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석의 월남전선 맹호부대…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곽상석

입력 2017-10-10 10:35:13

(사진1) 추억록 표지
(사진1) 추억록 표지
(사진2)추억록 목차
(사진2)추억록 목차
(사진3) 월남파병경로
(사진3) 월남파병경로
(사진4) 매복작전모습
(사진4) 매복작전모습

곽상석(성명, 이하 상석으로 표기)은 육군본부에서 파월특명을 받고 1968년 2월 16일 육군본부 통신 운용대대를 떠나 42일만에 월남 맹호 8006부대 수색중대 배치를 받았다.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26연대에서 파월전투교육(유격훈련)을 4주간 받고 태평양건너 월남에 도착한 것이였다. 13개월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한 곳. 바로 '월남전선'이였다.

상석은 월남전선의 경험과 생활을 '추억록(사진1참조)'으로 글을 남겼다. 파월특명을 받고 귀국할 때 까지의 일기 형식이다. 추억록은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약 240페이지의 '장편월남추억록'이라 표현할 수 있다.

파월특명을 받고 고뇌에 빠진 심경을 적은 글, 전투를 앞두고 적은 글, 전투를 마치고 무사귀환 후 적은 글, 고국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월남현지사진, 월남자연모습 등을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감성을 담아 적어보았다.

추억록은 총240페이지(사진2참조)로 구성되고 36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꼭지로 1장(맹호부대歌), 2장(긴급출동작전), 13장(킬러계곡 작전 수기), 15장(매복 수기), 17장(급수장 대홍수), 22장(이국야몽), 23장(그리운 고국 우리 마을), 24장(九死一生), 25장(내가 탄 헬리콥터), 30장(월남추석), 34장(맹호전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편내용을 읽기 편하게 재구성하여 월남전선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본다.

(1절) 파월특명을 받고 월남전선에 투입까지

●별안간 파월특명을 받은 곽상석은?

1968년 2월 14일 오전11시경, 육군본부 통신운용대대 유선중대 1내무반에 근무하고 있던 상석이는 마음에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파월특명이 내려왔다. 우리 소대에서 파월특명이 내려온 사람은 단 2명, 나와 한관흠일병이였다. 이등병 계급장 달고 파월특명을 받고 보니 정말 어안이벙벙하였다. 쓸데없이 나이만 많이 먹었지만 군입대를 늦게 했기에 군대일은 어린애와 같았다. 그래도 잘 했으나 못 했으나 45일간 육군본부에 근무하면서 선배들에게 설움도 받기도 하고 기쁨도 받아가면서 희노애락을 경험하고 있었다. 한 식구같이 한 내무반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별안간 월남전선 마당으로 갈려니 별별 생각이 앞섰다.

상석이는 천지가 캄캄해왔다.

월남전선으로 가면 불행하게 될 수도 있음이 자꾸만 밀려왔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작게나마 성공해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한데 파월특명 웬일인가 싶었다. 첫째는 불행하게 되는 내 자신이 제일 불쌍하였고, 서산락일 같은 우리 모친의 남은 여생에 지극정성 효성을 더 못하고 월남전선으로 가야하는 것은 웬말인가 싶었다.

이러한 마음의 흔들림도 한 순간일 뿐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출국장병교육장(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이하 오음리로 표기) 신고일자가 2월 16일이였다.

하지만 상석은 월남전선으로 얼마나 가기 싫었던지 선임하사(중사 정수원)를 찾아가서 답답한 심경을 이야기 하고, 소대장(중위 권정만)을 찾아가서 파월불희망에 대하여 애걸복걸 해보았다. 그 이후 중대장(대위 이성호)을 찾아가서 "나는 죽어도 월남전선에는 못가겠습니다. 안가도록 좀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파월명령이 난 것은 돌이킬 수 없다는 이야기뿐이였다. 상석은 슬펐지만 이 또한 어떡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상석은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맹세를 하였지. "국가에 바친 몸 제대로 바치고 싶어졌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남쪽나라 불붙는 월남전선에 가기로 마음으로 결심을 했다." 이렇게 굳은 마음을 먹고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져왔다.

●마지막으로 고향마을에 꼭 다녀오고 싶었던 상석은?

이왕 파월하기로 한 이상 고향에 계시는 부모형제 얼굴이나 한번 더 보고 가야지 하는 마음이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출국장병교육장(오음리)에 입소해야 하는 시간은 2일 밖에 남지 않았다. 지극히 짧은 시간으로 분초를 다투는 시간이였지만, 꼭 고향마을에 다녀오고 싶었다. 상석의 고향은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이였다. 강원도에서 대구까지 700리를 총알같이 다녀와야지만 입소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선임하사에게 보고하고 대대위병소를 거쳐 정문 밖을 나온 시각은 2월 14일 오후5시50분경. 어두침침한 거리를 돌고돌아 서울 용산역에서 저녁8시20분 군용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등병인 나는 군용열차안에서 앉을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밤새도록 서서 올 수 밖에 없었다. 영등포역, 수원역, 대전역을 지나서 김천땅으로 들어서니 "우리 고향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왜관역, 신동역, 지천역을 지나서 대구역에 도착하였다. 이때 시각은 새벽 4시30분. 대구 시내를 빠져나와 시골길을 걷고 걸어 오후 3시경에 고향집에 도착하여 꿈에도 그리던 부모형제와 상봉할 수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눈을 부릅뜨고 참고 참았다.

