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밤이슬에 젖은 추석
팔월 한가위. 군대서 두 번 맞는 추석이다. 특히 이국전선에서 맞는 추석이다. 추석에 술 한 잔 할 양으로 막걸리를 담갔다. 누룩은 본국휴가자들이 갖고 와서 중대나 소대에 보관한다. 명절이 닥치면 분대별로 조금씩 나누어줘 술을 담그도록 한다. 그런 만큼 막걸리는 이국전선에서 좀체 맛보기 힘든 귀한 명절 술이다.
젠장! 추석에 막걸리 한 잔으로 향수를 달래는 것마저 글렀다.
추석 전날부터 4박5일간 매복명령이 떨어졌다. 더욱 애석한 것은 주월 한국 민간인 단체인 한민회에서 추석날 맹호사단 내에서도 우리중대를 방문 했는데, 그때 우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맥주와 김치, 샌드백, 기념 라이터 등 선물을 잔뜩 준비하고, 필리핀 쇼 단까지 대동하여 전통의 맹호 기갑연대 2중대를 찾아왔는데, 정작 주인공들은 정글에 묻혀 있었으니 ... , 애통하다! 결국 대대극장에서 공연을 펼치고 갔단다.
'씨팔! 원님 덕분에 엉뚱한 놈들 나발 뭐 나게 불었겠구나!'
그나마 위안이랄 수 있는 것은 매복지에서 보름달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한성산을 조금 엇비껴서 둥근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보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어머니는 송편을 빚었는지? 동생들은 추석빔이나 얻어 입었는지? 가족들 생각, 행방을 알 수 없는 영아 생각에 심정이 착잡해진다.
새벽녘으로 접어들면서 밤이슬이 많이 내린다. 온몸이 눅눅해진다. 밤 짐승 울음소리와 함께 보름달이 기우나 했더니, 어느 듯 먼동이 뿌옇게 터온다. 이렇게 추석은 이국전선의 정글에서 지나가버렸다.
매복 셋째 날 밤. 오늘따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스산한 밤이다. 장 필호 분대장이 훈장 수여식에 가는 바람에 이번 매복은 소대장과 함께 나왔다. 오늘은 자리를 옮겨 20고지 개울가 둑 밑에 자리를 잡았다. 경계병을 내보내고 크레모어 설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발 총소리가 났다.
"드르륵, 드르륵!"
월남 신병 유 성종 상병이 경계병으로 나간 쪽이다. 최 병장과 자세를 낮춰 뛰어갔다.
"유 상병! 괜찮아? "
유 상병이 덜덜 떨면서 정면을 가리켰다. 그런데 놈들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유 상병이 논둑 근처에서 갑자기 적들이 나타나자 놀라서 그냥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런 등신 같은 놈!'
누에고지에 조명을 요청했다. 놈들은 순식간에 논을 가로질러 정글에 몸을 감추고 이곳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총알이 바람소리를 내며 귓전을 스친다. 납작 엎드렸다. 누에고지에 좌표를 불러주며 박격포지원을 요청했다. 이곳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는 누에고지에서 60mm 박격포를 날리고 있지만 이미 놈들은 멀리 사라져버린 듯하다. 밤하늘엔 조명만 계속 20고지를 밝히고 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난 후에는 언제나 그렇듯 주위는 깊은 물속처럼 고요하다. 이미 우리 위치는 놈들에게 노출되었다. 이제부터 불리한 입장에서 방어를 해야 한다. 언제 기습당할지 모른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피를 말리는 긴장의 연속. 왜 이리 시간은 더디 가는지 ... ,
적진 속에서 적을 놓친 상황, 목구멍이 바싹 타면서 졸음도 오지 않는다. 하천 둑 밑에 엎드려 불안에 떨면서 밤을 하얗게 새웠다.
대대장은 9월 들면서 매복 강화의 달로 정했다. 매복을 강조했지만 별 피해도 전과도 없이 지나가고 있다. 중대병력 전체가 추석도 반납한 채 4박5일간 매복에 임했지만 모두 빈손이다. 우리 분대는 막판에 겨우 걸려든 놈들마저 놓쳐 버렸으니 ... ,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어쨌든 기분 못낸 추석 흉내라도 내야지. OP로 돌아와 담가둔 막걸리 통을 들고 왔다. 뚜껑을 열자 시큼한 식초냄새가 진동을 한다. 제기랄!
술도 다 시고, 모양새도 구기고, 그런들 어쩌겠나.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 별 수 없이 캔 맥주와 럼주를 사와서 뒤늦게 추석파티를 했다.
9월이 지나고 10월 들어서도 어째 분위기가 좀 수상쩍다. 매복 나가라고 못살게 굴던 대대장도 맥이 풀렸는지 별 지시가 없다. 적정도 너무 조용하다. 매복 명령이 없으니 우리야 좋다.
