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또 하나의 전쟁
해가 뜬다. 곧바로 무서운 더위가 시작 되었다.
월남 중부지역은 대략 3월부터 8월까지는 건기(乾期)이고, 9월부터 2월까지는 우기(雨氣)다. 5월 초인 지금은 한창 건기로 접어든 시기다. 아침부터 맹렬한 열기가 정글을 찜통처럼 달군다.
아침식사로 Cㅡ레이션 캔(전투식량)을 땄다. 흔히 월남생활 연륜은 C-레이션 캔 따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매복지에서 캔을 딸 때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수건 따위를 덮고 따야한다. 숙련된 고참병들은 그야말로 바늘 떨어뜨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순식간에 캔을 따버린다. 역시 나는 아직 월남 '짬밥' 그릇 수가 멀었나 보다. 소리 없이 캔을 따려니 그게 생각처럼 되질 않는다.
'MCI'(MEAL, COMBAT, INDIVIDUAL, PORK, STEAK) 영어로 적힌 Cㅡ레이션 박스 속에는 12개의 작은 박스가 있는데, 그중 한 개가 한 끼 식사인데 네 개의 녹색 캔과 엑세서리 비닐 백이 들어 있다.
'첫 끼는 어쨌건 맛있는 걸로 시작해야지.'
비프스테이크 캔과 후루츠 캔을 따서 먹었다. 매복 나와서 크래커를 피넛 버터에 찍어 먹는 것은 사치다. Cㅡ레이션 박스 속에 든 비스킷, 쿠키 샌드위치, 크래커 따위는 물이 많이 쓰이기 때문에 빼놓는다. 그러나 액세서리 비닐 백에 든 인스턴트커피는 반드시 챙겨 나와야 한다. 나중에 밤에 졸음을 이기기 위해서는 커피가 없으면 곤란하다.
모두들 조용한 가운데 아침식사를 마쳤다. 빈 캔은 흙을 담아서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소리 나지 않게 넣고 다시 흙으로 덮는다. 소리만큼이나 냄새도 치명적일 수 있다. 우리가 월남인들에게서 특유의 냄새, 마치 젓갈 썩는 냄새를 맡듯이 놈들도 우리의 스테이크나 마늘냄새를 맡을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뒷정리를 깔끔하게 해야 한다.
생리문제 해결도 마찬가지. 매복지의 2, 3m 부근에 구덩이를 파고 해결한다. 파낸 흙은 그대로 뒀다가 일을 본 후 흙으로 덮는다. 그만큼 매복지에서의 소리, 냄새, 움직임에 극도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만일 매복을 나가 설사라도 만나면 모든 분대원들이 예민해 진다. 얼마 전. 배앓이 때문에 3대대에서 사고가 났다. 월남 온지 얼마 안 된 신병이 야간 매복을 나가 배탈이 난 것이다. 신병은 매복지 바로 옆에서 두어 번 일을 보고 나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가 보다. 그래서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볼 일을 보게 된 것이다. 깜깜한 밤중, 일을 보고 돌아오던 신병은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잘못 들어 옆의 매복지로 접근하고 말았다. 어둠 속, 앞에서 불쑥 사람이 나타나니까 그대로 갈겨 버렸다는 것이다. 배앓이 때문에 아군의 총탄에 쓰러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 했다면서, 절대 주위를 벗어나지 말라고 박 점득 상병이 주의를 줬다. 원칙에 벗어난 단 한 번의 실수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된다는 것이다.
해가 뜨고 주위가 밝아진다. 정글 속의 모든 생명체들이 활발히 움직인다. 거의 2m나 됨직한 뱀들이 땅위로, 나무 위로 느릿느릿 기어 다니고, 가물치만한 지네가 재빨리 지나간다. 독을 품은 전갈들은 더위를 피해 바위틈으로 숨어들었다. 특히 월남의 정글 속에는 꽃게만한 산 게들이 많다. 식용할 수 없는 산 게들은 Cㅡ레이션 냄새를 맡고 곧잘 몰려든다. 등껍질이 시퍼렇고 우중충한 반점이 보기에도 징그럽다.
이들 숲 속 생물들은 대부분 독이 있다고 봐야 한다. 자칫 물리기라도 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 특히 전갈에 쏘이거나 독사에 물리면 30분 이내 저승행이다. 야생 산닭들이 자주 나타나기도 하고 가끔 산돼지와 사슴들도 나타난다. 얼마 전, 3분대에서 호랑이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달빛이 희미한 한밤중, 바로 20여m 전방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눈에 불을 번쩍이며 한참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여차하면 갈길 태세로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있는데 녀석은 '크흥' 하고 포효를 한 번 하고 사라지더라고 했다.
열대의 뜨거운 태양은 본격적으로 숲을 데우기 시작한다. 꼼짝 않고 앉아 있자니 정수리로부터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땀은 등골을 타고 내려 엉덩이 밑으로 뚝뚝 떨어진다. 목구멍은 갈라 찧어질 듯 갈증이 난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그때마다 물을 마신다면 가져온 물은 한나절도 못가 바닥이 날 것이다. 갈증이 나더라고 버틸 수 있는 한 버텨야 한다. 물은 바로 생명이다. 모두들 기진맥진이다. 낮 동안 열기와 갈증과 고통스런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밤 동안은 모기와의 전쟁이다. 유효사거리가 군용모포 3장이라는 월남의 모기들은 지독하다. 얼굴과 팔에 모기약을 발라도 밤새도록 공습을 한다. 얼굴 주위를 맴돌다가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바로 공격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툭 치면 보통 5, 6마리가 떨어진다. 이 조그마한 미물이 이토록 인간을 괴롭힐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렇다고 부채질도 할 수 없고 일어설 수도 없다. 아무리 모기가 덤벼도 바위처럼 뭉기고 앉아 경계를 해야 한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나와의 전투를 치르고 있다.