출국장병교육장(오음리)에서 진행되는 신고시간(2월16일)에 맞출려면 왜관역에서 출발하는 저녁8시 기차를 타야했다. 그렬러면 고향집에서는 저녁6시이전에는 출발을 하여야 했다. 그렇게 밤새도록 잠못자면서 고향집에 왔지만 불과 2시간만에 또다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그 마음은 말로써 형언할 수 없다. 상석은 "월남전에 파병되어 간다." 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끝까지 말을 못하고 형제에게만 이야기를 전하고 길을 떠났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가슴이 저려왔다.

고향집에서 왜관역까지 가는 길은 고향동네 집안 형님이 자전거로 태워주었다. 자전거 뒤에 타고 가는 상석은 손수건이 다 젖을 정도로 눈물 밖에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형님이 내가 우는 것을 눈치챌까봐 숨을 죽이고 속눈물로 울었다.

●내무반 부대원들과 작별, 교육장 입소, 월남전선로 향하는 상석은?

상석은 전소대원과 작별 인사를 하고 파월환송을 받으면서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로 향했다. 2월 16일 오전8시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오후4시경에 오음리에 도착하였다. 강원도 화천에서 북풍한설과 함께 맹훈련을 받은 상석은 큰 마음을 먹었다. 나랏일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나라에도 기여하고 나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을려면 나 자신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것이였다. 전투력을 강화해야지만 월남전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 곳 훈련장에서 힘들지만 철저한 훈련을 받고 몸에 익히는 것이다. 이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석은 교육장에서 1대대 3중대로 배치받고 7보충단장(대령 박완식)에게 신고하고 교육을 시작하였다.

3주간의 훈련을 마친 것은 3월8일이였다. 그 이후 출국준비를 통하여 3월15일에는 멀고먼 월남파병을 위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강원도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목마다 환송나온 가족들과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는 동대구역 도착하는 시간을 계산하여 부모형제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만남의 시간도 부족하고 만남 후 헤어짐의 슬픔이 더 컷기에 별도로 알리지 않았다. 동대구역에 기차가 도착하였지만 나는 멀뚱멀뚱 밖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고향의 부모형제를 그리는 마음을 기차 안에서 편지로 적었다. 그 편지와 20원(우표값)을 동대구역의 젊은 청년에게 주면서 잘 부쳐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순간 상석은 월남전선으로 떠나는 심경, 큰 마음을 먹고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해보자.라고 맹세에 맹세를 하였다. 부산에 도착한 상석은 월남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고 월남전선으로 향했다.

(2절) 긴급출동작전_평생 처음 긴급출동 작전에 투입되다

1968년 7월 17일 11시30분경 갑자기 걸린 비상으로 '긴급출동작전'에 임하게 된다. 상석이도 출전하여 길이 남을 추억을 만들었다. 그 추억은?

7월 17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명랑한 기분으로 소대점호를 취하고 막사주변을 청소하고 아침밥을 달게 먹었다. 소대장의 지시로 매복교육을 받으러 교육장으로 나갔다. 현명한 소대장(임상호.중위) 지시 아래 우리 소대원은 교육을 잘 받았다. 나도 두눈을 똑바로 뜨고 모르는 것은 자주 질문을 하면서 몇 시간 동안 재미있게 소대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월남전선에서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였는지 교육은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매복교육을 마치고 사격장에서 급속사견훈력 후 막사로 돌아와 땀범벅이 된 상의를 벗고 휴식시간으로 들어가는 찰나, 1소대 비상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별안간 "1소대는 완전군장하여 2분내로 출동하라."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옛날 암행어사가 출도한다. 라는 말은 '새발에 피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석이는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메어 못쓴다."라는 속담을 되새기며 급한 일일수록 너무 당황하지 않고 순서대로 일을 해야 함을 명심하였다. 침착한 순서로 M-16소총, 철모, 식량3끼분, 탄띠, 수류탄4발, 연막탄1발, 조명지뢰1개, M-16 탄알 460발, 크레모아 1개, M-72 로포탄 1개, 신호로프1뭉치, 물통2개 등을 챙겨서 완전무장했다.

남들보다 빨리 연병장에 집합하여 소대장의 작전시시를 들으니 4km 전방에 우리 맹호 6중대가 베트콩 60여명에게 포위되어 묵사발이 되고 있으니 우리 1소대가 현장으로 투입되는 것이였다.

우리 수색중대는 연병장에 내려앉은 헬리곱터에 타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적과 싸우다가 금세 죽을지언정 헬리곱터에 몸을 실은 이 순간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였다. 그것도 순간일뿐 헬리곱터는 순식간에 적진에 도착하여 비행기는 첩첩산중을 한 바뀌 돌더니 적당한 자리를 찾아 착륙하였다. 손살같이 헬리곱터에 내려 엄페은페하여 적을 관찰하기 시작한 우리들은 소대장의 작전지시에 눈과 귀를 쫑긋 하였다.

