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박영숙

입력 2017-10-10 11:32:41

1. 기억

'쉬-웅'

폭격기의 굉음이 주위의 모든 소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땅이 흔들렸고, 부엌의 온갖 집기들이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엄마는 본능적으로 나를 업고 부엌으로 달려가 빗장을 채우고 아궁이 옆에 납작 엎드렸다. 꼬들꼬들한 무명 저고리의 감촉과 축축한 땀내에 섞인 익숙한 풀 내음을 맡으며 나는, 엄마의 등에 기대어 귓속을 파고드는 굉음의 실체가 어쩌면 엄마의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른쪽 한 번, 왼쪽 한 번, 그렇게 양쪽 귀를 번갈아가며 엄마의 등에 대어보다가, 얼굴을 폭 파묻거나 볼을 부비기도 하면서 나는 온 몸으로 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가 산산이 부서진 소리 끝에 남은, 어미의 등가죽에 질기게 엉겨 붙은 저린 떨림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엄마의 저고리 앞섶으로 손을 밀어 넣어 말라붙은 젖가슴을 쪼물거리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그때가 갓 세 돌을 넘긴, 오래 묵어 희미해진 기억들 속에 단 하나, 선명했던 소리에 대한 기억이다.

2. 돌무지무덤

6·25 동란이 한창인 때였다.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산으로 들로 흩어져 몸을 숨겼던 때라 쑥대밭이 된 집안을 건사하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몫은 오로지 여인들의 차지였다. 사흘들이로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고, 그때마다 수확을 끝낸 뒤주의 곡식이며 소, 돼지, 닭 등의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먹을 것이라곤 산야의 풀뿌리가 유일했는데, 그마저도 폭격이 시작되면 손쓸 새도 없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산 입에 거미줄을 치고 앉았을 상황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리마다 역병이 돌아 아이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장례는 고사하고 무덤 자리를 마련할 여유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마을 어귀의 언덕배기에 구덩이를 하나 파서 죽은 아이들을 한데 묻었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은 끝을 모르고 덮쳐와 산 이와 죽은 이의 심장을 견디지 못하게 짓이겨 놓았다. 흙이 채 마르지도 않은 어린 무덤 위로 연일 포탄이 떨어졌다. 아이들의 시신은 어느 이른 찬바람에 실려 날아갔는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시커먼 잿더미와 텅 빈 구덩이로 남은 무덤 앞에서 새끼 잃은 어미들은 저물도록 땅을 치며 울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일어나 치마폭 가득 돌멩이를 날라다가 구덩이를 메우고 봉분 대신 돌무지무덤을 쌓았다. 그렇게 쌓은 돌무지무덤이 동리의 언덕마다 넘쳐났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마치 돌탑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땀 한 땀 돌을 쌓으며 어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식 빠져나간 헛헛한 가슴을 무엇으로 메울 수가 있었으랴. 개중 한 어미는 끝내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고 했다.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겠다며 밤낮으로 가슴을 풀어헤치고 산을 헤매다가 퇴각하는 군인에게 능욕을 당하고 강물에 버려졌다고 했다. 인간사의 무수한 비극이 결국에는 인간에 의해서 빚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진실이 아닐 수 없다.

3. 홍역

우리 집에도 어김없이 역병이 돌았다. 내 밑으로 돌도 지나지 않은 여동생이 홍역을 앓다 죽었고, 연이어 나도 홍역에 걸려 온 몸에 고름이 차오르고 열꽃이 피었다. 그 당시 홍역은 전쟁 중이 아니더라도 고치기 힘든 고약한 병이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를 곧 죽을 목숨으로 여겼다고 했다. 그러나 어미란 본디 자식을 포기하는 법이 없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엄마는 당신 목숨은 지천에 버려둔 채 어린 목숨을 위하여 잠잠해진 밤을 틈타 잿더미로 변한 논과 밭을 맨손으로 파헤치고 다니셨다. 지금처럼 환한 가로등이 있어서 밤도 낮과 같이 밝은 때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해가 지면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운 그 밤길을, 따지고 보면 이제 막 스물을 갓 넘긴 어리디 어린 여인이었던 엄마가 시린 달빛을 의지해 걸었을 생각하니,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경의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여태껏 말라버린 줄로만 알고 살아온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른다. 그렇게 엄마는 타다 만 콩깍지 속에서 익은 콩을 주워 모아 콩죽을 쑤어 먹이고, 잿더미로 변한 밭에서 용케도 남은 무를 구해다가 즙을 내어 진물이 난 자리에 발라주며 끝내 꺼져가는 어린 생명의 불씨를 살려내셨다. 모두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다. 그 기적을 일으킨 이는 다름 아닌 엄마였다. 그렇기에 나는,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는 이가 신이라면, 그 신을 감복케 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엄마라고 생각한다.

4. 해우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흘러 영원할 것 같았던 전쟁도 끝이 나고, 실로 오랜만에 마을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징집을 피해 도망갔던 남자들이 마을로 돌아왔다.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 중 살아남은 이들도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다. 해우의 기쁨이 담장을 넘어 마을에는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집마다 구곡간장이 애끓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전사 통지서와 더불어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는 실종 통보가 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십 호 남짓 사는 소담한 마을은, 족보로 따지자면 모두가 친척뻘인 밀양 박씨 집성촌이었다. 넉넉지 않은 시골 형편에 서로 콩 한쪽도 나눠먹으며 동고동락해온 처지인지라 모두가 가족 같이 정이 깊은 사이였다. 누구네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이었고, 누구네 남편이 아니라 우리의 일가족이었기에 마을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를 필두로 아버지와 작은 삼촌, 막둥이 삼촌까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난리 통에도 매일 새벽마다 정화수를 길어다가 모두의 무사안녕을 기원하신 할머니의 바람이 이뤄졌던 것이다. 평소 부정 탄다며 드러내놓고 좋은 내색하기를 꺼려하셨던 할머니도 그날만큼은 막둥이 삼촌의 얼굴을 오래도록 쓰다듬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다.

