엄마의 푸념으로 알게 되었다, 그땐 그 행적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작은 가슴이 늘 팔딱 이고 있었다. 겨우 다시 아버지가 행정 공무원이 되셨던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우리 집 생활은 고향에서 보내 주시는 쌀로 끼니를 이어가기도 바쁜 나날이었다. 공납금 독촉을 받는 몇 몇 아이들 틈엔 늘 내가 끼어있었다. 아버지가 다시 취직을 하신 것은 학교 선배이신 분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저물 즈음 그 행복도 끝나고 말았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나 은인인 선배의 세무사건을 아버지가 책임을 지고 물러 난 걸로 추측이 될 뿐이다.
드디어 아버지가 용단을 내리셨다.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로 마음을 정하셨다. 정면 돌파를 결정 한 것이다. 그리고 정황상 어쩔 수 없는 형편이 참작되어 사면을 받으셨다. 행정직 공무원 근무 이력으로 이듬 해 부터 고향 면장으로 복귀를 하셨다. 우리 집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걷힌 날이기도 했다. 그 뒤에 여러 직을 거쳐서 거창 함양 양군의 농지개량조합장으로 정년을 맞으셨다.
1986년 봄 정년퇴임을 하시는 날 우리 형제들은 그동안 노고를 위로해 드리려고 모여서 점심을 먹고 작은 황금열쇠를 해 드렸다. 아버지가 평생 갖지를 않으셨던 귀금속이었다. 이제 아버지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 속 그림자가 그리 쉽게 지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도 더 세월이 흘러서 2001년 2월에 서울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고향방문 남북 이산가족들이 북에서 왔다. 이듬해 봄에 친정집에 들린 내게 아버지는 속마음을 토로 하셨다. 방문단 속에서 아버지 때문에 납북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아끼던 손주 뻘인 그사람을 보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가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하셨다. "이제 다 끝이 낫 구나" 하시면서 긴 한 숨을 토 하셨다.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나도 TV에서 그 사람 이름을 발견하고 가슴을 조이면서 봤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우리 집에 와서 울고 뒹굴던 그의 어머니도, 난처해하며 아내를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였다. 그의 여러 명이던 동생들이 가슴에 김일성 뺏지를 단 그를 끌어안고 울었다.
2005년 여름, 아버지는 내가 회갑을 맞은 해, 86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아이들이 마련해 준 해외여행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임종도 못 보고 말았다. 아버지의 짐을 정리하는 내내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신의 누구에게도 말 못할 그 힘든 때를 그래도 비교적 많이 기억하고 있는 나를 의지하고 계셨던 아버지시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지난 세월 이야기를 내 동생들에게 말 해 본 적이 없다. 조금은 알고 있을지도 모를 바로 아래 동생에게도 마찬가지다. 내 아래 동생이 아버지가 작은 수첩 하나를 가지고 계신 걸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부랴부랴 수첩을 찾았다. 그 수첩에는 기억의 저쪽이라고 쓰여 있었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 수첩을 펴 보았을 때, 아무런 글도 없었다. 아버지는 무슨 말을 남기시려다 끝내 아무 말도 않으시고 떠나셨을까?
이제 아버지 가시고 홀로 고향 아파트에 남으셨던 어머니도 성당에서 운영하는 실버타운으로 떠나셨다. 타운 쪽에서 연세가 많아서 적응하시기 곤란 하지 않을 까 걱정하는 것을 떼를 쓰다시피 해서 가셨다.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르는 어머니를 그리 떠나 보 낸 마음을 뭐라고 말로 형언 할 수가 없다. 어머니는 하나 밖에 없는 며느리가 불치병에 걸려 "내 앞에서 어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견디지 못 하겠다" 하셨다.