작전에서는 10명의 베트콩을 잡는 것보다 우리 우군에게 조그만한 피해라도 없게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전방에는 날카로운 가시덤불과 정글이 판을 치고 있고, 적진을 향한 정찰기와 제트기의 화력폭격으로 온천지는 연기로 뒤덮혔다. 그 와중에 우리 수색중대는 산밑계곡으로 내려와서 긴 하룻밤을 매복하게 되었다. 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의 고통이란 글로써 표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낮부터 목이 말라 갈증고통이 심하였지만 앞에서는 빨리 달려가고, 뒤에서는 자꾸만 밀려오니 주변의 가시덩굴 등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긴긴밤을 지세우고 동이 훤하게 틀 때 상쾌한 기분도 있었으나 얼마나 물을 굶었는지 모든 생각은 물밖에 없었다. 날이 훤하게 밝고 나서는 소대장의 지시로 경계병 몇 명 데리고 가까운 냇가로 가서 수통에 물을 담아왔다. 물약을 타서 30분 후에 먹으니 그 물맛은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이였다.

그 순간 전방 멀리에서 괴상한 사람 4명이 우리들을 향해 올라오기에 우리 2분대 전원이 단독 무장하여 달려가서 갖은 수단으로 포로를 잡았다. 포로를 수색 후 우리들은 6중대로 인계하고 작전수행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렇게 작전수행을 잘 마무리한 후 우리들은 헬리곱터로 수색중대 OP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번 작전 초기에는 베트콩의 침입으로 거창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우리 우군의 화력과 무기가 워낙 뛰어났고 우리 수색중대의 철저한 경계와 작전수행으로 무사히 작전수행을 마칠 수 있었다. 작전수행 후 휴식의 시간은 달콤함을 넘어 지상낙원이였다.

(3절) 혜산진 3호 작전

_ 킬러계곡 60일 작전을 앞두고 상석의 일편단심

1968년 7월 29일 밤 9시30분경, 내일(7월 30일)의 킬러계곡 60일 작전을 앞두고 상석이는 심경을 적어본다. 그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킬러계곡 60일 작전에 우리 수색중대 전병력이 총출전한다는 말은 며칠 전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소대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중대에서 서북쪽으로 약 32km 전방의 베트콩 소굴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과거 프랑스군 3개사단이 월맹정규군에게 묵사발된 곳이 여기였기에 우리 수색중대원들은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였다.

오늘 이 글은 만발의 준비를 해놓고 군장검열이 끝난 뒤 그동안 정든 2분대 막사에서 잠들기 전에 적는 글이다. 눈물이 스쳐지나가는 글이다. 킬러계곡 60일 작전을 무사히 잘 수행하기를 먼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글을 적어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일이면 출동하게 되는데 생각할수록 한심한 일이기도 하였다. 물론 소대장과 분대장에게 전투교육은 착실히 받아온 나였지만, 이번에 출동하여 장기작전 중에 행여나 어찌될까 고민이 많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기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월남 천지가 둘러꺼져도 내가 살아나야지야만 한다. 그리하여 명춘에 꽃피고 잎이 만발할 적에 그리운 고향땅으로 환국하여 부모형제 손잡고 상봉하지 않을 것인가? 파월 5개월에 접어들면서 여러 전우들과도 낮이 익을대로 익어 수륙만리 이국전선에서는 전우들이야말로 고향의 부모형제보다 못할 바는 없다. 하지만 한핏줄 혈육인 가족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이렇게 불안할 적에는 가족이 더욱더 그리워졌다.

내가 만일 불행하게 된다면 첩첩이 쌓인 말들을 누구 앞에다 할까?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내가 비록 나이 많아 군에 입대했지만 남날적에 나도 났고 남과 같이 이목이 생소한데 남이 살면 나도 살아나겠지.

씩씩하고 용감한 사나운 맹호 용사의 한 사람인 상석. 현철한 소대장에게 어렵고 어려운 전투교육 잘 받았고 분대장에게도 여러 가지를 잘 배운 상석. 더욱이 내가 마음을 크게 다잡으니 적을 못만나서 원한이지 내가 잘못될 염려는 추호도 없었다.

"천리, 만리 밖에 계시는 우리조상할아버지이시여! 월남천지신명이시여! 외로운 상석이를 길이길이 도와주시기를 두손모아 축원합니다. 그래야만 허리 못펴고 있는 외로운 우리집을 앞으로 이 몸이 분골쇄신 되는 한이 있더라도 서산락일과 같으신 우리 어머니의 남은 여생 작은 효성이라도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구나. 외로운 우리 형제의 안락한 가정 생활에 힘을 보태어 험악한 인생행로에 값어치 있는 생활을 해보고 싶구나." 라고 상석은 하늘과 땅을 보고 무수히 기도하였다. 더욱이 "이번 작전에 출동하는 주월한국군은 누구나 다 무사히 이기고 돌아오기를 두손모아 천지신명님께 비옵니다." 라고 되새겼다.

저녁 9시30분경 글을 다쓴 상석이는 내무반 밖에 나가서 노래 한 소절을 불러보았다. 그 노래는 무엇일까?

[노래가사]

*전우야 굳세게 싸워이기자

*이국에 바친 마음 설어워말고

*고향이 그리울땐 하늘을 보고

*사랑이 그리울땐 편지를 쓰자

*먼 하늘 짱글에서 향수에 웃자

(4절) 위문공연 장병 콩쿨대회에서 노래 한 곡조

월남전선에서 전투작전과 매복작전 등을 통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든 경우가 많다. 그 와중에 장병들에게 오아시스가 찾아오기도 한다. 바로 고국에서 찾아온 위문공문이다. 위문공연 시에 우리 소대원, 중대원들은 마음껏 끼를 발산하여 그동안 쌓인 마음고생을 내려놓곤 한다.