5. 막둥이 삼촌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막둥이 삼촌이 고향으로 내려왔을 때, 때마침 마을에 징집 명령이 떨어졌다. 다들 전쟁에 나갔다가는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해서 어리나 늙으나 상관없이 마을 남자들은 몽땅 피신하였다. 막둥이 삼촌도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 삼촌과 함께 산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한 달포쯤 지났을 때 별안간 막둥이 삼촌이 급하게 처리할 용무가 있다며 할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을로 내려갔다가 그 길로 소식이 끊겨버렸다. 끼닛거리를 가지고 피신처에 갔던 할머니는 막둥이 삼촌이 없어졌다는 말에 그 자리에서 혼절하셨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막둥이 삼촌이 징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는 그날로부터 새벽마다 정화수를 길어다가 기도를 올리셨다. 까막눈이던 할머니 대신 가족들이 번갈아가며 여러 차례 삼촌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다고 했다. 막둥이 삼촌의 편지가 사고로 분실되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배달될 편지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집으로는 한 통의 편지도 배달되지 않았다고 했다. 바람만으로 힘겹게 기다린 세월이었기에 막둥이 삼촌의 귀환은 할머니에게 더 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가족 모두의 기쁨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뿌린 비운의 밑씨는 어느 때고 반드시 싹을 틔우고야 마는지, 그즈음 울타리 너머로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불운의 그림자가 집안에 감돌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온 막둥이 삼촌은 어딘지 분명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계집애처럼 잘 웃고 조잘거리던 삼촌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농사일에, 아버지는 면사무소로, 작은 삼촌은 부산에 있는 직장으로, 모두 일상으로 복귀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지만 막둥이 삼촌만은 아래채에 있는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하였다. 밥 먹을 시간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가족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채 온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할머니가 따로 밥상을 차려 손수 방으로 날랐지만 손도 대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방문 앞에서 밥상을 내려다보며 길게 한 숨을 내쉬곤 하셨다.

그즈음 나는 제법 뛰어다니며 놀던 때였다. 홍역으로 인해 진물이 나는 것은 여전했지만 크게 한 고비는 넘긴 때라 팔랑거리며 종횡무진 마당을 뛰어다녔다. 여섯 살이 많은,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직 귀밑머리 까만 어린애에 불과했던 막내 고모가 그런 나를 살뜰히도 보살폈다. 엄마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당 한편에 있는 우물 옆 수챗가에서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그것이 임신인 줄도 모르고 혹여나 엄마가 병에 걸려 죽어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그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어대곤 했다.

이따금씩 막내 고모는 막둥이 삼촌의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닫힌 방문에 대고 몇 번씩 "오빠야!"라고 부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살포시 방문을 열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왠지 무서워서 멀찍이 마당 한가운데로 비껴나 있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온 신경은 방안으로 집중되어 연신 힐끗거리며 문틈으로 방안을 엿보려고 애쓰고는 했다. 당시 막둥이 삼촌의 방이 있던 아래채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본채와 마주보고 있었는데 기와를 얹은 삼칸짜리 건물이었다. 양끝으로 누에를 치는 방과 머슴이 기거하던 방이 있었고 그 사이 가운데 방이 막둥이 삼촌의 방이었다.

환한 대낮이었음에도 막둥이 삼촌의 방은 짙은 어둠이 드리운 듯 캄캄한 것이 흡사 동굴 같았다. 삼촌은 책상 앞에 옹송그린 채 앉아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가려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핼쑥한 모습임을 짐작케 했다. 볼이 움푹 패여 있었고, 연신 입술을 오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먹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삼촌이 고개를 휙 돌리며 나를 노려볼 것만 같아 겁이 났기 때문에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먼 훗날 나는,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가족들이 삼촌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때때로 그 소리는 닫힌 방문 너머까지 또렷하게 들리곤 했다고 했다.

계절이 지나고 이른 봄 모내기를 앞둔 어느 날 나는 며칠 간 작은 집에 맡겨졌다. 작은 집의 내 또래 친척들과 뛰노느라 여념 없었던 그 때, 불과 몇 십 미터 떨어져 있던 우리 집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어났다. 여느 때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줄로 알았던 막둥이 삼촌이 목을 매 자살을 했던 것이다. 손 댄 흔적도 없는 밥상을 도로 물려나오던 할머니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방문을 열었더니 공중에 사지를 늘어뜨린 몸뚱이가 매달려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이미 숨이 빠져나간 삼촌의 팔다리를 연신 주무르며 삼촌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지만 끝내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부모 앞서 간 자식에게는 장례는 물론 봉분도 허락되지 않던 때였다. 가족들은 부산의 어느 화장터에서 삼촌의 시신을 화장시키고 유골은 선산의 잘 자란 나무 아래에 묻었다고 했다. 천둥이 치는가 하면 추적추적 비가 내려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사흘 만에 본 할머니는 혼이 쏙 빠진 허깨비 같은 모습이었다. 진종일 벽을 향해 돌아누워 계시는가 하면, 이따금씩 마룻바닥을 두드리며 통곡을 하셨다. 막둥이 삼촌이 왜 자살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안 어디에서도 유서는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온갖 추측들이 날개 돋친 듯 마을을 지나 이웃마을과 장터에까지 오르내렸다. 한동안 나는 막둥이 삼촌이 여전히 동굴 같던 그 방에 그대로 있는 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할머니가 삼촌의 밥상을 나르지 않는다는 것을, 더 이상 막내 고모가 삼촌의 방문 앞을 서성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삼촌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막둥이 삼촌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입학 즈음 마을 아이들을 통해서였다. 삼촌의 죽음은 수시로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렸고 그 틈에 누구네 집 귀 밝은 아이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사실과 소문이 경계를 무너뜨리고 뒤범벅된 이야기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공포였다. 형체도 없는, 막연한 공포로 인해 나는 오랫동안 아래채에는 얼씬거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길고 지난한 장마 끝 어느 날, 삼촌의 방문이 열렸다. 장마 끝에 아래채 서까래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는데, 이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집기들을 밖으로 들어내면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래채에 웅크리고 있던 집기들이 마당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책상과 책꽂이도 있었다. 잡동사니가 잔뜩 쌓인 책상의 한쪽 귀퉁이에 언뜻 무늬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것이 보였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박인영」

막둥이 삼촌의 이름이었다. 책상 상판에는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박인영'이라는 글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새겨져 있었다. 한 번 새긴 이름 위에 덧입혀 새긴 것도 있고, 옆면 모서리와 책상 다리에도 드문드문 새겨져 있었다. 책상이 마치 거대한 부적처럼 느껴졌다. 온 몸이 바르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잔뜩 웅크린 채 입술을 웅얼거리는 삼촌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뒷걸음질 쳐서 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걸어잠갔다. 그 때 처음, 어렴풋이나마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인지했던 것 같다. 슬픔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에 가까운 것이 죽음이라 생각했다.