남국의 별들은 머리위에서 무수히 빛나고 있다. 그러나 이 밤, 쏟아지는 별빛이 마냥 낭만적일 턱이 없다. 어둠 속에 묻힌 정글의 무덤 속 어디에선가 저 별들을 좌표삼아 어둠을 헤치며 이 순간에도 적들이 나의 모가지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맞이할 죽음의 공포 ... , 그것이 이 밤 남국의 별빛이 결코 낭만일 수 없는 이유다.
이제 수마(睡魔)와의 싸움이다. 이틀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다보니 눈꺼풀에 쇠뭉치를 단 듯하다. 지금껏 팽팽하던 긴장은 서서히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깜빡깜빡 존 것 같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도 안 된다. 정신을 차렸다 싶었는데 어느새 또 고개가 끄떡 꺾였나 보다.
인스턴트커피 한 봉을 입에 털어 넣고 물 한 모금으로 넘겨보지만 이건 숫제 커피 맛과는 거리가 멀다. 커피 향도 못 느낄 만큼 맛이 쓰기만 하다. 단지 졸음을 쫒기 위한 각성제일 뿐이다. 시간이 좀 지나자 졸음을 견디기가 한결 수월하다.
아! 언제쯤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영아와 다방에서 마시던 구수하고 달콤한 그 커피 말이다. 나도 모르게 영아의 시간 속으로 빨려든다. 영아의 환한 웃음, 희고 매끈한 다리,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클로즈업 되어 떠오른다. 너무 보고 싶다. 철수해서 기지로 돌아가면 영아의 편지가 와 있을까? 어서 이 밤이 지났으면 ... ,
이 어둠이 걷히면 또 다시 정글을 달굴 불덩이가 솟을 것이다. 이 순간, 꼼짝 못하고 모기에 뜯기는 형벌을 고스란히 받아 내는 것은 비록 뜨거울지언정 내일 아침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고자 함이다. 제발 이 밤도 무사히 지났으면, 그리고 아침 햇살이 내 머리 위를 온전히 비춰 줬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새벽으로 치달을수록 자꾸만 늘어지는 몸을 추스르며 졸음을 쫒기 위해 혼자 끝말잇기도 하고, 100부터 거꾸로 세기도 한다. 그래도 몰려드는 졸음으로 가수면 상태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친다.
이윽고 동녘이 훤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도 보고자 했던 새날이 밝아 오는 것이다. 날이 밝아지면서 모두 철수준비를 서두른다. 일부는 경계를 하면서 일부는 크레모어를 걷고 군장을 꾸린다. 모두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도 철수하는 기쁨으로 민첩하게 움직인다. 3박4일간, 극도의 긴장과 갈증, 모기와의 전투를 치르면서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적은 만나지를 못했다.
11, 영아, 내 사랑
아직도 영아는 편지가 없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전쟁터에서도 어느 한 순간 잊은 적이 없는 영아. 그립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이어졌지만 어느새 걱정으로 돌아온다. 온갖 생각이 다 든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지, 아니면 이사를 간 건지 ... , 여남 번이나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 ,
- 그리운 영아! 그리고 사랑하는 영아!
영아를 처음 만난 날. 나는 지금 이역만리 남국의 전선에서 영아와의 날들을 수백, 수천 번도 더 회상하고 있어. 어쩌면 그 날 그 순간을 난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언젠가 짧은 겨울 해가 기울어 시장의 가게들은 한 두 곳 문을 닫고 있었지. 어머니를 도와 가게 문을 닫아주고 친구들을 만나려고 서두르는 참이었어.
"아저씨, 메밀묵 두 모만 주세요."
함석문짝을 들고 엉거주춤 뒤를 돌아보았고, 목 티셔츠 위에 가죽 재킷, 짧은 치마 차림의 단발머리 아가씨가 서있었어. 사투리가 아닌 경쾌한 목소리의 서울 말씨, 동네에서 처음 보는 아가씨였어.
한 천사가 거기 있었던 거야. 나는 메밀묵을 줄 생각도 못하고 문짝을 든 채 한 동안 멍하니 서있었지. 어머니가 가게 안쪽에서 물건을 정리하다가 '얘야! 묵 달라는데 뭐 하냐'고 하실 때까지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리고 나는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고 널 뒤따라갔었어.
우리 집 못 미쳐 삼철이네 가게 뒷집으로 들어가더구나. 나는 삼철이네 가게에 들어가서 담배 한 갑과 사이다 한 병을 샀어. 그리고 삼철이 어머니에게 물었지. 삼철이 어머니는 얼마 전 서울에서 이사 왔는데, 아가씨 이름은 모르고 그냥 '영아' 라고만 부른다고 했어.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실패해서 처갓집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그러면서 삼철이 어머니는 아가씨가 어디 사무실 경리로 일하러 다닌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그러면서 잘 해 보라고 하더구나.