어머니가 실버타운으로 떠나신 며칠 후 나는 친정집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 보았다. 오십 여 년을 써온 번호다. 그동안 두 자리 번호였다가 다시 네 자리로 다시 열자리 숫자로 변해온 끝의 두 자리가 늘 따라다닌 정든 번호. 이제는 없는 번호라고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준다. 이미 전화가 끊긴 줄을 알면서도 전화한 마음은 미련을 끊기 위해서였던 것도 같다. 다시 한 번 눈물을 찍어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난 후,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날 갑자기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서다가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벽이며 창이 위아래로 줄줄이 내려왔다 올라갔다하는 증상에 어지러워서 밖에도 나가기가 힘들었다. 여기저기 몇 병원을 가봤지만 가는 곳 마다 그럴 듯한 병명이 없는 채로 신경외과에서 주는 약과 주사를 맞았지만 호전 될 기미가 없었다. 병원에 다녀 나와서 길거리에서도 내가 딛고 있는 땅이 흔들려 가로수를 붙잡고 서있었다. 지나가는 나보다 조금 연배가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분이 혹시 어지러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어지럼증을 잘 보는 한의사가 있었는데 그분이 몇 해 전 돌아가시고 아들이 이어서 하는 한의원이 있는데 한번 가보라고 친절을 베풀었다. 한걸음에 달려갔더니 젊은 한의사님은 이야기를 다 듣고 메뉴엘씨 병인 것 같은데 아직 우리나라에는 서울 대학병원 한곳에서 시험 연구 중인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의사가 비교적 자세히 귀안의 달팽이관에 있는 이석이 여러 가지 이유로 움직여서 균형 감각이 깨어져서 그렇다고 말해 주었다. 아직 완치는 어려운 걸로 안다고 식이요법을 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지금은 이석증이라고 해서 간단히 머리를 흔들어서도 나을 수도 있다는데 그때는 병명을 제대로 아는 의사도 만나기 쉽지 않았다.
고향에 식이요법과 단식을 겸하는 단식원이 생겼다고 해서 당장 친정으로 향했다. 바로 단식에 들어갔고 단식이 내게는 맞지 않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먹으면 토하는 바람에 회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링거로 생명을 연장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머니가 외출하신 뒤에 집에 누워 지내는 내게 아버지는 오래전 전쟁 중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인민군 패잔병에게 끌려 낮엔 풀숲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북으로 향해 가는 행렬이 길게 늘어서 꾸벅꾸벅 걸어가면서 아버지는 탈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했다. 되도록 이면 따라 나섰다가 같은 신세가 된 일가인 그 사람을 가까이 두려고 노력했다고 하셨다.
그러다 속리산 부근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밤중에 비29 비행기가 폭격을 했고 조카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서 그냥 길가 비탈길로 마구 굴렀다고 했다. 생각보다 경사가 가팔라서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는데 다행히 나무에 걸렸고 조금 있다 위에서 찾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소리 내지 않고 가만히 계셨다고 했다. 한참 후에 북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떠나는 소리가 들렸고 날이 뿌옇게 밝아오는 것을 보고서야 길에 올라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고 헸다.
큰길에 들어서자 얼마 후에 길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가운데 책상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을 해서 통행증이 없는 사람들을 분리해서 차에 태우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물론 통행증이 있을 리 없었지만 길게 늘어선 줄의 뒤에 가서 서 있다가 줄이 줄어들면 도로 뒤로 가서 서고는 했다고 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앞에서 검문하는 사람이 누구 글을 아는 사람 중에 한글과 한문 영문까지 아는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해서 얼른 나갔더니 그곳에 일하는 군속이 본부에 일이 있어서 부대에 들어가야 하니, 대신 일 좀 봐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통행증을 발부도 해 주고 당신 통행증도 슬그머니 하나 끼워 넣어 만들었다가 나중에 그곳에 일하던 군속이 왔을 때 교대를 하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고향에 도착하는 즉시 보안대에 자수를 했고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피신했다는 것이다. 이제 내 어머니도 당신의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하나 뿐인 며느리를 하늘나라 가는 일에 앞세우시고 귀양살이 하듯 그렇게 살고 계신다. 며느리가 혈액 암 중에서도 예후가 안 좋다는 혈소판 감소 증이라는 소리를 들으시고도 꼿꼿하셨다. 있는 돈 다 들여서라도 고치면 된다고 하셨다. 창원에서 서울까지의 병 바라지 십여 년이 어머니의 기를 다 꺾고 말았는지 옛날의 팔팔하신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아버지까지 가시고 나서 혼자서 며느리를 앞세우셨다. 외할머니가 간 그 길을 답습하시면서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어머니는 늘 "외할머니처럼은 살지 말아야 할 텐데" 라고 하셨다.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다. 바꿔 갔으면 좋았을 것이란 주변의 말들이 괴로우셔서 실버타운 행을 서두셨다. 매사에 곧고 깔끔하신 그분이 지금은 약간의 치매기운까지 있으시다. 우리 여섯 자식들은 아무도 어머니를 말리지 못했다. 나도 그래도 되겠느냐는 말을 입속으로 응얼거리기는 했지만 안 된다는 말은 못했다. 다시 생각하니 못 했던 게 아니라 안 했던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프다.
이사를 하시기 전에 찾아 뵌 내게 너는 멀리 사니까 더 만나기 힘 들 것 같네 하셨다. 얼마나 맏딸이 미덥지 못 했으면 싶었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꼭 갈게요" 라는 공수표를 떼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말은 정말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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