장 필호 분대장이 중사로 진급해서 소대 선임하사로 가버려 분대장이 공석이다. 이 일준 병장은 귀국해 버렸고, 차 경철 병장도 공훈 특별휴가로 본국으로 갔고, 이때 매복 명령이 떨어지면 최 봉석 병장과 둘이서 분대원들을 인솔해야 할 판인데, 아직은 별상황이 없어 다행이다. 기상과 함께 각 개인호의 크레모어 격발기를 점검하고 있는데, 도로정찰조에서 교신이 떴다. 길가에 오토바이 한 대가 넘어져 있다는 것이다. 혹시 부비트랩이 설치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장보존 하도록 하고 소대장과 함께 모두 달려갔다. 가는 도중에 다시 연락이 왔는데 오토바이 옆 농수로에 '붕붕 꽁까이'가 죽어있고, 오토바이 주인은 '붕붕 꽁까이'라는 것이다.
소대장과 현장에 도착해 보니 오토바이는 나뒹굴어져 있고 우리 2중대의 영원한 연인(?) '붕붕 꽁까이'는 등 두 곳에 총을 맞고 죽어 있었다.
흰 아오자이가 피로 붉게 물든 채 도로 옆 농수로에 거꾸로 처박혀 죽어 있는 것이었다. 늘 매고 다니던 가방은 열려있고, 평소 그녀가 온몸에 치렁치렁 달고 다니던 금붙이는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민문제로 보여 월남 경찰에 연락을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월남 경찰은 피살자가 매춘부이다 보니 귀찮게 여기는 눈치다. 물론 이곳이 전쟁터이다 보니 베트콩의 소행인지, 누군가가 금품을 노리고 저지른 강도행각인지 모르겠다.
"아이쿠! 우리 이젠 '붕붕 꽁까이'가 없어 어쩌지?"
"야! 이거 우리 중대 장(葬)으로 치러야 되는 거 아니야?"
"아마 중대원 반은 상복입고 빈소 지켜야 될 텐데, 그럼 전투는 누가 하지?"
"역시 월남에서는 돈 밝히고, 여자 밝히고, 훈장 밝히면 제 명대로 못 산다는 말이 실감나네. 모두 명심 해!"
"하긴 '붕붕 꽁까이'가 돈하고 사내 좀 밝혔지."
'붕붕 꽁까이'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 늦은 아침식사를 하는데 소대 전령이 편지뭉치를 갖고 왔다. 모두 식사 하다가 편지뭉치로 몰려들었다.
본인 편지도 편지지만 일진이 좋으면 '왕건이'도 건질 수 있다. 잘하면 '여대생 미스 리' 위문편지를 챙길 수 있다. 위문편지는 먼저 보면 임자니까 '와' 하고 몰려드는 것이다. 열심히 편지를 보내주며 이제는 '그리운 이에게'로 시작하여 코스모스, 국화 등 꽃송이를 편지지에 붙여서 보내주는 경산의 옥희, 멀리 외국생활을 하고 있는 형이 편지를 보내왔다. 낯선 이름의 부산에서 온 편지는 희영씨의 사촌 여동생에게서 온 것이다.
'소녀, 사촌 오빠의 소개로 실례를 무릅쓰고 펜을 들었습니다.'로 시작되는 편지는, 자신의 키는 160cm이고, 체중은 비밀, 하는 일은 중학교 서무실에 근무 등, 앞으로 좋은 펜 벗이 되고 싶다고 적혀 있다.
끝으로 병제 편지. 병제는 월남생활의 안부를 묻고 영아에게 갔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먼저 삼철이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더니 요즘 영아는 오래전부터 집에 없었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내가 가르쳐 준대로 직장으로 찾아 갔더니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해서, 혹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느냐고 동료에게 물었더니 정확히는 모르고 서울 어디로 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 진정 이게 끝이란 말인가! 내 인생 전부를 걸었던 사랑이 이것인가! 잊어 달라는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나버린 것이 우리 사랑의 전부였다고,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라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허망하다. 세상이 텅 빈 것 같다.'
개인호로 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제 사랑은 떠났다. 너와 나의 사랑은 끝이 나버렸다. 여기서는 어쩔 수 없다. 꼭 살아서 돌아가자. 그래, 영아를 찾아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 이제 너로 인해 더 이상 징징대지 않을 것이다.
32, 슈와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침 도로정찰이다. 우기인데도 오늘은 모처럼 맑다. 기상과 함께 분대원들을 인솔해 도로정찰에 나섰다.
도로 좌우로 2명씩 경계를 하며 가고, 도로에서는 탐침과 금속탐지기로 꼼꼼하게 훑으며 점검해 나간다. 미심쩍은 곳은 경계병이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고 로켓포나 유탄발사기, 개인화기를 집어넣는다.
특히 3A도로는 비포장이기 때문에 신경을 바짝 써야 한다. 16교량까지 갔지만 별다른 사항은 없었다. 정찰 종료와 이상유무 보고를 하고 조금이라도 더 덥기 전에 OP를 향해 걸었다.
'어! 저게 누구야?'