나는 너를 본 순간부터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삼철이 어머니가 무진 고마웠어. 내 편지를 전해주고 다리도 놔 주었지. 데이트를 신청 했는데 넌 나를 바람 맞혔다고, 기억 해?
두 번째는 삼철이 어머니가 잘 이야기 해주어서 아마 너 마음이 돌아섰는지도 몰라. 우리 동네 아가씨들 사이에서 내가 인기 최고라는 걸 삼철이 어머니도 알고 있으니까. 나는 검게 염색한 미제 깔깔이 군복을 입고 흰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너의 퇴근시간에 맞춰 사무실 근처에서 폼을 잡고 기다렸지.
첫 데이트.
그날 나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어. 세상이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어. 우린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맥주홀에서 맥주도 마셨지. 그날 이후 우리는 많이도 붙어 다녔지. 다방으로, 영화관으로, 맥주홀로 ... , 너를 본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했었지.
어느 봄날의 토요일. 그 날을 내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침부터 하늘은 얼마나 맑던지. 나는 일치감치 광 낸 구두에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오전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너를 기다리며 네 사무실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지. 흰 블라우스에 미니스커틀 입고 퇴근하는 영아는 완전 영화배우였어. 문 희나 윤 정희보다 확실히 더 예뻤어.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나무 아름다웠어. 우린 벚꽃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동촌 유원지로 가서 그곳에서 소문난 민물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었지.
주말이라 동촌 유원지는 봄나들이 나온 아낙네들이 장구를 치며 봄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멋을 한껏 부린 아베크족들이 강변을 거닐거나 보트를 타고 있었지. 영아 너도 보트를 타고 싶다고 했지. 그래. 그건 새로운 우리 역사의 시작이었어. 나 보트 젖는 건 자신 있었거든. 중학생 때부터 형들을 따라 동촌 유원지로 와서 보트 젖는 걸 배웠지. 그런데 그날 사고는 완전히 영아 때문이었다고. 아니 내 실수도 조금은 있었어. 보트에서 영아가 내 맞은편에 앉는 건 당연하지만 운명이기도 했어. 글쎄, 옆으로 포개 앉은 너의 무릎 위 허벅지 살결이 너무도 눈이 부셨어. 어떻게 살결이 그리 고울 수가 있는지, 숨이 다 가빠지더라고. 근데, 그런데 네가 자세를 바꿔 앉을 때 언뜻 너의 속옷이 비치는 거야. 난 그걸 보고 말았지 숨이 콱 막혔어. 눈을 질끈 감았지. 그래서 사고가 났던 거야.
너의 속옷과 속살을 본 나의 젊음이 발산하여 나는 너를 안으려 했고 너는 피하려고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보트가 뒤집혀 버린 거야. 마침 수심이 깊지 않아 다행이었어. 그 와중에도 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블라우스에 드러난 네 몸매는 심장이 벌렁벌렁 뛰게 만들었어. 물론 그렇다고 마냥 네 몸매를 감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 잽싸게 내 윗도리를 벗어 덮어 줬잖아. 그건 너도 알지. 그리고 추워서 벌벌 떠는 너를 껴안고 따뜻한 곳을 찾아 여인숙으로 갔고 ... ,
그건 전혀 우리 계획에 없던 일이었어. 우연이었을 뿐이었어. 생각 나?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우리가 들어선 여인숙 아주머니는 연탄아궁이를 활짝 열어 뜨끈하게 불을 넣어주고, 깨끗하게 시친 이불 한 채를 들여 주던 것 기억 나? 또 월남치마도 들여 주었지. 너는 젖은 옷들을 벗어 말리느라 월남치마를 가슴께로 끌어 올리고 이불을 돌돌 말고 있었지. 뽀얀 가슴골을 드러낸 채 ... ,
그날, 창문으로 노을이 비치던 그 순간, 첫 키스의 달콤함을 어떻게 잊겠어. 화인처럼 뜨겁던 그 입술, 부드럽고 매끈한 그 감촉, 언제 생각해도 온몸이 전율로 떨리는 그런 순간이었어. 우린 그동안 서로를 갈망했던 안타까움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지. 지극히 황홀하고 가슴 벅차는, 그래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어. 난 내 눈으로 차마 네 뽀얀 가슴을 볼 수 없어 눈을 꼭 감아 버렸다고. 그리고는 내 인생에 너를 놓칠 수 없다는 그런 마음으로 너를 꼭 껴안았어. 너도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안기었어. 그 순간 나는 죽어도 좋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리고 우린 어떻게 한 몸이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어. 우리는 물이 흐르듯 그렇게 한 몸이 되었었지.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함께 해야 할 우리, 그 짧았던 순간, 난 내 생애 최고의 희열, 그것을 맛봤어. 분명 목숨을 걸만한 사랑, 그 터질듯 한 환희, 영아!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그 사랑, 언제 어느 때 떠올려도 황홀하고 가슴 벅찬 순간, 그것이 지금 내 삶의 전부이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유인 거야.
그래.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거야. 이 참혹한 전쟁의 불구덩이 속이라 해도 기필코 살아서 돌아갈 거야. 그리고 영아 너와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 거야. 영아 ! 조금만 기다려 줘. 사랑한다. 영아!
영아를 사랑하는 곤이가 -
그래. 영아와 나만이 고이 간직한 추억, 그리고 약속.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영아 역시 같은 마음일 거야. 기다려 다오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렴.
12, 포격과 저격
"쾅! 콰쾅!"