아래채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삼촌의 책상과 물건들은 폐비닐을 덮은 채 한동안 마당 한쪽에 머물렀다. 나는 낮에도 혼자서는 그 앞을 지나갈 수가 없어서 늘 막내 고모의 손을 잡아끌었다. 밤이면 그것은 검은 형체로만 남은 삼촌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삼촌의 책상은 마당에서 사라졌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막내 고모에게서 막둥이 삼촌이 중얼거렸던 말이 다름 아닌 박인영, 자신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삼촌은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책상에 새겼다.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단 하루, 삼촌이 목숨을 끊은 날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래채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신 것도 결국은 그 침묵 때문이었다.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던 막둥이 삼촌이 끝내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던 걸까. 살기 위해 살육해야만 하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삼촌은 제 이름 석 자에 담긴 존엄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비극일 따름이다.

6. 외갓집

아래로 다섯 살이 차이나는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나는 집안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대를 잇는다는 이유로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집들이 많은 시절이었지만 우리 집은 달랐다. 워낙 손이 귀했던 집안이라 아들딸을 두고 눈에 띄게 차별하는 일은 없었다. 딸이 귀했던 외가에서는 유별나게 더 예쁨을 받았다. 웅평에는 나를 귀애하던 외갓집 식구들 외에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진귀한 물건들이 그득했기 때문에 나는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시시로 외갓집을 찾아가곤 했다. 집에서 작은 고개만 하나 넘으면 외가가 있는 웅평이었는데 어린 아이의 걸음으로도 반시간이면 족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매번 한 가지 이유로 그 길을 망설이곤 했다. 웅평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을 중에 나병환자촌, 지금의 말로 한센인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말에는 문둥이 마을이라 불렸다. 지금에야 한센 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많아져 예전과 같은 편견이나 선입견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온갖 흉측한 소문들이 많이 나돌던 때였다. 아이들을 잡아다가 산 채로 간을 빼먹는다던지, 아이들을 데려다가 삶아먹는다는 등의 얘기가 비일비재했었다. 가뜩이나 겁이 많았던 나는 도저히 혼자서는 그 앞을 지나갈 수가 없어서 매번 엄마나 할머니 혹은 머슴들과 동행했다. 그러나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다. 장차 나는 그들에게 큰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 외가는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이 많아 사는 형편이 퍽 좋았다. 삼칸짜리 기와집을 제일로 치던 우리 마을과 달리 외갓집은 으리으리한 오칸짜리 기와집이었다. 무명 저고리에 한복을 주로 입는 우리 마을 사람들과 달리 웅평에는 양복에 안경까지 맞춰 쓴 세련된 모던보이들이 많았다. 삼촌들은 서울이며 진주, 만주, 일본 등지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시집오기 전 엄마도 만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엄마의 교육 예찬 덕분에 나는 마을의 여느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고등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다.

외갓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작은 외삼촌의 방이었다. 그곳에는 나팔꽃을 부풀려놓은 것 같은 소리관이 달린 유성기가 있었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턴테이블 위에 동글납작한 판을 올려놓으면 노래가 흘러나왔다. 작은 외삼촌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작동시키지를 못하고 그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종일 구경만 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명절이나 방학이 되어 외삼촌이 외가에 도착하면 하루 종일 노래를 들었다. 개중에는 가사가 있는 노래도 있었고, 가사 없이 연주만 흐르는 것도 있었다. 때가 지난 줄도 모르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날이 저물도록 유성기 앞에서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7. 소리 1

전쟁 중 홍역을 앓았다가 살아남은 아이는 마을에서 내가 유일하였다. 시국이 안정되고 환경이 개선되고 영양이 좋아진 탓이었는지 자라면서 차츰 진물이 마르고 상처가 아물었다. 얼굴이나 몸의 몇 군데 흉터가 남기는 했지만 한창 시달리던 전날의 상황에 비하면 잊어버리고 살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단 한 곳, 오른쪽 귀의 진물만은 시간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어떤 날은 내내 솜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어야 할 정도로 연신 진물이 흘렀지만, 상태가 더 나빠진다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그러고 지냈다. 함양 시내에 있는 병원에도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입학을 며칠 앞둔 때였다. 마을 학교로 부임 받은 선생님이 만삭의 부인과 함께 우리 집 건너편 집으로 이사를 왔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때가 아닌가. 할머니와 엄마는 때때마다 반찬을 나누며 선생님 일가를 극진히 대접하셨다. 선생님은 나를 퍽 귀여워하셨다. 나의 귀를 안타까워하시며 손수 진물을 닦아주시기도 하셨다. 그러다가 입학 후 어느 날, 교탁에서 무언가를 말씀하시던 선생님이 어느 순간 나를 빤히 쳐다보시더니 내 곁으로 와 나의 공책을 살펴보셨다. 그리고는 공책에 숙제며 전달사항들을 손수 적어주셨다. 그즈음 나는 소리를 놓치기 시작했다. 말썽을 부리던 오른쪽 귀가 기어이 소리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또 나머지 왼쪽 귀가 제 몫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용한 세상이 무뎌져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선생님은 틈틈이 내가 제대로 받아 적었는지 일일이 공책을 확인하시는가 하면, 얌전하고 착실한 짝을 배정해 나의 필기를 돕게 하셨다. 그리고 나의 상태를 부모님께 전하며 하루 빨리 큰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을 것을 권하셨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작은 삼촌과 상의했고, 나는 삼촌의 도움으로 부산에 있던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곳은 전쟁 후 피폐해진 우리나라를 위해 미국에서 건너온 의료봉사단이 있던 곳으로 당시 열악했던 한국의 의료시설에 비해 훨씬 나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수술에서 회복까지 석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할머니의 간호를 받으며 지냈다. 처음 얼마간은 낯선 곳, 낯선 사람들 틈에 겁이 났지만, 퇴원에 즈음해서는 영어 인사말 몇 마디는 나눌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바라던 결과는 얻지 못했다. 수술 후에도 오른쪽 귀의 청력은 회복되지 않았고, 때때로 어긋난 라디오 주파수처럼 잡음이 섞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왼쪽 귀가 정상적으로 제 구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병원에서 옷을 선물 받았다. 새 옷이 아니라 외국에서 보낸 원조물품으로 옅은 살굿빛이 감도는 체크무늬 원피스였다. 나는 그 옷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다가, 몇 번씩 깨어나 만져보고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한껏 들뜬 마음으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요즘은 옷장에 넘쳐나도록 많은 것이 옷이지만 그 때만 해도 티셔츠 한 장, 신발 한 짝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불과 60여 년 전의 일이다. 아직도 그때의 시절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지만 삶에 비해 마음은 그다지 너그러워진 것 같지가 않아 씁쓸하기만 하다.