하얀 아오자이 차림에 차랑차랑한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한 아가씨가 대바구니를 안고 저만치 가고 있지 않은가. 늘씬한 몸매에 내리뻗은 실루엣이 환상적이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분대원들이야 따라오든 말든 급히 그녀를 따라 붙었다.
두말없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 그녀의 해맑고 하얀 얼굴에 청순미가 그대로 묻어 있다. 가무잡잡한 여느 월남 아가씨와는 차원이 다르다. 방탄조끼를 걸치고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악귀 같은 군인이 총을 들고 갑자기 나타났으니, 이 앳된 아가씨가 어찌 겁을 먹지 않겠나. 울상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른다.
"헤이! 괜찮아. 괜찮아요. 돈 워리! 유 베리 뷰티풀!"
미군들한테 주워들은 영어들을 마구 지껄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알아듣는지 어떤지 얼굴에 약간 안심하는 빛을 띤다. 너무 예뻐서 껴안고 싶은 충동이 불쑥 솟구친다. 억지로 참고 씩 웃어 주었다. 그리고는 대바구니를 빼앗아 들고 앞장서 가자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그녀는 긴장을 풀고 배시시 웃으며 두 손을 모아 고마움을 표시한다.
"고, 고 홈! 가요. 아가씨!"
가던 길을 그대로 가자면서 손짓을 하며 앞장섰다. 그녀는 한 발 뒤쳐져 따라온다. 분대원들이 휘파람을 불며 뭐라고 고함치며 법석을 떤다.
걸음을 늦춰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나를 소개 했다.
"헤이! 아이 엠 김. 영곤 김, 오케이 김?"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우며 알아들었다는 듯이 약간 고개를 끄덕였다. 월남에서는 학교에서 우리보다 영어를 더 많이 가르친다고 했다. 나의 가슴을 가리켰다가 그녀를 가리키며 이름을 물었다.
"헤이! 아이 엠 김. 유 네임?"
"슈와."
"슈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그녀는 주춤거리며 망설이다가 아오자이 소매 끝으로 손을 약간 내밀었다. 손을 잡고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고개를 살짝 돌린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갑자기 입속에 침이 고이고 남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얼른 가던 길을 가자고 손짓을 했다. 슈와는 부끄러워하며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나란히 걸어 띵하이 마을 입구까지 왔다. 중대 OP가 바로 코앞이다.
위병소 맞은 편, 대민진료소 뒤로 연못이 있고 이 못 둑으로 난 길이 띵하이 마을로 가는 길이다. 이 마을 입구에 그전부터 독립가옥 한 채가 있었다. 슈와는 이 독립가옥을 가리키며 대바구니를 받아 들려고 한다.
'아니, 이렇게 예쁜 꽁까이가 이 마을에 있다는 것을 여태까지 아무도 몰랐을까?'
대바구니를 뒤로 감추며 계속 집으로 가자는 시늉을 했다.
슈와는 난감해 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는 부모인 듯 한 부부, 그리고 동생 셋이 나란히 서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족들은 다가서는 우리를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대바구니를 슈와에게 건네주고 철모를 벗고 슈와 부모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슈와는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물을 마시고 싶다는 시늉을 하자 슈와를 불러 물을 떠오게 했다.
"김 병장님, 조심하세요!"
분대원들이 뒤따라와서 무슨 일이 터질까봐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양은그릇에 떠온 물을 벌컥벌컥 다 마셨다. 슈와에게 양은그릇을 돌려주고 부모에게 두 손 모아 감사의 예를 갖췄다. 그리고 내 가슴과 슈와를 가리키며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슈와, 뷰티 풀! 슈와, 꼬달람!, 아이 러브 슈와!"
그러면서 늘 갖고 다니던 예비 담배 한 갑을 꺼내 아버지에게 건넸다. 동생들에게는 껌과 캔디를 나누어 주었다.
슈와 부모에게 아침을 먹고 다시 오겠다고 밥 먹는 시늉을 손짓으로 해가며 설명을 했다. 부모와 아이들은 무슨 말인가 의아해 한다. 슈와는 알아듣는 듯 웃음을 지우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슈와의 미소를 보니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문 밖에서 기다리던 분대원들이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축하해 준다.
"우와! 김 병장님, 여자 꼬시는데 완전 귀신이네요."
"와! 정말 예쁜데요, 완전 죽여주네요."
아침식사를 마치고 슈와에게 줄 것을 자루에 잔뜩 챙겨 넣고 몰래 나섰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일단 둘러대고 빨리 연락을 하라고 위병근무를 서는 박 동식 상병에게 일러두었다. 슈와네 집은 위병소에서 불과 2, 3분 거리에 있다.
슈와 집에 도착하여 부모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부모는 실내로 안내하여 차를 내왔다. 약간 긴장이 된다. 차를 마신 후 가지고간 C-레이션의 고기류와 과자류, 담배 두 보루, 캔 맥주 따위를 내 놓았다.