밤 10시는 훨씬 지났을 것 같다. 무전기 배터리에 랜턴 전구를 연결해서 밝힌 불빛아래서 영아한테 편지를 쓰고 있었다. 갑자기 기지 안에서 천지를 흔드는 폭음이 났다. 쓰던 편지를 그대로 두고 팬티 바람에 철모를 쓰고 총과 전투복, 정글화를 든 채 개인호로 뛰어 들어갔다. 놈들이 기지에 포격을 해온 것이다. 즉시 복장을 갖추고 경계에 들어갔다.
"쾅! 쾅!"
연신 포탄이 날아와 기지 안에 무차별 떨어진다. 그런데 어디서 쏘는지, 어느 방향에서 날아오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관망대 근무자도 포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발포지점을 관측하지 못하고 있다.
공용화기 벙커에서는 캐리버 50을 밖을 향해 쏘아대고 있다. 포탄은 계속 날아와 터지고 있는데, 조준이 엉터리인지 제멋대로이다. 철조망 앞 도로에서 터지는가 하면, 기지를 넘어가서 터지는 것도 있고, 취사장 부근에 떨어져 터지기도 한다.
한 발이 미군 공병대 막사에 떨어져 불이 붙은 모양이다. 불길이 치솟고 진화한다고 소란스럽다. 조명을 띄우고 위협사격을 퍼붓지만 포탄은 계속 날아와 터진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포를 쏘면 발사와 동시에 불꽃이 보이기 마련인데 관망대에서는 발포지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중대 OP에서도, 기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누에고지에서도 도무지 관측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발포지점을 찾아야 집중공격을 퍼붓던지 말든지 할 텐데, 발포지점을 모르니 모두 허공에다 갈겨대고 있다. 포탄은 자그마치 21발이나 날아와 터졌다. 발포지점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불안해 진다. 분명 놈들의 공격은 틀림없는데, 이쪽에서는 적을 확인하지 못하니 유령하고 싸우는 꼴이다. 놈들이 언젠가는 16교량과 오일펌프 스테이션을 공격하겠다고 했는데 지금부터 시작인가?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니 영아와의 달콤한 사랑의 편지질도 깨져 버리고 말았다. 불을 끄고 누웠으나 잠자리마저 뒤숭숭하다. 군대 밥그릇 수가 비슷한 옆자리의 박 점득 상병도 잠이 달아나 버렸는지 끙끙거린다.
"박 상병, 안 자?"
"아, 니미럴. 잠이 안 오네. 배가 출출한 것이 왜 이리 제삿밥 한 그릇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네."
"제삿밥?"
"오늘이 음력 며칠이지? 사월 스무 닷새가 아버지 제산데 ... ,"
"엊그제 사월 보름이 지났으니까 한 사나흘 있으면 닥치네?"
"한 밤중에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출출할 때 하얀 쌀밥에 고사리, 도라지나물을 한데 비벼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간간한 조기 살 한 점씩 반찬해서 먹으면 꿀맛이지. 제삿밥 한 그릇 먹고 배 둥둥 두드리며 뜨뜻한 아랫목에 늘어지게 한숨 자봤으면 ... , 이태 째 형님 혼자서 제사를 모시네."
"설마 내년에는 제삿밥 먹을 수 있지 않겠나."
"아까 보니까 김 상병 또 애인한테 편지 쓰다 뛰쳐나간 것 같던데, 아직 답장 안 왔어?"
" ... "
"야! 고무신 거꾸로 신은 것 아니야?"
"박 상병, 넌 짝사랑이지만 난 아니라고. 차원이 달라. 이미 우린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양가 집안에서도 알고 있고 ... , 넌 아직 짝사랑이라며?'
"그래. 짝사랑은 맞지만 월남 오기 전 첫 휴가 나갔을 때 만났다고. 회사에 찾아가 걔랑 걔 친구랑 함께 저녁도 먹었어. 귀국하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 사랑을 고백할거야."
경남 사천이 고향인 박 점득 상병은 어릴 적 아버지를 여위고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부산으로 나왔단다. 일찍부터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워 시내버스 회사 정비보조를 하다가 입대했다고 한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한 살 아래 차장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내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입대하고 말았다고 했다.
박 상병과 고향 이야기, 애인 이야기에서 술 마신 이야기까지 하다 결국 후반 관망대 근무자가 교대하러 나가는 걸 보고 잠을 청했다.
날이 밝자 기상과 함께 도로정찰에 나선다. 기지에서의 하루 일과는 도로정찰로 시작된다. 간밤 놈들의 포 공격으로 정찰에 나서는 분대원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역력하다. 밤 동안 막아 놓은 16교량의 바리게이트를 치우고 출발했다. 똥포 삼거리까지 가면서 도로에 묻어놓은 지뢰나 부비트랩을 찾아내는 것이다. 놈들은 종종 어둠을 틈타 도로에 대전차지뢰를 묻어 놓기도 하고, TNT로 만든 부비트랩을 매설하기도 한다. 때로는 도로를 따라 매설된 송유관을 폭파시켜 밤새도록 불기둥이 치솟기도 한다.
도로정찰을 좌우측 각각 2명이 경계를 하면서 위협사격도 한다. 본대는 탐침용 창과 금속탐지기로 매설물을 탐색하는 것이다. 도로 양측의 경계병들은 놈들이 은신할만한 장소나 기습공격 가능성이 있는 장소에 로켓포와 M79유탄을 집어넣는다. 가까운 엄폐지점에는 수류탄을 까서 던지고 소총을 종횡으로 사격하면서 전진한다.