상석은 위문공연과 더불어 장병들의 콩쿨대회가 열릴 때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것을 즐겼다. 상석은 남들보다 노래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였지만 적극적으로 무대로 올라가 월남전선의 고뇌와 고통스러운 환경을 긍정적으로 즐겼다.

몸과 마음이 지친 동료들에게 웃음을 전달하여 피로를 풀 수 있다면 내 한 몸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대 위에서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맹호부대가' 등을 한 곡조 했었다. 마이크를 잡고 한 곡조를 부르는 모습(사진6참조)이 멋있지 않는가?

(5절) 킬러계곡 작전 중에 겪은 전투추억

킬러계곡 60일 작전 지역에 출동한 상석은 역사에 길이 남을 추억이 되었기에 작전 중에 겪은 일을 기록해본다.

1968년 7월 30일 오전 9시. 우리 수색중대 전병력은 킬러계곡 60일 장기작전에 총출동하였다. 오전에 완전무장하여 기다렸더니 헬리곱터가 날아와 우리들의 몸을 실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헬리곱터를 탈 때마다 밖을 내다보면 기분이 참 좋았는데 오늘은 완전무장이 이렇게도 무겁게 느껴지고 사방이 꽉 막힌 헬리곱터를 탓기 때문에 그렇게 상쾌한 기분은 아니였다. 우리가 탄 헬리콥터는 사방이 꽉 막혔지만 중간에 동그란 문이 몇 개 있어 밖을 내다볼 수는 있었지만 워낙 무거운 완전군장과 긴장감에 주변 경치를 즐길 겨를이 없었다.

완전군장의 짐은 M-16소총, 철모, 식량 5끼분, M-72로포탄 1발, M-16탄알 280발, 야전삽 1개, 부비추렙 제거하는 쇠뭉치 1개, 야전연료 9개, 압박붕대 1개, 물수통 2개, 크레모아 1발, 연막탄 1발 등으로 온몸을 뒤감고 있었다.

20분 정도 하늘을 날아 어느 첩첩산중에서 비~잉 한 바뀌 돌던 헬리곱터는 수목정글 속으로 내려앉았다. 하늘에서 바라본 산중턱에는 여기저기 총성이 들리고, 무서운 불길연기가 뒤덥혀 있고, 산능성에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개미떼처럼 모여 있는데 사격과 엄폐은폐가 난무하는 모습으로 야단법석이였다. 그때 소대장 왈 "이 곳이 과거 프랑스군 3개 사단이 월맹군에게 녹아떨어진 곳이다." "지금부터 원한의 베트콩 소굴에 들었으니 처음부터 너무 당황하지말고 침착성을 가지고 목숨을 걸어놓고 전진태세를 갖추어야 된다." 라고 강조하였다.

상석이는 아래를 내려다보니 벌써 우리 우군쪽에서 정찰기와 제트기가 와서 적의 기지에 폭격을 얼마나 했던지 폭격연기가 온천지를 뒤덮을 지경이였다. 그 순간 상석이는 마음을 더 크게 먹었다. 이때 헬리곱터는 점점 땅으로 가깝게 내려앉았다. 칼날같은 가시덩굴과 정글로 앞이 안보일 정도였다. 머리 위에서는 불덩이같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이고, 날카로운 풀잎과 정글가시는 살갖을 기리고 찔러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순간 무기를 만지다가 손가락 한 부분이 찍혀 피가 몹시 났지만 그것을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두 시간 정도 수풀 속에서 경계하다가 소대장의 지시로 산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빽빽하게 우거진 수목을 헤치고 올라간 우리들은 목이 타들어갔다. 물이 바닥난지는 오래되었기에 목마름은 참고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순간만은 목마름을 해결해줄 물만이 나의 구세주가 되어줄 수 있는 상황이였다. 이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였다.

구슬같은 땀방울은 온몸을 뒤덮었고 바지 엉덩이 부분은 소나기가 내려 집처마에서 물떨어지듯 땀방울이 쉼없이 흐르고 있었다. 상하 군복은 마치 흙탕물 속에 빠졌다가 기어 나온 듯 하였다.

그 와중에 곳곳에서 헬리곱터는 지원물자를 실어날으고 있었다. 군량미, C레이숀, K레이숀, 폭발물, 군수물자 등 끝이 없는 물자가 공급되었다. 우리들 생각에는 급수운반이 더 급하였지만 작전상 군수물자 및 보급물자가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보면 당연한 것이였다.

우리들은 소대장의 지시로 각 분대별로 산능성을 따라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개인호를 파기 시작했다. 밤에 잠 잘 자리를 만들고 천막을 쳤다. 경계를 하면서 밀림의 정글가시를 헤처가면서 작업을 하였지만 목이 타들어가고 온몸에서 힘이 빠쳐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월남와서 물의 소중함을 너무나도 강하게 경험하였다. 목이 마른 나머지, 낮에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날 저녁도 다음날 아침까지 물을 굶었더니 온 전신은 빙빙 돌면서 금세 쓰러질 것만 같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물 한 방울의 절실함이였다.