아이들에겐 콜라, 볼펜 등 SP 박스에 든 일용잡화들을 한 아름 안겨 주었다. 아이들은 좋아서 소리 지르며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슈와가 어머니와 함께 들어왔다. 분홍색 아오자이에서 박하향이 은은하다. 나는 슈와 부모에게 슈와 하고 사귀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슈와한테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시간 나는 대로 자주 오겠다고 하고는 일어섰다. 슈와 아버지는 나를 은근히 경계하는 눈치였는데, 그냥 일어서니까 웃는 얼굴로 문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전쟁을 하는 국가의 국민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시련을 겪고, 수탈당하는 것도 많다. 특히 외국군이 주둔 한다던가, 외침을 당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여자의 수난시대인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때의 참상을 역사에서 배웠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과 6.25전쟁도 겪었다. 이곳 월남도 마찬가지다. 슈와 아버지는 혹시 내가 슈와에게 흑심을 품지 않았나 의심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절대 주민들에게 강압적인 요구행위를 못하게 했다. 특히 여자관계는 상대방의 의사와 반하는 행위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빈캐 시장의 하우스에서 5불 주고 하는 행위는 괜찮다.
주민들도 대가 없으면 바로 상급부대에 신고해 버린다. 과부촌처럼 C-레이션 한 박스라도 들고 가야 되는 것이다.
나는 시간 나는 대로 슈와 집을 찾았다. 나에게 지급되는 소모품과 전투식량을 아끼고 모아서 갖고 간다. 오래 머물 수 없기 때문에 차를 한 잔 나누고, 서로 얼굴 마주하며 웃고, 아이들에게 '따이한' 말을 가르치기도 하고는 기지로 돌아온다. 이제는 슈와 가족들도 반갑게 맞아주고, 나 역시 영아가 떠나가 버린 텅 빈 가슴에 슈와의 청순한 모습으로 채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휘관의 눈을 피해 슈와 집을 드나든 지 한 달이 지났다. 오늘따라 슈와가 무척 보고 싶었다. 샤워를 하고 선물을 챙겨 슈와 집을 찾았다. 이젠 아이들이 더 반긴다. 슈와 아버지와 마주 앉아 캔 맥주를 따서 나누어 마시고 있는데, 슈와가 미소를 머금고 들어왔다. 슈와 아버지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고, 이어 슈와 어머니가 큼지막한 물그릇과 수건을 들고 와 놓아두고는 나갔다. 슈와가 바라지창을 닫았다. 그 사이로 그녀의 아버지가 언뜻 보인다. 무심힌 듯 앉아 주위를 살피고 있는 것 같다.
슈와가 수줍어하며 나를 침대 쪽으로 오라고 했다. 총과 방탄복, 탄대를 벗어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엉거주춤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아끌었다. 온몸에 전율이 오고 굳어버릴 것만 같다. 그녀는 희고 가녀린 손을 가늘게 떨며 나의 전투복 상의 단추를 풀어 벗기고 런닝셔츠도 벗긴 뒤, 수건을 물에 적셔 온몸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아직 이런 꿈을 꾸어 본 적이 없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로 온몸이 떨린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다시 수건을 적실 동안 바지를 벗었다.
그녀는 나를 살며시 눕히더니 팬티를 벗기고 나의 남성과 허벅지, 발가락까지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몸 닦기를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아오자이를 벗었다. 그녀는 가볍게 떨면서 가만히 내 옆에 누웠다.
"헉!"
숨이 막혔다. 그녀의 입술을 더듬어 깊고도 긴 키스를 했다. 그리고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 지금 이 순간, 나는 죽어도 좋을 것 같다.'
"슈와! 아이 러뷰! 사랑 해. 슈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갑작스런 일에 나는 그저 황홀감에 흠뻑 젖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완연하게 한 몸이 된 것이다. 나는 슈와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빈캐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와 가사를 배우며 결혼 준비를 하고 있는 올해 열여덟 살이다. 월남에서는 이 나이가 결혼 적령기다.
정글화 끈을 매고 담배 한 개비를 빼물었다. 슈와는 어느새 단정한 차림으로 철모를 받쳐 들고 있다. 밖으로 나오기 전 다시 한 번 슈와를 꼭 껴안고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야호! 나는 월남에서 큐피터의 화살을 명중 시켰다!'
33, 3만 불
한 동안 조용하더니 웬 걸? 소대매복이다.
놈들이 무기를 구입하러 똥포 마을로 온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복을 나가 놈들을 잡으라는 것이다.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려 미처 말리지도 못한 옷을 걸치고 매복지에 진입했다. 우리분대는 유방고지에서 똥포 마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앉았다. 아직 분대장이 공석이라 내가 통솔해야 한다. 월남 신병 두 명을 데리고 나가자니 답답한 심정이다. 막 크레모어 설치를 끝냈을 때였다.
"탕!"
2분대 쪽에서 단 한 발의 총성이 났다. 2분대장 유 재철 하사가 크레모어 설치를 하고 매복지점으로 오다 저격을 받아 그대로 나갔다.