특히 누에고지 꼬리부분의 신병사고지점에서는 한층 더 신경 써서 살핀다. 이곳은 중대 OP에서 관측이 안 되는 사각지대다. 도로 바로 옆으로 정글이 우거져 놈들이 활동하기 안성맞춤이다. 지난 밤 놈들이 포 공격을 한 만큼 신병사고지점에 수류탄과 유탄발사기와 로켓포까지 집중적으로 집어넣었다.
"열여섯 통나무! 여기는 은하수 하나!"
"송신.""정찰임무 끝. 통금 해제 바람. 이상!"
별 특이사항 없이 도로정찰을 마쳤다. 무전으로 정찰완료를 알리면 통행제한이 풀리고 군용차량뿐만 아니라 민간차량의 통행도 시작된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정찰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담배 한 대 피면서 빈 트럭이 오는지 기다리는 것이다. 기지로 돌아 올 때는 통상 월남 민간인 트럭을 얻어 타고 온다.
16교량에 트럭을 세워 모두 내려 기지로 들어서니 기지 내 분위기가 심상찮다. 소대장과 몇 몇 소대원들이 취사장 옆에 침통한 표정으로 둘러서 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취사장 쪽으로 달려갔다. 둘러선 소대원들의 발아래에는 박 점득 상병이 드러누워 있다. 박 상병은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어제 밤, 포 공격이 있은 후 잠이 오지 않아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늦게 잔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분대장은 푹 좀 자도록 두라고했다. 그리고 우리끼리 조를 편성하여 도로정찰을 나섰던 것이다.
박 상병은 잠에서 일어나 보니 모두 도로정찰 나가고, 근무서고 없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다가 어제 못 다한 김 상열 병장의 귀국박스를 마무리 지으려 했던가 보다. 박스 옆에는 망치가 떨어져 있고 반쯤 박히다만 못이 그대로 있다.
조용한 아침. 느닷없이 총탄 한 발이 날아들었다. 관망대 근무자가 총소리가 났다 싶어 주위를 살피는데, 박 상병이 옆으로 푹 쓰러지더라고 했다. 정확히 박 상병의 옆머리를 때린 것이다. 단 한 발. 저격을 받은 것이다. 머리에는 아직도 벌컥벌컥 피가 솟구치고 박 상병은 '꾸륵 꾸륵' 하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제 밤, 잠이 오지 않는다며 고향 이야기, 차량 정비 이야기, 짝사랑 이야기를 했는데 ... , 내년에는 아버지 제사 모시지 않겠나 하더니만, 어떻게 이리 허무하게 죽을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지난 밤 나란히 누워 짝사랑하는 그녀 이야기를 하면서, 부산항에 내리면 곧바로 영도에 있는 회사로 달려가 그녀에게 사랑 고백을 하겠다는 박 상병. 그가 이역만리 타국전선에서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모두 말을 잊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박 상병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 쪽 무릎을 딛고 놀라움으로 허옇게 뒤집힌 박 상병의 눈꺼풀을 덮어 주었다. 아직도 그의 뺨에는 온기가 남아 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하룻밤 사이 그와 나는 이승과 저승, 서로 오갈 수 없는 끝에서 끝으로 갈라서 버렸다.
"야! 이 개자식들아! 모두죽여 버릴 거야!"
김 상열 병장이 울분을 참지 못해 허공중에 총을 갈겨대고 있다. 눈물을 흘리면서 ... , 관망대에서도 기지 밖을 향해 난사하고 있다. 모두 선 자리에서 포효하며 울부짖는다.
'그래, 박 상병, 저승에 가거든 꿈에서라도 보고 싶다던 아버지를 꼭 만나길 바란다.'
13, 적을 보내라
적의 포탄은 2, 3일에 한 번씩 기지로 어김없이 날아든다.
열흘이 지나도록 발포지점을 파악할 수 없다. 이제는 방법이 없다. 밤 생쥐는 올빼미가 잡는 법. 매복으로 때려잡는 수밖에 없다.
본디 우리 맹호는 야간 매복 작전의 원조 아닌가. 맹호 전사들이 매복의 귀신으로 통한다는 것은 연대에서 교육 받으며 익히 들었다. 처음 한국군이 파월되었을 때는 매복 작전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작전은 미군과 마찬가지로 월남인들의 낮잠 시간인 '씨아스타 타임'을 이용하여 마을이나 정글에서 베트콩을 수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낮에 은신했다가 밤이면 활동하는 베트콩이 쉽게 잡힐 리가 없었다.
1966년 2월. 맹호 1연대 3대대가 퀴논으로부터 30마일 떨어진 호아히앱 마을에서 처음으로 매복 작전을 펼쳤다. 당시 맹호 전사들은 마을의 농가가 놈들의 은신처라는 첩보를 사전에 입수했다. 야간을 틈타 매복 작전을 펼친 결과, 적 1개 소대를 일망타진 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 피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작전이 미국 유력 신문에 소개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야간 매복 작전의 성과를 입증하게 된 것이다.