그렇게 고생에 고생을 한 끝에 헬리곱터 1대에 물을 가득 실고 우리들에게로 날아왔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물을 펑펑 마시고 싶었지만 계급이 쫄병이니 순서를 참고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배분받은 물은 넉넉할 수가 없었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물을 구한 상석이는 너무나도 물이 고파서 주변의 다른 소대원이 넉넉하게 물을 가지고 이동하는것을 보고 그 병사에게 달려가서 애걸복걸 하였다.

나의 목마름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공손히 말했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말은 "월남전선에서 남에게 귀중한 물을 어디 함부로 달라고 야단이야. 물 좀 달라고 하지말고 내 피를 빨아먹어라." 라고 하는 것을 들은 상석이는 목마름이 극에 달하여 진심으로 애걸복걸하였다. 그 결과 그 병사도 나의 진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는지 물 한 통을 기꺼이 허락해 주는 것이였다. 상석이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펄쩍 뛰고도 남았다.

그렇게 구한 물통에 입을 갖다댄 나는 벌컥벌컥 마시다가 순간 동료 김응구병장이 떠올랐다. 나의 목마름도 중요하지만 김병장의 목마름을 지켜본 나는 감히 다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긴 물을 김병장에게 전달하니 그 상황은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김병장은 물론 나도 물이 해결되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물고생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하였지만 그 이후 물 공급이 넉넉하게 되어 우리 소대원들은 작전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2박3일째 되던 날 8월1일 아침먹은 이후부터는 야간작적 수행을 위하여 주간에 취침의 시간이 주어졌다. 머리 위로 포탄소리가 난무하였지만 긴 작전의 완벽한 수행을 위하여 불안감과 고통스러움은 묻어두고 오랜만에 주어진 주간 취침의 달콤함으로 빠져본다.

(6절) 월남통신 _ 불붙는 월남전선에서 편지 한통

멀고먼 이억만리! 푸른 바닷가에서 야자수 무성하고 낭만어린 월남땅! 그러나 낭만을 느끼기 전에 몇 배의 전율을 느껴야 하는 우리들. 오늘도 정글을 누비는 우리 국군 용사들은 이 곳에서 평화의 얼을 심어주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고국에 계시는 분들게 편지 한통을 올린다.(이 편지는 월남전선에서 동료가 고국에 계신 많은 분들게 보낸 편지를 인용한 내용이다.)

[제목 : 고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고국에 계신 파월가족 여러분!

자랑스러운 아들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억만리 전쟁터에 두고 오늘도 얼마나 걱정을 하시는지요. 오랜 세월을 두고 피비린내나는 인류의 비극이 계속되어온 월남전쟁. 지난번 구정을 전후해서 한층 악화된 월남소식을 듣고 고국에 계시는 가족이나 친화 여러분께서는 주야로 너무나도 걱정을 하실 것 같습니다.

저는 현지에서 모든 것을 겪고 있는 일개병사이지만 멀리 고국에서 끊임없이 염려하고 궁금해 하시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마음으로 부족한 글을 올립니다.

저는 1967년에 조용히 저물어가는 12월에 온 국민의 감격어린 환송 하에 고국을 떠나와서 지금은 모부대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싸우는 영예로운 십자군의 한사람입니다.

오랫동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월남땅에 평화의 씨를 심어주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파월을 스스로 지원하고 사실을 알렸을 때에는 부모님을 비롯하여 모두가 깜짝 놀라 의아해 하고 만류하였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남아로 태어나서 대의를 위한 그 보람을 이해하였을 때에는 부모님도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었습니다.

지금도 대한의 용사들훨씬 우수한 장비를 가지고 은 따뜻한 전우애로서 끊임없이 갈고닦은 용맹성과 우수한 전투력으로 백전백승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세계의 최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파월가족 여러분!

오늘도 정글을 누비는 늠름한 당신의 아들들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운가요? 심지어 미군들까지도 그들 옆에 한국군만 있으면 안심을 한다는 말을 실제로 듣고 있습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주민들을 돕는 국군용사들을 볼때마다 모든 주민들이 엄지손가락을 꼽으며 '따이한, 넘버원'이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대한의 남아로 태어나 우방을 도울 수 있다는 마음이 가슴으로 벅차오르며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고객에 계시는 파월가족 여러분!

꿈에도 못잊을 대한민국 고국에 함께 있으면 왈칵 껴안고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떄로는 혹시나 하는 걱정과 염려를 하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고국에 계시는 많은 분들게 당부드립니다.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며 내조국을 빛내고 있는 자랑스러운 당신의 장한 아들들, 당신 장한 애인의 무훈장구를 위해 뜨거운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러할때 당신의 아들과 애인은 비로서 안정된 마음으로 용기백배하여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흐른 뒤 개선장군의 자랑스런 몸이 되어 돌아가는 날, 그들은 여러분의 자랑스런 아들과 애인이 될 것 입니다.

여러분, 너무 걱정과 염려를 하지 마시고 더욱 뜨거운 성원을 보내어 개선하고 돌아오는 그 날 감격어린 재회의 순간을 기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글 이만 끝내겠습니다. 푸르름으로 우거진 초여름에 고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의 가정에 더욱 행운이 깃들기를 멀리서 빕니다.

1968년 10월 5일

(7절) 추도문 _ 고 이영순병장에게 맹호 26연대 11중대장

(동료전우가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 슬픔이야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중대장인 김연식 대위가 고 이영순병장에게 보내는 편진 한통을 소개한다.)