유 하사는 파월 동기다. 평소 과묵하고 서글서글하여 분대원들이 잘 따라 주었는데 ... , 참으로 안타깝다. 사람 팔자 한 순간이다. 그런데 저격한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분대는 전사한 유 하사의 시신과 함께 철수하고 말았다.
유 하사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심란하다. 신경이 곤두선다. 날씨마저 비가 오다가 말다가하여 우중충한 밤이다. 이런 밤은 지형에 밝은 놈들이 활동하기 딱 좋은 날이다.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 뭔가 모를 예감에 목덜미에 소름이 쫙 끼친다. 정신을 집중하여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방고지 하단부에서 어떤 물체의 움직임이 보인다. 빗속이지만 물체가 닥아 오는 것이 감지되었다. 혹시 신병들이 실수할까봐 다독거렸다. 가만히 소매를 잡아당겨 꼼짝하지 못하도록 전달했다. 놈들이 확실하다.
크레모어 격발기 안전핀을 뽑고 놈들이 사선 안으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 놈들은 그다지 경계심을 갖지 않고 걸어오고 있다. 모두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다. 드디어 크레모어 사선 안으로 들어왔다. 힘껏 격발기를 눌렀다.
"쾅! 콰쾅!"
놈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대로 갈겼다. 분대원들도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곧바로 OP에서 조명이 올랐다.
"사격중지!"
분대원들에게 사주경계를 지시하고 상황처리를 했다. 세 놈이다. 다른 놈들은 모두 도망 갔나보다. 총과 배낭을 한 곳에 모으고 몸을 뒤졌다.
권총을 찬 놈의 안주머니에서 빳빳한 1백 불짜리 신권 뭉치 세 개가 나왔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상의 안 러닝셔츠 속에 집어넣었다. 권총을 찬 놈은 아마 장교인 듯하다. 상황보고를 했다.
"촌놈 셋 사살, 큰 작대기 둘, 작은 작대기 하나. 이상!"
밤하늘에 조명이 정글을 밝히는 가운데 날이 밝았다. 대대장이 APC와 함께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동안 별다른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특히 어제 저녁에는 2분대 유 하사마저 놈들에게 저격을 당해 잃었으니 얼마나 속이 탔을까. 부글부글 끓던 중에 세 놈을 때려 잡았다니 어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나.
대대장은 감격한 표정으로 손을 콱 움켜쥐고 흔들었다. 몇 번을 칭찬한 후 소대장에게 공훈 상신하라고 지시하고는 적 시체 3구와 노획품을 APC에 싣고 돌아갔다.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OP로 철수했다. 만나는 중대원들 마다 '야! 멋지게 한탕 했네!' 라며 인사를 한다.
분대 벙커로 돌아오자마자 군장을 벗어놓고 내 개인호로 갔다. 품속에 든 지폐 뭉치를 꺼냈다. 분명 1백 불짜리 백장씩 세 뭉치다. '3만 불!'
대검으로 수류탄 박스의 비닐을 잘라 지폐를 돌돌 말아 쌌다. 그리고 벙커에 쌓아둔 마대 하나를 꺼내 모래를 약간 쏟아내고 그 속에 돈뭉치를 넣었다. 다시 제 자리에 끼웠다. 귀신도 모를 정도로 감쪽같다.
샤워를 하고 식사 후 눈을 부치려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질 않는다. '3만 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적을 사살하고 상황처리를 할 때 호주머니도 샅샅이 뒤진다. 정보가 될 만한 것들뿐만 아니라 종잇조각 하나라도 모두 수거한다. 수거한 것들은 모두 정보 분석을 위해 상급부대로 보내게 된다. 뒤지다 보면 월남 화폐 동화(Dong貨)가 나오기도 하고, 가끔 달러가 나오는 경우도 있고, 소량의 아편도 나온다. 아마 비상약으로 쓰는 것인가 보다.
그러면 당연히 상황처리 하는 고참병이 '인 마이 포켓' 한다. 그 돈으로 병사들의 궁색한 월남생활에서 가끔씩 럼주라도 사서 마신다.
'3만 불'. 내 전투수당이 한 달에 54불이니까 평생 월남 전장을 누벼도 못 만질 돈. 거의 우리 돈 1천만 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장정 하루 노임이 300원이니 대구 시내 번듯한 기와집 7, 8채 값으로 넉넉하다.
'난 부자다! 그래, 내가 이역만리 타국까지 끌려와 목숨 바쳐 싸우는데 당연히 그 정도 보상은 받아야지.'
가만히 있으려 해도 입이 자꾸 벌어진다.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어머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돌아가면 편히 모시겠습니다.'