8. 산파

병원이 드물었고, 산부인과와 같은 전문병원은 더더욱 드물었던 때, 할머니는 마을의 산파였다. 전문적으로 의술을 배운 바도 없었고, 산파의 내력을 이어받은 집안 출신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도맡아 했을 뿐이었다. 때때로 새벽이나 한밤중에 마당에서 누군가가 애타는 목소리로 할머니를 찾았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두 번 부를 것도 없이 방문을 열고 나와 걸음을 재촉하셨다. 마을의 어느 집 처자가 산달에 접어들면 할머니는 내내 잠을 설치셨다. 제삿날을 외는 것만큼 출산 예정일을 외고 계셨다.

당시 새 생명은 모두 할머니의 손을 거쳐 마을에 입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와 내 동생들도 모두 그랬다. 할머니는 며느리의 산파가 되어 일곱 손주를 받아내셨다. 그 중 셋이 죽고 넷이 살아남았다. 첫 손녀가 전쟁 중에 홍역을 앓아 사경을 헤맸고 둘째 손녀는 돌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보냈다. 셋째 손자가 태어나고 떠들썩하니 잔치를 벌였건만, 넷째와 다섯째 손자를 연이어 잃었다. 출산이 거듭될수록 며느리는 수척해졌지만 아이는 계속 들어섰다. 여섯째 손녀를 낳고 며느리는 주저앉아 삼년을 앓았다. 할머니는 삼년동안 며느리의 약을 달이셨다. 어른 살리느라 방치됐던 여섯째 손녀는 제 명에 무럭무럭 자랐다. 며느리 나이 마흔 중반에 아이가 들어섰다. 노산이라 사람들이 모두 출산을 말렸지만, 제 먹을 복 타고난 아들이라는 무당의 말에 엄마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일곱 번째 손자를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산파의 책임을 내려놓으셨다. 허나 일찍 져버린 아들, 며느리를 대신하느라 할머니는 저승길을 오래도록 미루어야만 하셨다. 그러는 동안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손녀들이 죽었다. 생과 멸의 한 가운데 산파였던 나의 할머니가 있었다.

9. 사과

우리 마을은 과일이 귀했다. 과일뿐만이 아니라 모든 물자가 귀했지만 유독 과일이 금만치 귀했다. 벼농사가 주업이었고, 집집마다 마당 한쪽에 자투리땅을 마련해 텃밭을 일구고 고추며, 호박, 가지, 양파 등의 채소를 길렀는데 웬일인지 과일은 없었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내가 먹어본 과일이라고는 일 년에 몇 차례씩 제사상에 오르던 사과와 배, 감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것도 위로부터 차례대로 집안 어른들께 맛보이고 나면, 어린 우리 차례가 되어서는 한 입에 반 조각도 안 되게 돌아오고는 했다. 지금의 품질 좋고 당도 높은 과일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심심한 맛이었지만, 그것조차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야만 겨우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마을의 유일한 과실수로 감나무가 있었지만, 그것도 집집마다 한 그루씩 넉넉하게 갖추고 살지도 못하던 때였다. 가을이면 큰집의 감나무에 제법 실한 감이 영글었지만, 대가족 살림에 큰어머니의 인심이 팍팍해질 수밖에 없었던지, 담을 한데 걸치고 살면서도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맛보라며 한 입 권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퇴근길에 감나무 묘목 두 그루를 얻어 오셨다. 큰집 담장 밑에서 잘 익은 홍시를 올려다보며 입맛만 다시곤 하던 우리들이 안 돼 보였던지 아는 사람을 통해 구해오셨다고 했다. 남동생과 나는 천둥벌거숭이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뻐했다. 아직 어른 키에도 한참 못 미치는 묘목이었지만 우리는 당장 다음 날부터 감을 먹을 수 있게 된 것 마냥 흥분해 들떴었다. 그러나 감나무의 감을 맛보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다. 감나무가 지붕을 내려다볼 정도로 훌쩍 자랐을 때에도 열매는 쉽게 여물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야 그토록 바라던 감이 열렸으나 긴긴 세월동안 우리는 어느 새 훌쩍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내게 어린 시절 과일에 대한 갈증을 원 없이 푸는 것과 동시에 진저리를 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중학교 졸업반이 되어서 2박 3일 일정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경주를 중심으로 그 일대를 여행하는 일정이었는데, 둘째 날이 되어 대구 일대의 과수원을 돌아볼 때였다. 한 반 동무들과 우르르 버스에서 내리니 그곳이 바로 사과밭이었다. 사과나무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나 많은 사과를 한꺼번에 보는 것도 처음이라 한참을 놀래서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 키를 웃도는 사과나무들이 드넓은 과수원에 빼곡하게 서 있었는데, 동글동글한 사과를 소담스럽게 걸고 있는 사과나무는 얼핏 수컷 공작이 꼬리 깃을 활짝 펼치고 자태를 뽐내는 듯, 빛을 받아 반짝이는 붉은 열매들이 너무나도 탐스러웠다. 여행의 첫째 날 경주에 들러 구경했던 곳들은 지금껏 별반 기억나는 것들이 없는데, 이날의 기억만큼은 마치 머릿속에 사진을 심어놓은 듯 오랫동안 선명하게 남아있다.