이병장, 유명을 달리한 너에게 중대장이 경건히 머리숙여 삼가 명복을 빈다. 사나이 대장부 응지를 품고 이억만리 월남의 정글 속에서 산화한 이 병장의 피의 댓가는 고귀함 그 이상이구나. 이제 전우들의 가슴에 사묻혀 온갖 시련을 인내하고 이겨가면서 너에게 수류탄을 던진 적을 잡고 9명의 베트콩과 소총 6정, 수류탄 30발, 암호문서 등을 노획하였다.

격전이 끝난 지금, 티없이 밝은 너의 눈동자와 선한 얼굴이 내 눈앞에 선하구나. 이병장, 오늘도 이곳 너의 전우들과 중대장은 지금도 여전히 매복을 하고 있다. (중략)

이병장, 네가 속세에서 떠나가든 날, 그 날은 우리 중대원 모두가 너와 생활을 달리하는 날이 되었구나. 지금도 너의 전우들인 대한의 용사들은 따뜻한 전우애로써 강철같이 뭉쳐 백전백승을 거듭하고 있으니 기쁘해다오.

이병장, 내가 월남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동작동으로 찾아가겠노라. 그래서 싫도록 한번 울어보자구나.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구나.

(8절) 고향을 그리는 마음

(상석은 월남전선에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둘 겨를도 없이 용맹으로 임하고 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늦은 밤 하늘을 쳐다보면서 고향마을을 그리고,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를 그리곤 하였다. 고향과 부모형제를 그리면서 몇 자 남겨본다.)

[제목 : 망향]

고국을 그리는 병사의 마음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처음에는 파월하여 아무런

그리움도 생각나는 것도 미처 몰랐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조국이 그리운 것은 뼈속 깊이 느껴진다

비단 나뿐이 아니라

고국을 떠나 외국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그럴 것이다

더욱이 해가 지고 별들이 뜨고 초생달이 떠오를때는

마음과 생각은

고국의 하늘아래 가있다

(9절) 異國에서 詩 하나를 적으며

(상석은 월남전선의 피비린내나는 전투생활에서 버티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다름아닌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가 아닐까 싶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달을 보면서 이국에서 시 한수를 적어본다.)

[제목 : 무제]

한 많은 이 世上에 할 일도 너무 많다

대장부 한 平生에 무엇을 먼저 할고

세월은 유수같고 시절이 하수상하니

千萬事일들중에 요점되는 그 일이

智仁勇 겸하면은 대장부할일 다하느니라

1969년 7월4일 상석 書

(10절) 급수장 파견근무 시 _ 구사일생

1968년 12월 22일 밤에 당한 일로써 너무나도 놀라고 당황했던 것을 이야기해본다.

수색중대 1소대 2분대인 우리들은 급수장으로 파견나온지도 벌써 124일이 되었다. 그동안 태평세월 같은 날짜도 얼마동안 보냈고 가슴이 조마조마한 치열한 전투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본 일도 있었다. 참으로 월남전선에서 희노애락 시간을 많이 보냈다.

지나간 11월11일 밤에 베트콩의 습격을 받아서 난리가 일어난 이후부터는 더욱더 사주경계에 관심을 두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근무에 초집중하고 있다.

10월19일 밤에 큰 물난리 만난 이후부터는 급수장 도로 위에 자리잡고 있는 월남 민병대원들의 연병장에 천막을 치고 24일 동안 있었다. 그동안 철주망 작업도 하고, 취침호와 개인호를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지었다. 그래서 24일만인 11월 12일 새로지은 취침호로 이사를 내려왔다.

이사 내려오는 날, 그 간밤에 베트콩군이 습격해왔다. 우리 우군과 베트콩군간의 무시무시한 전투는 밤부터 날이 훤하게 밝은 12일 낮까지 이어졌다. 밤부터 이튿날 낮까지 주야를 막론하고 악마와 같은 베트콩들이 급수장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습격해왔지만 다행히 한국군들에게는 큰 피해를 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월남 군인들을 비롯하여 급수장 주변에 살고 있는 월남의 남녀노소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십수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는 30여명이나 되었다.

급수장에 파견나온 우리 분대의 하루 일과는 26연대 3대대 지역인 급수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3대대 12중대 병력과 합심하여 주야로 급수장 주변을 경계하는 임무이다. 급수관리와 세탁관리는 파견나온 맹호공병대와 십자성 257병참중대 요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서로가 소속은 다르지만 같이 급수장에 파견나와 있는 한국군인들이고 우선 급수장에 같이 있으니 같은 중대 전우들과 같이 전우애를 발휘하고 있었다. (중략)

그런데 요즘 베트콩들의 행동이 주야간에 조금씩 나타났으나, 12월 22일 밤에는 열에 아홉 번은 죽을까 싶다가 살아났으니 나의 평생을 두고 길이 기억에 남을 일이였다.

상석은 오늘 저녁에 2번초이였다. 1개분대 9명 중에서 분대장은 가끔 순찰 돌고 나머지 8명 분대원은 야간근무를 담당한다. 상석은 2번초 근무를 담당하고 내무반에 들어와 잘려고 눕는데 바로 동쪽 민간인 마을에서 굉장한 포탄 폭타 소리가 울려퍼졌다. 연달아 꽝꽝 터지는 폭탄과 에레무지 총성은 상상초월이였다. 틀림없는 베트콩들의 습격이였다.