매복을 다녀온 지 이틀이 지났다. 연대 정보참모부로 들어오라는 호출과 함께 헬기를 보내왔다. 중대장도 소대장도 영문을 모르고, 나 역시 영문도 모른 채 단독군장을 하고 헬기에 올랐다. 헬기장에서 정보참모부로 가는 동안 안내 사병은 탄창 케이스와 멜빵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실탄이 장전된 총을 손에 쥐고, 눈에 핏발이선 나를 힐끔힐끔 본다. 전투복 바지에 다림질 하여 주름잡고 다니는 네 놈들 눈에는 내가 야차(夜叉)같이 보일 게다.
정보참모부로 갔다. 문을 열고 경례를 했다. 정보참모는 맞은 편 의자에 앉으라고 한다. 그리고는 당번병에게 차 한 잔을 내오라고 한다. 차를 내올 동안 정보참모는 놈들을 잡을 당시의 상황을 물었다. 소상하게 설명했다. 차가 나오고 한 모금 마시자 정부참모는 대뜸 손바닥을 펴서 까딱까딱 한다.
"어이! 김 병장, 돈 내놔!"
"예~에?"
"내놓으라고. 3만 불!"
"돈요? 3만 불이라고 그랬습니까? 난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요? 호주머니 뒤지니까 동화 몇 푼 나옵디다. 그거 내놓으라면 드리지요. 그런데 3만 불요?"
나는 호주머니를 뒤적여 월남 돈 지폐 두어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소리 나게 놓았다.
"햐! 이 새끼 봐라. 오리발 내미네. 임마! 분명히 3만 불 있었단 말이야. 내놔!"
"나는 평생 10불짜리도 구경 한번 못했습니다. 그런데 3만 불이 무슨 소립니까?"
"야! 이 새끼! 정 이럴 거야? 좋은 말할 때 내놔. 너 그러면 영창에 처넣고 조사할 거야!"
"영창? 그 좋습니다. 제발 영창 좀 보내주십쇼! 총 맞아 뒈지는 것 보다야 시원한 영창에 들어 앉아 있는 게 백번 낫지요."
"너 정말 3만 불 못 봤단 말이지?"
"분명히 없었다니까요. 아니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놈이 무슨 놈의 돈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너 조사해서 나오면 그 때는 각오 해!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어."
"아니, 올 때는 헬기 보내더니 갈 때는 걸어가라는 겁니까? 점심시간인데 밥도 안 줍니까?"
"허! 이 새끼 참!"
정보참모는 기가 안 찬다는 표정으로 당번병을 불렀다. 점심 먹여서 헬기 태워 보내라고 지시한다. 오랜만에 시원한 식당에서 직접 요리해서 먹는 A-레이션을 잘 얻어먹었다. 돌아올 때도 혼자 헬기 한 대를 대절해서 중대OP로 왔다.
중대장도 분대원들에게 3만 불에 대해 물어본 눈치다. 하지만 나에게는 묻지 않았다. 3만 불을 꼭 죽은 놈이 갖고 있으란 법도 없으니까.
연대에 다녀온 지 3일 만에 사단 정보참모부의 호출이다. 욕이 절로 나온다. 어쨌든 거금을 빼앗아 먹을 심보다.
역시 단독군장을 하고 사단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총에 1발 장전하고 자물쇠를 잠갔다. 헬기장에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헌병이 와서 경례를 부치고는 안내를 하겠단다. 짜아식, 바지 주름이 칼날 같다.
사단사령부 녀석들, 햇볕을 못 봐 얼굴이 계집애들 같이 희멀겋다. 저 녀석들은 주말마다 퀴논 시내 나가 김치찌개 사먹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것도 지겨워 냉면으로 떼운다나 어쩐다나.
이곳 녀석들도 나를 보더니 아예 노골적으로 슬슬 피한다. 안내하는 헌병 녀석도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 눈치를 본다. 사단 정보참모 앞에 안내 되었다. 대령 계급장의 정보참모는 인사를 하자마자 돈부터 내놓으라고 한다.
"야! 김 병장. 좋게 말할 때 돈 내놔!"
"아니, 연대에서도 그랬지만 구경도 못한 돈을 왜 자꾸 내놓으라는 겁니까?"
"임마!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이럴 거야?"
"저는 월남 돈 몇 푼 챙겨 술 사먹은 것 밖에 없습니다."
"야! 분명히 3만 불이 있었단 말이야!"
"봤습니까? 그날 놈들에게 노획한 총기와 장비, 그리고 시체까지 그대로 현장에서 대대장님과 같이 온 APC에 실려 보냈단 말입니다."
"빨리 내 놔!"
"아니, 사단에서 일개 육군 졸개한테 돈타령 하는 겁니까? 무슨 돈을 자꾸 내놓으라 하는 겁니까?"
나는 핏대를 세우며 소총 개머리판을 바닥에 내리쳤다. 그러자 약실에 장전된 실탄이 튀어나와 바닥에 또르르 굴렀다. 나는 태연하게 정보참모 발쪽으로 굴러간 실탄을 주워 전투복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어! 이 새끼 봐라! 실탄 장전 했네!"
정보참모는 약간 놀란 듯 했으나 태연하게 말했다.