과수원 입구의 너른 마당에는 볏짚으로 짠 멍석 위에 갓 수확한 사과를 무더기로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그날 나를 포함한 많은 아이들이 얼마간 준비했던 용돈으로 사과를 구입했다. 산지라서 그랬는지, 농장주의 인심이 푸진 덕분이었는지, 여하튼 그곳의 사과 값은 시골 5일장이나 마을을 찾는 행상들이 치는 값보다 훨씬 저렴했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양의 사과를 싼 값에 살 수 있었다. 몇 개는 그 자리에서 동무들과 앉아 실컷 나눠먹고, 나머지는 욕심껏 책가방에 꾹꾹 눌러 담았다. 부모님과 동생들, 할머니, 할아버지도 맛보시게 하고 싶었고, 여행 다녀 온 생색도 낼 겸 마을 친척 어르신들께도 인사차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셈은 자꾸자꾸 늘어나 작은 가방이 불룩하게 터질 만치 사과를 담고 또 담았다.

그날, 과수원 탐방을 마치고 다른 곳은 어디어디를 들렀는지 별반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태어나 처음 본 사과나무만이 육십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값진 기억임에도 틀림없다. 지리산 두메산골에서 나고 자라, 우물 안 개구리마냥 살아온 내게 그 기억은 하늘만큼 넓고 푸르렀던 것이다.

지정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마을로 돌아오기까지 가방에 들었던 사과는 무참히도 혹사를 당했다. 이리저리 메고 다니는 중에도 멍이 들었고, 버스 짐칸에서도 연신 부딪치고 깨졌다. 당시의 도로 사정은 지금과 같이 매끈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자갈투성이의 흙바닥이었는데, 거의 반나절 동안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노라면, 건강한 사람도 멀미를 하느라 곤혹스러운데 하물며 여린 사과는 어떠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도착해서 가방을 열어보니, 사과는 이미 엉망으로 깨져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귀한 사과의 등장에 환호했고, 덕분에 나는 얼마간 어깨가 으쓱하였다. 그리고 가족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덥석 사과를 집어 들고 배불리 먹었다. 개중 덜 상한 것들은 골라내어 마을 집집마다 돌려 나눠먹었다. 곧 있을 폭풍 같은 상황은 까맣게 모른 채 그날 저녁, 마을은 난생 처음으로 사과가 풍년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집을 시작으로 사과를 나눠먹은 온 마을 사람들이 복통을 호소하며 뒷간을 오가느라 밤새 진땀을 빼야했다. 배에서는 연신 천둥치는 소리가 울렸고 화장실과 뒷마당 구석구석에서는 '아이고'를 외치는 가족들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평생에 사과 한 알은 고사하고 반쪽도 온전히 다 먹어본 적이 없던 사람들이 하루저녁에 일 년치 양을 다 먹어버렸으니 위장이 꽤나 놀라 요동칠 만도 했다. 그러나 그 일로 나를 책망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 년 후, 나는 이웃 마을에 시집을 가며 정든 고향집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절을 지내러 임신한 몸으로 고향집을 찾았더니 대청마루 한쪽에 사과와 배가 담긴 소쿠리가 있었다. 집집마다 차례 상에 올렸던 과일을 손도 대지 않은 채 고대로 한데 모아 내 앞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때가 입덧이 막 끝나고 한참 과일이 당길 즈음이었다. 여전히 과일이 귀했던 때고, 명절이나 제사나 되어야 한 입씩 맛보던 귀한 것을 선뜻 내게 양보해주신 분들이 그렇게나 고마울 수가 없었다.