우리 맹호부대는 매복의 귀신이 되고 ... ,
기지에 포탄을 날리는 놈들을 잡기 위해 매일 밤 1개 분대가 2개조로 나누어 기지 앞 정글로 매복 나가기로 했다. 19번 도로에서 갈라진 3A도로 독립수 우측 계곡에 1개조, 오일펌프 맞은편 정글에 1개조가 매복하기로 했다. 크레모어를 설치하고 동이 틀 때까지 숨을 죽이고 놈들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은하수 하나 A! 여기는 300. 이상 없으면 한 번 불고, 이상 있으면 두 번 불어라. 이상!"
중대장의 이상 유무를 묻는 교신이다. 무전기 송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야 겨우 들릴 정도로 모기소리보다 적다. 매복지에서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볼륨을 최소로 낮춰놓고 응신은 입으로 바람을 분다. 매복조 무전망은 상급부대에서도 주파수를 맞추어 교신할 수 있는데, 300은 중대장을 뜻하는 은어이다. 적은 촌놈, 총은 작대기, 교량은 통나무 등으로 부른다.
"훅!"
졸지 않고 경계 잘 하고 있다는 신호로 입 바람을 한 번 불었다.
"지금 열하나 독점 삼공(11:30), 계속 수고 바람!"
매복 시에는 시계를 차지 않는다. 달빛 등이 반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휘관이나 상황실 근무자가 시간을 수시로 알려주고, 이상 유무 확인도 한다. 교신이 막 끝났을 때, 뒤쪽 기지에서 '쾅, 콰쾅!' 하고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놈들이 또 기지에 포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뒤이어 누에고지 하단부 19번 도로 변의 송유관에서도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는다. 난리 났다. 무전망이 시끄럽다.
"번데기, 번데기! 여기는 300!"
"송신."
"폭파지점 위치 확인 바람. 발포지점은 관측 되는가?"
"신병사고지점 송유관 폭파. 발포지점 확인되지 않는다. 이상!"
오늘 밤도 20여발의 포탄이 날아들었지만 매복조도, 기지 내 관망대에서도 OP에서도 발포지점을 관측하지 못했다. 귀신이 곡 할 일이다.
놈들이 쏜 포탄이 관망대 난간에 떨어지는 바람에 근무자가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송유관에서는 근거리에 있는 비상 밸브를 폐쇄해도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밤새도록 치솟아 올랐다.
2, 3일에 한 번씩 날아오는 포탄. 미군들도 겁에 질려 피로감이 역력하다. 기지 내에서 지나칠 때면 먼저 '오늘 저녁 또 포가 날아옵니다.'라며 포탄 떨어지는 시늉을 한다. 그 표정이 매우 진지하다.
이번에는 똥포 삼거리에 3분대가 매복하기로 했다. 어제 우리 1분대가 진입로를 터놓은 덕분에 내가 3분대 지원을 나갔다. 똥포 마을은 적의 은거지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주시해온 곳이다. 오래된 묘지 주변에는 손바닥 선인장이 무수히 자라고 있어, 선인장 뒤로 은폐는 할 수 있어도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엄폐물이 없는 곳이다. 우측에는 16교량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있고, 뒤로는 똥포 마을에서 팅손 마을로 이어지는 소로와 작은 다리가 있는 곳이다. 특히 중대 OP 앞에 있는 팅손 마을도 적성이 강한 부락이라 신경의 끈을 늦출 수 없는 곳이다.
오늘따라 바람이 몹시 강하게 불고 있다. 그나마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끔씩 달빛을 가려주어 약간은 안심이 된다. 우리에게 유리한 기상조건은 놈들에게도 똑같은 장점이 될 것이다. 오늘 밤은 놈들이 나타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때문에 모두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기지에 포를 쏘러 오는 놈들을 꼭 잡아야 한다. 달의 기울기로 봐서 자정이 좀 지났을까? 뒤쪽 조그만 다리 위로 개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모두 숨소리를 죽이며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놈들은 많은 병력이 이동할 때는 언제나 개를 먼저 내보내면서 뒤따라간다. 마른 침을 삼키며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쾅!"
갑자기 폭음이 일어나고 크레모어 후폭풍이 눈앞을 확 스친다. '왔구나!' 하는 생각에 바짝 엎드려 경계를 했다 그러나 크레모어 폭발음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고 조용하다. 알고 보니 약간 덤벙대는 이 홍주 상병이 갑자기 나타난 적을 보고 당황해서 크레모어 격발기를 눌러버린 것이다. 아직 크레모어 사선까지 접근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낭패! 즉시 '적 출현'을 알리는 적색 타식을 올리고 연달아 조명 타식을 올려 살펴보았으나, 놈들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무전기에서는 상황을 묻는 중대장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지만 교신을 할 수 없어 꺼버렸다. 우리의 위치가 적에게 노출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대로 있다가는 역습 당할 가능성이 있다. 위치 이동을 해야 한다.
3분대장 최 화규 하사를 도와 설치한 크레모어를 신속히 거두어 군장을 챙겨 막 이동하려는데, 전방 80여m 지점 논둑에 놈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약 30여명. 19번 도로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일제히 사격을 가하면 놈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공격하면 놈들도 즉각 응사해 올 것이다.
우리는 단 7명. 이미 크레모어는 철거했고 딱히 엄폐할 만한 곳도 없다. 몸을 가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종잇장 같은 선인장뿐이다. 선제공격을 하기엔 부담이 너무 크다. 모두 숨을 죽이고 놈들의 동태를 살핀다. 여차하면 죽음을 각오하고 일전을 벌여야 한다. 숨 막히는 이 순간을 지혜롭게 판단해야 한다. 모두 3분대장만 바라보고 있다.