베트콩들의 습격은 느낌상으로 보통이 아닌 엄청날 정도였다. 수십명의 습격이 발생하여 급수장에 파견나온 우리 요원들은 순식간에 완전무장하며 각 개인호별로 배치되어 적방향을 향하여 사격을 개시하였다. 우리 우군은 조명탄 하나도 지원못받은 상황이며 더욱이 비가 내리는 상황이라 베트콩이 들어왔는지 안왔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 상석은 총성이 조금 조용해진 틈을 타 낮은 포복으로 번개같이 빵까를 올라가니 사수 김병장 혼자 얼마나 당황했는지 철모도 쓰지 않고 사격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김병장에 왈 "아무리 급하고 위험한 일이 부닥쳐 오더라도 더욱 침착하게 정신을 차려야지 하면서 철모를 빨리 쓰라고 재촉하였다."

그리고 상석은 사수 김병장과 호흡을 맞추며 LMG사격에 몰입하였다. 에레무지 사격도 병행하였지만 화기가 잘 작동되지 않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상석은 M-16으로 사격을 하는 순간 갑자기 바로 옆에 있든 사수 김병장이 '아이쿠'하면서 두손으로 얼굴을 움켜쥐기에 나는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칡흙같은 밤이라 잘 보이지도 않고 답답하기만 하였다. 말도 못하고 두손을 얼굴을 감싸고 있는 김병장을 볼 때 나는 틀림없이 날아오는 실탄에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급하게 김병장을 부축하여 내무반으로 들어와서 분대장에게 사실을 알리고 불빛에 비추어보니 온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급하게 피를 닦고 압박붕대를 감을려고 보니 윗입술 한쪽 끝이 왕창떨어져 나갔고 콧등 위도 상처가 심하였다. 응급치료를 마치고 내일 연대의무실로 가기로 했다. 김병장의 사고순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나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

응급조치를 끝낸 나는 빨리 근무초소로 올라가서 LMG사격을 단숨에 750발을 쏘았다. 그 와중에 어느덧 총성도 끝나고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마을가운데로 나가자 불쌍한 모습이 엄습해왔다. 죄없는 민간인이 많이 죽기도 하여 덜것에 실려 이동되고 있었다. 군인들 중에 부상자는 전부 후송조치를 하였다. 그 시점은 새벽 4시30분경으로 불침번 근무자를 제외한 모든 소대원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조금이나마 잠을 청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어젯밤의 사건을 알아보니 베트콩 30여명이 급수장을 비롯하여 월남민병대원들을 습격한 것이였다. 수시로 이러한 습격이 발생하니 앞으로 또 어떤 일어 생겨날지 우리 분대원들은 경계에 더욱더 만전을 기하고자 다짐을 하였다. 나는 월남전선에서 어디를 가든지 경계만은 일분일초라도 마음에서 떠나서는 안된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11절) 월남전선의 추석날, 맹호국군들도 즐거운 시간을

1968년 10월 6일(음.8월15일)은 추석이다. 이 날도 우리 분대원은 급수장 파견근무를 조금도 손색없이 행하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부터 주변 이야기에 의하면, 월남국민들도 한국처럼 음력 8월 추석과 음력 설날을 일년 중의 큰 명절로 삼고 즐겁게 보낸다고 들었다.

최근 위병소 근무하면서 월남민간인들이 길거리를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니 추석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햇벼를 베어오는 사람, 시장에 가서 잡곡과 고기를 사오는 사람, 특히 어린애들이 예전보다 고운 옷을 입고 다니는 것 등을 볼 때 여기도 음력 8월 추석을 기쁘게 쉬는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월남민간인들 중에서도 씩씩한 청년들은 모두 군에 입대했으니 추석이고 무엇이고 모르겠지만 어린애들, 여자들, 노인들은 추석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분대원 9명들도 추석날 다소나마 재미있게 놀았다. 파견생활 중에 주야근무로 바쁘지만 매복과 작전을 안나가니 추석을 맞아 맥주라도 사놓고 간단한 회식을 할 수가 있었다. 오늘 낮에는 맡은 임무를 철저히 잘하고 저녁식사 시간에 미리사둔 맥주와 콜라, 닭고기를 벌려놓고 우리 분대원 9명과 이웃막사 십자성 257병참중대원들, 12중대원들, 맹호공병대원들을 모두 청하였다. 약 20여명이 모여서 준비한 음식도 먹으면서 노래와 장단으로 파티를 열었다.

우리들은 대략 1시간 30분 동안 재미있게 잘 놀았다. 이렇게 놀적에도 여기는 전선이기에 마음놓고 오래 놀 수가 없었다. 놀때나 식사할때나 화장실갈때나 언제나 사주경계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였다. 짧은 시간에 회식을 끝마치고 각각 초번근무자는 무장을 하여 근무초소로 가서 철저한 근무에 임하였다.

(12절) 그리운 고국, 우리 마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끝이 없었다. 더욱이 부모형제를 두고 온 심경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상석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시로써 표현해본다.)