10. 소리2

중학생이 되어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었더니 밤새 베고 잤던 베개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습관처럼 오른쪽 귀를 만져봤지만 진물은 만져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왼쪽 귀를 살폈더니 그간 멀쩡했던 왼쪽 귀에서 난데없이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 눈앞이 아찔하였다. 언젠가 병원에서 한쪽 귀가 말썽을 부리면 나머지 귀도 말썽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반쪽짜리 소리 문마저 서서히 닫혀간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가만히 양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아보았다.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은 희미한 잡음이 짙은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리가 사라진 뒤에 닥쳐올 어둠의 실체가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가족들이 놀라서 달려왔지만 울음소리에 가렸는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부산에 있는 병원을 다시 찾았다. 엄마는 여동생을 낳고 산후풍에 걸려 일 년째 몸져누워 있을 때였다.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간호하고 집안을 건사하느라 나를 따라나설 형편이 못 되었다. 그 때만 해도 반나절이 넘게 걸리던 그 길을 나는 홀로 떠나야 했다. 터덜거리며 버스가 비포장도로를 굴러가면 차창 너머로 먼지 구름이 이는 것이 보였다. 평탄지 못한 도로의 사정으로 사람들은 종종 버스를 세우고 멀미를 했다. 나의 가슴도 울렁거렸으나 멀미 때문이 아니라 의사로부터 전해 듣게 될 나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푸른 하늘이 속절없이 높아만 보였고, 살랑거리는 바람도 나를 비껴가는 것만 같았다. 삐거덕거리는 소리도, 재잘대는 소리도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삼촌을 만나 병원 수속을 밟은 후, 수술날짜를 기다리며 나는 한동안 삼촌의 집에 머물렀다. 의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고질적인 병이었고, 당시의 의술이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병이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상황이지만 막상 결과를 직접 듣고 나니 서러움이 복받쳤다. 도무지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삼촌은 나를 달래며, 결과가 어찌됐든 수술을 해보자고 설득했다. 고향에는 전보로 수술날짜를 통보하고, 입원 후에는 부산에 살고 계시던 할머니의 언니분인 이모할머니가 오시기로 하셨다. 삼촌이 신문사로 출근하고 나면, 낮 동안 텅 빈 집안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도돌이표 같은 생각만을 반복했다. 수술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전처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다보면 정말로 그렇게 살아질 것도 같았다. 여러 번 짐을 꾸렸다가 다시 풀었다. 희망은 뿌리가 깊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삼촌의 서재에 들었다가 다락으로 통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시골집에도 다락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크기도 아니었거니와, 그 쓰임도 이불장에 가까웠으며, 철지난 이불이나 자투리 천을 모아놓은 보자기, 바느질 바구니 등을 넣어두던 곳으로 쓰였을 뿐,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킬만한 것이라곤 없는 곳이었다. 삼촌의 집 다락은 입구부터 흥미로웠다. 책장을 따라 사선으로 놓인 계단이 천장까지 닿아 있었고, 계단의 끝에 콩깍지 모양으로 움푹 파인 손잡이가 있었다. 그 주위로 사방 반폭 너비의 네모난 문이 있었는데, 손바닥을 대고 천장의 문을 밀어 올리면 뚜껑이 열리듯 다락문이 열렸다. 다락은 삼각 지붕 모양으로 경사진 천장에 여럿이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어린 아이라면 거뜬히 서서 걸어 다닐 수 있는 높이로, 작은 창문이 하나 나 있었다. 창문을 통과한 빛이 마치 빨랫줄처럼 길게 다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의 등장으로 해묵은 먼지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는지 요란스럽게 풀풀거렸다. 다락의 독특한 구조로 볼 때, 삼촌이 살던 집은 과거 일본인들이 지은 집이었던 것 같다. 해방 후 조선 땅을 떠나며 채 허물지 못하고 남은 집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나는 삼촌의 배웅을 마치고나면 곧바로 다락에 올라가 하루 종일 그곳에서 지냈다. 그곳에 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하여 국내문학전집, 탐정소설, 위인전에 이르기까지,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시골집에도 책은 있었지만 고작 예닐곱 권에 불과했다. 엄마가 만주에서 보던 책도 있었는데 온통 한자로 되어 있어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농한기인 겨울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마을 젊은이들을 위해 홍길동전이나 유충렬전 같은 소설을 읽어주기도 하셨는데 그 역시 한자였고, 이미 여러 차례 들은 이야기라 물릴 대로 물렸던 참이었다. 삼촌의 다락에 있는 책은 빳빳하게 표지를 입힌, 한글로 쓰인 책이었다. 글자대로 읽히고, 읽은 대로 이해가 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빙점', '여자의 일생', '소나기' 등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 책들이다. 굳이 비밀이랄 것도 없었지만, 나는 삼촌에게 다락을 드나드는 일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촌은 이미 알고 계셨는지 퇴원 후 시골로 내려가는 나에게 책을 몇 권 챙겨주셨다. 그리고 이후로도 명절이나 제사를 지내러 집에 올 때면 다락에서 보았던 책을 잊지 않고 넉넉히 가져다주시곤 하셨다.

이제는 세월 속에 많은 부분이 희미해졌지만, 당시의 나를 견디게 해 준 것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도무지 내일이란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삶이었으나, 못 다 읽은 책의 내용이 궁금해 어서 아침이 오기를 바라곤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는 동안 나를 덮친 절망과 비극의 농도가 차츰 희석되었고,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을 관찰하듯 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도 길러졌던 것 같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청력이 아니더라도 내가 가진 것들이 많다는 것을,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수술 후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른쪽 귀는 여전히 먹먹했고 때때로 진물이 흘렀다. 걱정했던 왼쪽 귀의 진물은 수술 후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씩 잦아들었다. 수술 전보다 청력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조금만 신경 쓴다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수준이었다.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 새 할머니가 중학교 교복을 지어놓았다. 그 때는 돈만 내면 교복을 살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몸져누운 며느리 수발들랴, 힘든 농사일에, 한창 말썽부리던 개구쟁이 손자 돌보랴, 갓 난 손녀를 업고 삼시세끼 머슴들의 밥까지 챙기며, 몸이 열 개더라도, 하루가 곱절이더라도 힘들었을 할머니가, 밤새 호롱불 아래에서 졸음을 몰아가며 손녀의 교복을 지으셨던 것이다. 어떤 마음이라야, 그 어떤 사랑이라야 그럴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다고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것은 아닌 듯 싶다. 이제 내 나이가 그 때의 할머니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지만 아직도 그 마음의 깊이를 헤아리기에 역부족인 듯 싶으니 말이다.

마을의 아침은 언제나 우리 집 아궁이에서 시작했다. 해보다 먼저 일어나 다 저녁이 되어 해를 배웅할 때까지, 할머니의 하루는 잠시잠깐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나는 한 걸음 뒤에서 할머니 곁을 지켰다. 아궁이 앞에서 불씨를 키우고, 텃밭에서 채소를 따와 다듬고, 장독에서 장을 퍼다 날랐다. 세상의 모든 소리 중에 할머니의 소리가 제일 잘 들렸다. 가만히 지켜보면 저절로 할머니의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입이 아니라 온 몸으로 말했다. 이따금씩 할머니는 행주로 솥뚜껑을 훔치시다가 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숙아, 영숙아"

나물을 무치다가도, 텃밭에 김을 매다가도 내 이름을 불렀다. 듬성듬성 이가 빠져 오므려놓은 복주머니 입구마냥 합죽이 같은 입으로 할머니는 연신 나를 찾으셨다. 어떤 날은 할머니가 부르기도 전에 소리가 먼저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 할머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또 할머니는 "숙아, 영숙아"라며 내 이름을 부르셨다.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부름이란 걸 그 땐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소리가 통하는 문을 두드리며 손녀의 안녕을 살피신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시절 꽃이었다. 어느 유명한 시인의 말처럼,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꽃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나도 꽃, 우리는 모두 꽃이 아닐까. 저 들판의 꽃이 바람소리를 알아듣고 나부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11. 인생

어느 누구의 인생에도 운명적인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어느 전능한 신이 설계한 거대한 도면 위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모든 상황이 우연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나 운명 같은 지점들이 있다. 돌아보면 내게도 그런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나의 귓병을 제일 먼저 알아채셨던 선생님께서 나를 위해 짝을 지어준 사내아이는 이후로도 긴 세월동안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내 삶의 곳곳에서 마주쳤다. 사람의 관계마다 운명이 정해놓은 역할이 있는 것인지, 그는 매번 나를 도와주는 은인이 되어주었다.