이 월남전에서 우리는 비록 10명의 적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명의 전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그만큼 급하게 물리쳐야할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물리친다 해도 내일이면 놈들은 또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이다.
'세계자유민주의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낯선 이역만리 타국의 전쟁터에 왔지만, 대한민국 육군 상병이 목숨을 내던진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닐 듯싶다. 이 전쟁이 내 가족과 내 조국을 위한 것이라면 모를까,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끝장도 낼 수 없는 이 전쟁에 목숨을 던지기엔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백악관의 존슨대통령이 참모들과 다리를 꼬고 앉아 내린 결론 때문에 월남의 전쟁터로 끌려왔다. 백악관의 그들은 나를 '세계민주주의'의 제물이 되기를 원하지만, 나는 이 전쟁터에서 500불 개 값에 목숨을 내놓고 싶지 않다.
쉽게들 '자유, 정의'를 말하지만 눈알 까뒤집고 죽어가는 전우의 눈꺼풀을 덮어 줘보지 않았다면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모두 개소리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생을 마감하는 전우를 지켜본 나는 안다. 그 누구도 국립묘지에 묻히기 위해 이 타국 전선에서 죽겠다는 놈은 없다는 것을 ... ,
놈들은 희미한 달빛아래 20고지 좌측 공동묘지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이제야 무전기를 열고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누에고지에 적들의 이동로 좌표를 불러주어 포격을 유도한 후, 철수 했다.
결국 침착성과 인내심의 결여로 굴러들어온 횡재(?)도 놓치고, 오히려 큰 피해를 볼 뻔했다. 매복 작전은 적이 최단거리까지 접근할 동안 침착하게 기다렸다가 한 순간에 전원 사살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한국군이 이 월남전에서 다른 나라 군대에 비해 놀랄 정도의 전과를 올리는 것도 매복에서 이런 초인적인 인내심과 침착성을 발휘한 결과다. 그 때문에 베트콩들도 '따이한'이라면 아예 피해 간다고 한다. 이 홍주 상병, 오늘 좋은 경험 했을 것이다. 덕분에 전과도 못 올리고, 전우들을 저승의 문턱까지 몰고 갔다 온 것이다. 우리 분대원이라면 이 녀석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패주기라도 할 텐데 ... ,
오늘 정말 식겁했다. 까딱 했으면 대형사고 당할 뻔 했다.
14, 안캐페스
놈들의 포 공격은 계속이다. 발포지점도 찾지 못하고, 매복에서도 아직 잡지 못했다.
이번엔 중대 단위 작전으로 하루 동안 바슈엔산을 수색하기로 했다.
별짓을 다 해본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러겠나.
바슈엔산은 3A도로를 경계로 중대 OP와 나란히 하고 있다. 뒤로는 송콘강, 앞으로는 딩칸 계곡을 끼고 안캐페스와 마주보고 있는 해발 350m로 거목이 우거지고 천연동굴도 많은 산이다. 월맹군 18연대 8대대 병력들이 소도산과 똥태산으로 이동하는 주요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송콘강을 건너온 적들은 띵장 마을에 잠시 은거해 있다가 바슈엔산을 타고 넘는다. 그리고 딩칸 계곡을 지나 안케페스 밑으로 돌아 개나리 고지 옆으로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다.
바슈엔산은 째째산과 함께 우리 연대에 배속된 61포대와 미군 8인치 포대가 수시로 위협포격을 하는 곳이다. 그만큼 은신처가 많고 놈들의 이동이 잦다는 것이다. 어쩌면 놈들이 이 바슈엔산에서 16교량으로 와서 포격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놈들의 포격으로 잠을 못 이루니 모두 눈에 핏발이 설 수 밖에 없다. 여하튼 포격하러 오는 놈들을 꼭 잡아야 한다.
아침부터 소대별로 산개하여 수색에 돌입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적을 대비하여 즉각 사격할 수 있도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정글 속으로 진입하여 수색을 한다. 오후 2시쯤, 동굴에서 두 놈이 튀어나와 도망을 쳤다. 일부는 추격을 하고 동굴수색을 했다. 수류탄을 두 발 집어넣고 총탄을 쏟아 부으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놈들의 식량창고인 것 같다. 몇 개의 쌀부대가 있고, 숙식도구들이 한쪽 구석에 너절하게 널려있고, 고장 난 M1소총 1정과 AK소총 1정도 있었다. 동굴 옆 거목 위에 관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올라가 봤더니 시계가 확 트인 것이 관측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여기서 중대OP, 3A교량, 16교량, 오일펌프 스테이션이 손금 보듯 훤히 보인다. 그리고 침구까지 갖춰져 있어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부수어버렸다.
조금 있으니 추격하던 1소대에서 2명을 사살했다는 교신이 흘러 나왔다. 그렇지만 우리가 찾는 발포지점은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또 어디서도 포를 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작전을 마무리하고 철수했다. 분명 포탄은 날아와 터지는데 발포지점을 찾을 수가 없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수색작전 다음 날. 우리분대에 안캐페스 중턱에 장기매복 명령이 떨어졌다. 주목적은 높은 곳에서 놈들의 야간 발포지점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적을 직접 잡기보다 한국군이 주둔한다는 것을 시위할 의도도 깔려있다. 일부러 병력을 노출시켜 놈들의 침투, 파괴행위를 저지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 사이에는 안캐페스에 매복 나가면 휴양 간다고 한다. 그만큼 위험성이 적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해서 간혹 사기가 저하된 분대를 안캐페스에 올려 보내 쉬도록 배려해 준다.