[제목 : 무제]

남국 월남전선 땅에서 고향땅이

도대체 몇 리나 되겠는가

푸른 하늘 끝닫는 곳 거기가 고향인가

서산에 안개끼고 들바람 불어오면

내 마음은 어느듯 고향땅을 걷는다

잡화잡초 만발한 우리 마을 뒷동산

아지랑이 멀리 낀 봄언덕 마루

목동의 피리소리 논두렁의 개구리 소리

언제나 또 다시 그런 소리 들어보나

아름다운 내고향 하늘 멀리 한번 더 보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이 슬퍼도 좋다

나에게 부담된 임무를 손색없이 완수하고

저문 들길에서 푸른 하늘 별을 쳐다보라

반짝이는 십자성과 밝은 저 달을 보는 것은

전선에서 거룩한 나의 하루 일과이니라

(13절) 전우들에게 귀국인사(1)

(13개월동안 부모형제 이상으로 동고동락한 동료들을 두고 귀국하는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다. 월남전선에서 때로는 피를 튀기며 때로는 웃음꽃을 피우며 고난과 고통을 이겨운 우리 전우들에게 귀국을 앞두고 한마디 남긴다.)

[제목 : 불타는 월남전선에서]

여기 곽병장이 두서없는 귀국인사를 간단히 드리오.

전우들이여!

이국의 하늘밑에 자유수호의 굳은 이념 속에서

오늘도 총부리는 베트콩의 심장을 향해 쉴 줄을 모른다.

고국의 향수도 그리운 집가족 얼굴도 보고픈 갑순의 모습도 아랑곳없이

까만 따이한의 눈망울은 빛을 발하는구나.

수많은 매복작전에 생사고락 같이 한 잊지못할 전우들이여!

오직 나의 인내력과 전우들의 협조로써

나는 금년 7월12일 월남땅이 아쉬운 체 고국으로 귀국하오니

남아있는 전우들은 귀국하는 그날까지 건강에 유의하여

항상 사주경계로써 근무 잘 하다가 금의환향 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는바이오.

1969년 3월 25일

병장 곽상석 書

(14절) 전우들에게 귀국인사(2)

(16개월 파월복무기간을 잘 마치고 귀국하는 상석은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적과의 전투, 무더위와의 전투, 모기와의 전투, 목마름과의 전투 속에서 쌓인 전우애는 귀국을 앞둔 상석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구나. 그 마음을 담아 몇 자 남긴다.)

[제목 : 16개월 파월복무기간을 무사히 넘기고 귀국하면서]

불붙는 월남전선에 와서!

야자수 무성하고 낭만어린 이역월남 산야에 잡목잡초 많은 십자성의 나라, 악마의 베트콩이 있는 곳에서 사주경계 없이는 한 사람도 무사 귀국 할 수 없는 곳이다.

한많은 매복 작전 시에 먹은 물은 수없으며 흘린 땀은 필(筆)로써 헤아리지 못하겠구나. 가시덩굴 많기로 유명한 이 나라, 특히 선인장가시와 대나무가시는 살갗에 박혀놓으니 빼내기가 무척 힘들었지.

장기 매복을 나가서 고통과 고뇌를 겪은 일, OP근무 시 식사난으로 겪은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지지 않는구나. 특히 야간매복 시에는 숨도 한번 크게 못쉬고, 동지섣달 긴긴밤에 주둥이 뾰족한 모기떼와 밤새도록 싸워가며 뜬눈으로 지새운 일들, 쉬지 않고 내리는 소낙비는 상하 작업복을 다 적시었지.

추운 것은 뒷문제이고 베트콩과 대결해서 총구를 겨눌 적에 용맹함과 간절함은 그 무엇으로 표현하리오.

도마뱀 많기로 유명한 이 나라 밀림 속에서 자다보면 배 위로도 지나가고 얼굴 위로도 지나가니 그 당시는 꼼짝않고 그냥 있어야만 물리지 않았지. 보기에도 징그러운 지네는 왜 그렇게도 많았던가? 발이 숭숭하게 많이 달린 흉한 벌레, 콧등 위에 빨간 딱지가 붙은 지네는 아...지긋지긋하다.

남국 월남전선 섭씨 46도를 오르내리는 열대나라에서 땀에 젖은 작업복을 짤라 입으면 금방 땀에 적시게 되었지.

킬러계곡작전(혜산진 3호작전) 중에 얼마나 목이 말라든지 철모에 오줌받아 마셔야 될까? 그냥 참아야 할까? 하면서 시꺼멓게 끄을린 전우들이 서로를 쳐다볼 때 참 서글펐지.

할 말을 다하자면 태산도 부족하고 태평양도 좁으나마 글로써 다 쓸 수 없으니 겪은 일은 이만 쓰기로 한다. 끝으로 나는 금일 7월 12일 무사귀국하니 남은 전우들은 경계에 큰 관심을 두고 건강히 근무 잘 하다가 금의환향 하기를 진심으로 비오.

1969년 4월 5일

병장 곽상석 書

[마무리하면서]

13개월동안 월남전선에서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통하여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였다. 전투작전과 더불어 때로는 가족보다 더 소중한 동료전우들과 함께 하면서 희노애락을 같이 할 수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을 극복하고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향마을을 그리워하고 부모형제를 그리워한 것도 이제는 추억이 되고 있다.

조국을 위해 한 목숨을 바치는 심정으로 달려간 월남전선!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그 당시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던 전우들이 보고싶구나. 기회가 된다면 그때 그 시절 전우들과 진하고 포옹하고 싶구나.

[곽상석의 월남전선 맹호부대]이야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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