시골 아이답지 않게 피부가 하얗고 키가 자그마했던 그는 얼핏 보기에 부잣집 도련님 같았다. 또래의 사내아이들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법 없이 얌전히 앉아 책을 읽거나 외따로 나무그늘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만 하곤 했다. 생김새가 곱상해 계집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선생님 덕에 나와 짝이 되는 바람에 한동안 나는 시샘을 받기도 했다. 수업시간마다 제 노트를 펼쳐 필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더러는 직접 적어주기도 해서 나도 은근히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텃골에 산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모두가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텃골은 우리 마을 바로 옆 동네로 한센 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외갓집이 있는 웅평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텃골이었다. 온갖 소문들 때문에 그곳을 지날 때면 나는 늘 누군가의 손을 잡고 뛰곤 했었다. 병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던 때라 정부에서도 그들을 가둬두고 임신도 금했던 시절이었다. 그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학교를 다녀야 했던 아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이가 또래답지 않게 점잖았던 까닭이 짐작이 되었다. 이전과 달라진 건 없었지만 나도 은근히 그가 꺼려졌다. 선생님께 나서서 짝을 바꿔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그냥 몇 달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그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텃골에 학교가 생겨 그곳에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인사도 없이 헤어지고 중학생이 되어서 우연찮게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이었는데 마을 입구의 강물이 불어 마을로 연결된 외나무다리가 떠내려가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강을 건너려는데 몇 발작 가지도 않아서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그대로 건너다가는 물살에 휩쓸릴 것 같아 하는 수없이 물 밖으로 나와 앉아 있는데 저기서 누군가가 줄배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나란히 이웃한 다섯 마을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무로 만든 작은 배를 한 척 준비해 뒀는데, 바로 그 배였다. 물살에 떠내려간 줄로만 알았던 배가 눈앞에 나타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배를 끌고 온 이가 바로 그 아이였다. 나는 한 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이 키가 자라 어른의 태가 났지만 하얀 피부와 곱상한 얼굴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어쩐지 아는 체를 할 수가 없어서 강을 다 건널 때까지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마을 쪽 강가에 닿았을 때 나는 얼른 배에서 내려 집으로 뛰어갔다. 한참을 뛰어가다가 뒤통수에 그의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그때까지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집을 향해서 뛰어갔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 사이 나는 부산에 있는 편물 학원에서 편물 짜는 법을 배워왔다. 나는 엄마를 닮아 어려서부터 바느질을 좋아했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던 엄마는 농사일에는 영 소질이 없었지만 바느질 솜씨는 좋았다. 마을의 재봉틀은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이 유일하였는데, 엄마는 마을 사람들의 옷을 지어주거나 바느질을 대신 해주고 우리 집 농사의 일손을 얻곤 했다. 나는 중학교 가정 시간에 블라우스와 치마 만드는 법을 배운 후로 집에서도 만들곤 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을 졸라 부산에서 편물을 배웠다. 국제시장에서 편물기계를 직접 사서 몇 달을 배운 후에 고향에 내려와 알음알음으로 옷을 만들어 팔았다. 당시에는 그런 옷이 귀했기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어느 날 시장에서 귀의 진물에 바를 약을 구해 나오는데 시장 한 쪽에 짐칸 가득 옷을 실은 트럭이 보였다. 외국에서 보낸 구호물자였다. 너나 할 거 없이 달려드는 사람들 틈에 나도 끼어 옷을 들추고 있는데 어느 틈에 그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이미 포대자루 가득 옷을 담아 지게에 지고 있었다. 텃골로 가는 옷들은 따로 정해진 분량이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텃골 병원에 미국에서 보낸 약이 많으니 언제 한 번 들르라고 말했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얼마 후 나는 직접 텃골을 찾아갔다. 그곳 마을은 상상했던 것과 달리 소담하고 깨끗했다. 마을 입구에 교회와 함께 아담한 병원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의사의 처방으로 진물을 멎게 한다는 하얀 가루약을 받았다. 약의 효능이 좋아 이후로도 나는 주기적으로 텃골을 찾았다. 어느 때부터 그가 마을 입구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러나 마을 깊숙한 곳까지는 들어가 볼 용기가 나질 않아 매번 입구에서 그와 헤어졌다.

그의 소개로 텃골 사람들의 옷을 짓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보낸 옷들은 그들에게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따로 실을 사지 않고 스웨터를 얻어다가 실을 풀어 다시 옷을 만들어주고 공임비를 받았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함양 시내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당시 바로 아래 동생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별안간 면사무소를 그만두신 아버지가 지인과 동업을 하시다가 사기를 당하시는 바람에 졸지에 집안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편물 가게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모두 우체국을 통해 서울에 있는 남동생의 학비로 보냈다. 남은 전답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빚잔치를 하고, 남동생은 대학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나도 가게를 정리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 시집을 가게 되면서 자연히 그와 연락이 끊겼다.

지금도 종종 성당 사람들과 산청에 있는 한센인 마을로 봉사활동을 간다. 봉사라고 해봐야 함께 미사를 보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처음 본 사람들은 겁을 먹고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때의 경험 덕분인지 그들이 그리 낯설지가 않다. 나의 귀가 반쪽이나마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들 덕분이 아니었던가. 어린 시절 홍역을 앓아 온 몸에 진물이 나는 것을 보고 누군가 내게도 괴물이라고 했었다. 아파 본 자만이 아픈 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일평생 귓병이 달가웠던 적은 없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거라면 그걸로 됐다.