"이 새끼, 너 귀국할 때 귀국박스 분명히 검열 하겠어. 알았어!"
"예! 유골박스로 안 가고 귀국박스 끌고 가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정보참모는 기가 막혔는지, 막가는 놈한테 봉변당하겠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사단에서도 헬기를 내줘 중대로 돌아왔다.
연대와 사단의 정보참모와의 2연전에서 완승을 거뒀다. 이게 어떤 돈인데, '예' 하고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연대와 사단에서 3만 불 사건을 종결짓고 나자 중대장도 더 이상 나를 의심하지 않는 눈치다. 물론 내가 없는 사이 내 관물함과 개인호를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내가 누군데 그걸 내놓다니 ... ,
'어머님, 5개월만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3만 불 들고 갑니다.'
34, 소총수의 운명
한 동안 뜸하던 매복이 다시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비로 매복 작전이 무척 힘들고 고통스럽다. 나가도 별반 전과를 올리지 못하자 대대장은 몸이 달았다. 모두 군기가 빠져 전과가 없다고 핏대를 세웠다.
9월 들어서면서부터 추석까지 반납한 채 매일 같이 나갔으면 됐지, 얼마나 더 나가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들이 세운 전공으로 중대장, 대대장에게 충무무공훈장까지 타도록 해줬는데 아직 배가 고픈가 보다. 위에서는 그냥 다그치고 고함만 치면 포수 꿩 잡듯이 줄줄이 잡아 꿰어올 줄 아는 모양인데, 부하들이야 뒈지건 말건 ... ,
비에 젖어 말리지도 못한 전투복을 걸치고 3박4일간 매복에서 비만 진창 맞고 초죽음이 되어 OP로 돌아왔다.
"이런, 씨부랄!"
계속해서 내린 비로 개인호, 교통호가 또 곳곳에 무너져 내렸다. 빨리 보수를 해야 눈 좀 붙일 수 있다. 아침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빨리 잠 잘 욕심으로 분대원들 모두 복구 작업에 열심이다.
숨을 몰아쉴 여유도 없이 삽질을 하고 있는데, 누에고지 쪽에 폭음과 함께 포연이 자욱하다. 연이어 총성도 요란하다. 또 놈들이 공격을 한 모양이다. 연장을 내던지고 출동했다.
19번 도로상에는 미군 군수차량들이 놈들의 공격을 받아 꼼짝도 못하고 있다. 더러는 부숴 지고 또는 불에 타고 있었다. 호송하던 무장 헬기 1대와 APC 2대가 반격을 하고 있었다. 누에고지는 놈들이 집중포격을 퍼붓고 있다. 역시 지난 8월과 같이 월맹군 18연대 9대대의 공격이다. 그런데 놈들은 지난번과는 달리 아주 치밀한 전술을 쓰는 것 같다. 20고지 곳곳에 개인호뿐만 아니라 중화기 진지도 구축한 모양이다.
57mm 직사포, 82mm 박격포, B41 적탄통(로켓포), LMG, 경기관총(따발총) 등으로 총공격을 퍼붓고 있다. 3중대와 연대 수색중대가 지원 나왔다. 3중대는 만두고지로 가서 측면 공격을 하고, 수색중대는 소도산 하단부에 침투하여 놈들의 퇴로를 차단 공격하기로 했다.
우리 2개 소대는 전면에서 놈들의 중화기 진지 공격에 나섰다. 57mm 직사포와 경기관총 진지, 그리고 개인호를 분대별로 나누어 공격하기로 했다. 진격을 위해 약간 좌측으로 이동하다가 측면공격을 위해 이동하는 3중대 병력을 만났다.
"야! 땡삐! 영곤아!"
불알친구 필수가 먼저 보고 나를 불렀다. 건강한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서로 손을 굳게 잡은 후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놈들은 좀처럼 공격해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진격, 후퇴 다시 진격을 반복했다. 헬기도 놈들의 대공화기 때문에 근접공격을 못하고, 멀찍이서 로켓포와 캐리버 50을 집어넣지만 놈들의 기세를 꺾지 못하고 있다.
OP의 81mm 박격포와 4.2인치 포 2문이 끊임없이 퍼부어도 별 효과가 없다. 61포대의 105mm 포는 지원요청은 아군과 근접해 있어서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공격해서 제압해야 한다. 화기소대의 60mm 박격포를 들고 와 놈들의 진지를 공격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아군의 공격은 별 진전이 없다. 무전기에서는 비보만 들려온다. 2소대에서 적탄에 하나 둘 쓰러지고 있단다. 지원 나온 3중대에서도 놈들의 완강한 저항에 피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수색중대에서도 몇 명의 사상자를 내고는 주춤하고 있단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조금 전 파이팅을 외치면서 들어갔던 필수가 부축을 받으며 나오고 있다. 옆구리에 큰 부상을 당했나 보다. 피를 흘리며 나오고 있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진다. 내 눈을 의심했다.
"야! 필수야! 필수야! 정신 차려! 임마, 죽으면 안 돼!"