기지에서 출발하여 땀에 흠뻑 젖은 체 매복지점에 도착했다. 우리가 앞으로 2주간 머물 곳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중대전술지역이 발아래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이다. 멀리 대대CP와 12교량과 빈캐 시(市)가 아스라이 보인다. 우선 주위에 크레모어와 조명지뢰를 설치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적의 이동이 없는 곳이라고 해서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낮 동안은 교대로 눈을 붙일 수 있지만 밤에는 꼬박 뜬눈으로 새워야 한다. 모두들 휴양 간다고들 하지만 매복은 매복이다. 정글에서의 생활이 그리 만만치는 않다. 2주간 철모를 베개 삼아 눈을 부쳐야 하고, 적의 위협만큼이나 야생의 정글은 항상 위험하다.
내가 월남에 오기 한 달 전쯤. 이곳 안캐페스 고지에서 사고가 났다. 매복 중이던 1소대의 병사 한 명이 비명횡사를 했다는 것이다. 낮에 철모를 베고 잠을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서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하필이면 그 아래 전갈이 기어들었던 것이다. 놀란 전갈이 병사의 귀 뒤를 꼬리 끝의 독침으로 쏘았던 것이다. 쏘인 곳이 귀 뒤다 보니 달리 응급조치를 취할 수 없어 급히 헬기를 요청해 후송을 보냈으나 병원에 도착하기 전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이곳 정글에서는 전갈이나 뱀과 같은 맹독성이 있는 파충류뿐이 아니라 산거머리, 개미, 모기도 적잖은 고통을 준다. 우리에겐 위험이 도사린 정글 자체가 곧 적인 것이다.
단조로운 매복생활에서 먹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매복지에서는 불을 사용할 수 없다. 3박4일 매복 작전 시에는 전투식량인 C-레이션 캔을 따서 바로 먹지만, 이곳에서는 요리해서 먹을 수 있다.
고기류, 스파게티, 콩과 미트볼, 콩과 소시지 등은 K-레이션의 분말 고추장을 풀어 찌개를 끓여 먹는다. 물론 찌개를 끓인다고 모닥불을 피울 수는 없다. 바로 적의 표적이 된다. 조리용 불은 흔히 '크레모어 떡'이라고 하는 장약을 이용한다. 못 쓰는 크레모어를 분해하여 장약을 보관했다가 이럴 때 사용한다. 장약은 불꽃이나 연기가 없으면서도 화력도 대단하지만 불이 붙은 체 물속에 넣어도 꺼지지 않는다. 엄지손가락 크기면 캔 하나 너끈하게 끓일 수 있다.
시간을 줄일 겸 가끔 특식을 먹기 위해 계곡으로 보급 확보 작전(?)을 나간다. 말은 계곡이라 하지만 물 한 방울 구경할 수 없다. 간혹 냄비 뚜껑만한 남생이도 잡고 산닭도 잡아와 찌개를 끓여 입맛을 돋운다.
나는 안캐페스 매복 중에 분대장으로부터 한 가지 임무를 부여 받았다. 나보다 1기수 일찍 배속된 최 봉석 상병의 '한글 교육 작전'이다.
최 상병은 처음 전입해 왔을 때, 집에 편지를 쓰지 않더라는 것이다. 장 필호 분대장이 면담한 결과, 아직 한글을 깨우치지 못 했다는 것이다. 강원도 평창 오지 산골에 살아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분대장이 편지를 대필 했는데, 지금부터 편지 대필을 나에게 맡겼다. 그리고 시간 나는 대로 한글을 가르치는 임무도 부여한 것이다. 고졸 학력인 내가 우리분대에서 가방끈이 가장 길다고 ... ,
눈치가 빠르면서 심성이 착한 최 상병은 생각보다 글자를 빨리 깨우쳤다. '기역, 니은, 디귿 ... , 아, 야, 어, 여'를 가르쳐준 지 1주일 만에 웬만한 문장은 구사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문맹에 대한 부끄러움이 컸던가 보다. 경계근무 시간이건, 휴식 시간이건 틈나는 대로 글을 익혔다. 별거 아닌 가르침에 최 상병은 무척 고마워했다.
정글생활이지만 식수를 넉넉히 공급받아 다행이다. 매복지점으로 3일에 한 번씩 헬기로 식수와 식량을 공급해 준다. 헬기가 뜨면 무전으로 좌표를 불러주고 연막을 올린다. 그러면 어디서 날아 왔는지 록 음악 볼륨을 한껏 올린 미군 헬기가 순식간에 나타나 물과 식량을 신속히 떨어트려 준다. 면식이 있는 기총사수인 마이클 병장이 헬기에 걸터 앉아 엄지를 치켜들어 인사를 건넨다. 보급을 마친 헬기는 곧장 떠올라 길게 반원을 그리며 사라진다.
매복지에서도 식수가 공급되는 날은 샤워는 할 수 없어도 수건에 물을 적셔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을 닦을 수 있다. 16교량 기지에는 여전히 적의 포격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도 포탄이 터지는 것은 보이는데 발포지점은 관측할 수가 없다. 이젠 적들의 포 공격이 전과는 달리 1주일에 두 번 정도로 뜸해졌다.
놈들이 봐주는 건지 포탄이 모자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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