12. 부부

가을걷이를 끝내고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돌던 때, 집으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작달만한 키에 꼬장꼬장하게 생긴 아주머니와 한 분과 까무잡잡한 피부의 아저씨 한 분이었다. 그들은 마루에 앉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시며 내가 지나갈 때마다 곁눈질을 하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며칠 뒤, 전날에 왔던 그 아주머니가 체구 좋은 사내와 함께 다시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사내는 크고 쌍꺼풀이 짙은 눈매로 키는 작았으나 체구가 좋아보였다. 할머니와 엄마는 내게 그 사내가 어떠냐고 물으셨다. 선해 보이는 인상에, 특히 눈이 예뻐서 나도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고 그 해 초겨울에 혼례를 치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가난했다. 그는 가진 것이 없어 뭐든지 남들보다 두 배로 노력했다고 했다. 남들이 나무 한 짐을 할 때 그는 두 세 번씩 산을 탔다. 체력이 좋아 힘 꽤나 쓰는 이들이 어울리자는 유혹도 많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운동을 배웠다. 월사금이 없어 학교는 못 가고 대신 태권도를 배워 아이들을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혼례를 치르고도 얼마동안 나는 남편의 직업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 내가 살던 마을에는 운동을 하는 이도, 특히 태권도를 하는 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강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인정이 많아 눈물도 잘 흘렸다. 부지런했지만 돈을 벌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잘 퍼주고 잘 베푸는 사람이었다. 부부가 모두 가난을 지고 살 수가 없어 시집 온 첫 날부터 한복 바느질을 배우러 다녔다. 당시에는 외출복이 모두 한복일 때라 그 일이 벌이가 괜찮아 보였다. 첫 아들을 낳고 석 돈짜리 결혼반지를 팔아 재봉틀을 사서 1년 365일 재봉틀을 돌렸다. 시동생이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체육관을 정리해야 했던 남편은 친정 식구의 도움으로 마산에 있는 섬유 공장 소방요원으로 취직했다. 부부가 따로 떨어져 살 수가 없어 나는 남편을 따라 마산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요긴하게 쓰라며 스테인리스로 된 김장 대야를 사 주셨다. 포목점 근처에 방을 구하기 위해 생선 비린내 진동하는 어시장 골목에 단칸방을 마련하고 손바닥만 한 널빤지에 한복이라고 써서 대문에 걸어놓고 손님을 받았다. 저녁 장사 끝내고 떠나는 장사치들에게 헐값에 생선을 구입해 밥을 지어먹으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 이십 년 만에 이층 양옥집을 마련하였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낫기 위해 서울에 있는 큰 병원까지 찾아갔지만 손 쓸 도리가 없다는 말에 눈이 짓물러서 돌아오셨다. 고향집에서 장례를 치르며 아버지는 내내 술을 드시다가 어느 순간 병풍 뒤에 누운 엄마를 끌어안고 주무셨다. 나는 울다 지쳐 몇 번씩 기절하였다. 남편은 나를 업고 수차례 시내의 응급실로 달려갔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2층 창가에 서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어머니로 보였다. 그런 나를 위해 남편은 전국의 유명한 한의원을 돌며 약을 지어 먹였다. 그 덕에 내가 지금껏 살아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남편을 처음 만난 날 내가 본 그 예쁜 눈이 나를 살리는 눈이었나 보다.

아버지, 어머니는 원앙 같은 부부였다. 집안 어른들의 결정으로 맺은 인연이었지만 금슬이 남달랐다. 어머니는 입이 짧은 아버지를 위해 매끼 반찬에 유별나게 신경을 쓰셨다. 밥상에서도 내내 아버지의 입으로 들어가는 숟가락만 바라보시느라 정작 본인의 밥은 뒷전이셨다. 아버지가 마루에 나오시면 금세 달려와 앉을 자리에 먼지부터 훔쳐내셨다. 할머니는 아들 위하는 며느리의 정성이 너무 지나치다고 야단이셨다.

어머니의 상여가 나가는 날, 친척 어르신들이 아버지의 신발을 집 바깥으로 향하게 돌리셨다. 곧바로 어머니를 따라 가시라는 뜻이라고 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그저 눈물만 흘렀다. 할머니는 며느리에 이어 아들까지 먼저 보내는 독한 팔자는 피하고 싶었으나 열 살 남짓밖에 안 된 막내 손주가 눈에 밟혀 홀로 가시밭길을 걸으셨다. 아버지는 매일 눈만 뜨면 어머니 산소에 가서 술을 드시다가 곁에서 주무셨다. 해질 무렵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지나가다 발견하고는 집에 일어주면 동생이 무덤에 올라가 아버지를 업고 내려왔다. 그러기를 1년쯤 반복하시다가 기필코 아버지는 어머니 곁에 자리를 마련하고 잠드셨다.

13. 결

그동안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여동생을 제외한 동생들도 먼저 길을 떠났다. 이제 나는,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보다도 나이가 많이 들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어렵게 마련한 집도 사라지고, 연이은 아들의 사업 실패로 평평할 줄로만 알았던 노후에 굽은 허리를 두드려가며 도서관 청소 일을 시작했다. 인생의 풍상은 늘 거친 길로 나를 인도하지만, 나는 나의 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그저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 부모란 모름지기 자식들 곁에 오랫동안 비빌 언덕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의 실패로 아직도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못내 송구스럽다며 우리 내외 앞에서 고개도 못 드는 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얼마 전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간 길에 고향 마을에 들렀더니 대궐 같았던 우리 집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낡고 쪼그라든 오막살이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기억이 자꾸만 추억을 넓히는 것인지 다시 보면 반갑던 것들에 실망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옛날이야기만 하며 살게 된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는 때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다가 앞길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까봐 덜컥 겁이 날 때도 있다. 세상은 껑충껑충 뛰어가고 훨훨 날아도 다니는데, 그 속도를 못 맞추는 나는 점점 세상과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이제 몇 걸음이나 남았는지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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