놈들과 대치한 상황이라 꼼짝도 못하고 소리만 쳤다. 눈앞이 캄캄하다. 필수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고개를 떨 군 채 전우들에게 부축 받으며 도로 쪽으로 사라졌다.
'필수야! 죽으면 안 돼! 제발 죽지 마!'
진격명령이 내렸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놈들의 진지를 공격하여 박살내는 것뿐이다. 놈들의 진지까지 접근하려면 얼마만큼의 희생도 각오해야 한다. 낮은 포복으로 밭벼가 자라 무릎까지 덮는 고랑을 지나 감자밭까지 전진했다. 놈들이 유탄발사기를 쏘아댔다. 앞, 뒤, 옆에서 마구 터진다. 바로 코앞에서 한발 터졌다. 폭발음에 귀가 멍하고 열기에 숨이 콱 막힌다. 오른손과 왼쪽 팔목에 통증이 오고 피가 흐른다. 파편이 날아와 박힌 모양이다. 이정도의 부상은 조족지혈이다.
'필수야! 네 원수 내가 갚는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맡겼다. 이를 악물고 기었다. 오른쪽의 박 동식 상병과 왼쪽의 유 성종 상병과 서영조 일병은 겁에 질려 얼굴이 백짓장 같다. 주먹을 들어 보이며 힘을 내라고 격려했다. 최 봉석 병장과 민 경래 상병, 천 기성 일병을 데리고 우측에서 공격하던 차 경철 병장이 부상을 당했다. 일단 모두 후퇴하여 안전지대로 내려왔다. 차 병장의 부상이 심한 것 같다. 어깨와 허벅지에 압박붕대와 삼각밴드로 응급처치를 했다. 우린 차 병장을 남겨두고 다시 공격에 나섰다. 우측은 최 봉석 병장에게 맡겼다.
우리분대장은 훈장 수훈과 함께 중사로 특진하여 소대 선임하사로 있으면서 얼마 전 전사한 유하사의 2분대를 지휘하여 공격하고 있다.
분대장이 없는 우리분대는 백전노장 차 병장이 큰 힘이 되었는데, 저렇게 부상을 당해 버렸으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별수 없이 남은 분대원들을 독려하여 다시 진격에 나섰다. 총탄이 빗발치듯 날아온다.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놈들의 진지가 30, 40m전방에 보인다. 아직 수류탄 투척 거리는 아니다. 양손을 옆으로 벌려 분대원들에게 '앞으로 전진' 신호를 보냈다. 좌우를 둘러보니 감자 잎 하나 흔들리지 않고 모두 신중하게 전진하고 있다. 총탄은 계속 귓전을 스치며 지나간다. 이윽고 놈들의 진지가 약 15m 전방에 보인다. 수류탄을 떼어내 놈들의 진지를 향해 던졌다.
"쾅! 쾅!"
가진 수류탄을 모두 던졌다. 놈들의 사격이 멎고 조용하다. 분대원들에게 공격신호를 보내고 신속하게 접근하여 놈들의 진지 속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놈들의 절규가 들리는 가 했더니 이내 잠잠해 졌다. 놈들의 처절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갈가리 찢긴 놈들, 진지 벽에 붙은 살점과 핏덩이, 피비린내와 화약내가 확 풍긴다.
마침내 우리소대는 중화기 진지와 개인호를 모두 제압했다. 상황처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차 병장을 후송시키고 전열을 정비했다. 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얼굴에 희색이 감돈다. 우리소대는 큰 피해 없이 임무를 완수했다. 이제부터 좌우 분산하여 공격하기로 했다. 수류탄을 사용하지 않은 분대원들로 부터 몇 발 갹출하여 탄창케이스와 멜빵에 달았다. 다시 분대원들을 인솔하여 전진하고 있을 때, 10시 방향 소 정글에 움직이는 물체가 보였다. 그대로 갈겨 버렸다. 분대원들도 엎드려 사격을 한다. 그 사이 탄창을 갈아 끼우고 수류탄 2발을 던졌다."사격중지!"
자세를 낮춰 가까이 가보니 세 놈이 쓰러져 있다. 소대장에게 보고하고 다시 진격해 나가는데, 요란한 총성과 함께 3분대 이 봉석 상병이 당 했다고 고함을 지른다. 바짝 엎드려 가까이 가보니 소대장이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보였다. 그 틈을 타 놈들이 튄다. 모두 일제히 사격을 했다. 세 놈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고 한 놈이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다. 3분대 털보 강 은향 병장이 울부짖으며 쓰러진 놈을 향해 마구 갈겨 대고 있다.
이 봉석 상병은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절명한 채 붉은 피로 초원을 적시고 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 상병의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지 모두 허공을 향해 난사하고 있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들! 모두 죽여 버리겠다.'
친구 필수, 그리고 차 병장, 이 상병의 복수를 꼭 하고 말테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이철우 "안보·입법·행정 모두 경험한 유일 후보…감동 서사로 기적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