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불…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우수상-김영관

입력 2017-10-09 14:34:58

미수의 어머니 두메산골에서 홀로 기거하고 계셨다. 나는 대구에서 반찬 몇 가지를 챙겨 정오가 되어서야 경주 산내에 도착했다. 보름 만이었다.

"어머니 없어요?" 마루문을 밀며 큰소리로 불렀지만 켜진 형광등만 나를 반겼다. 방문 고리를 당겼다. 널브러져 있는 이불이 한방 가득이다. 작은 봉창엔 비닐이 겹겹이 붙여져 보온이 부실한 산골의 슬레이트집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겨울을 나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스멀스멀 가슴을 헤집었다. 어머니는 무릎 관절염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데 지팡이가 돌부리와 실랑이를 벌일 때마다 쉬길 반복했다. '오늘 장날인가?' 중얼거리자 어머니와 단짝인 감나무에 터를 잡은 까치도 우듬지에 앉아 부리를 닦으며 기다리는 눈치다.

"전기료깨나 나오겠다." 푸념을 하며 마루, 마당 전등불을 껐다. 하늘은 잿빛으로 금방이라도 눈이 펑펑 내릴 것 같다. 나는 눈이 내리기 전에 빨리 돌아오기를 빌며 어릴 적 추억 필름을 돌렸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청상과부인 엄마는 우리 사남매를 먹이느라 밤과 낮이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초여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 보따리를 마루에 던지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낡은 대소쿠리에 보리밥이 삼베보자기에 싸여 부엌 천장에 매달려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엌 천장엔 얼룩진 껌정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가 더 고팠다. 엄마가 있을 깨밭에 빨리 가기 위해 지름길인 다랑이논두렁길을 뛰었다. 몇 번이나 휘청휘청 벼논에 빠질 번했다. 저 앞에 초승달 닮은 엄마 등이 보였다.

"엄마 배고파" 소리를 질렀지만 엄마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는 엄마 앞에 버티고 서며 말했다.

"엄마 배고프다니까" 그제 서야 엄마는 애처로이 나를 올려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저녁 장에 갔다 와서 밥해주마." 그리곤 검독수리가 먹이를 쪼듯 호미로 밭고랑을 쪼아대자 밭고랑이 툭툭 신음 먼지를 토했다. 산 그림자 몸집을 부풀리자 엄마는 깻잎, 콩잎, 쑥갓을 담은 함지박을 머리에 얹으며 깊은 한숨을 발등에 뿌렸다.

저녁 장을 향해 가는 엄마의 발걸음은 산죽(山竹)마디처럼 짧았다. 어린 나의 눈에도 걱정이었다. 저 느린 걸음으로 언제 고개 두 개를 넘어 파장 전에 보리쌀을 바꿀지…… 게딱지같은 집집에 호롱불이 들어오고 모기 쫓는 푸른 연기가 마을을 뒤덮는데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동생은 배고프다며 칭얼대다 잠이 들었다. 나는 졸리는 눈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그때 삐딱한 싸리문이 밀리는 기척에 밖을 내다보았다. 엄마는 달빛 속에서 굼벵이처럼 그림자를 끌고 있었다. 아궁이 연기가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나는 눈꺼풀과 씨름하기를 한참, 엄마는 밥상을 마루에 내려놓으며 또 하루를 살아냈다는 신음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보리밥이 뜨거워 목을 빼 올리면서도 숟가락 꽁무니로 된장을 찍어 입안으로 집어넣기에 바빴다. 밥그릇이 비워지고 배가 불러오자 그때야 나는 엄마를 쳐다봤다. 보리밥을 우물거리는 엄마의 물기 먹은 눈에선 달빛이 빤짝이고 있었다. 그땐 알지 못했다. 보리쌀을 바꿀 일념으로 파장(罷場)이 당기는 숨을 턱에 고정하며 고개를 넘었을 어머니의 고난(苦難)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발이 굵어질 때쯤 밖에서 턱턱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어머니는 한 손에 지팡이, 한 손엔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힘겹게 걷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요."

"누고 아비가." 몸이 닿고 나서야 덥석 안긴다. 몸이 지나치게 가볍다. 까만 봉지를 받아 열어보니 김치 두 쪽이 시큼한 냄새를 풍긴다. 어머니에게 내 손으로 한 끼의 밥이라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전기밥솥을 열었다. 밥솥에서 김이 오르자 눈 오는 산골의 겨울은 어둠도 바빠지는지 이른 땅거미가 내려오고 있었다.

"저녁 장사 시간까지 늦지 말고 오소." 하던 집사람의 말이 달팽이관을 맴돌았다. 바쁜 마음을 달래며 어머니와 소찬의 밥그릇을 비웠다. 그릇 두 개를 씻어 선반에 얹으며 말했다.

"밖에 나갈 때는 전깃불은 끄고 다니소." 그러자 어머니는 잠시 나를 쳐다보시더니 넋두리처럼 말끝을 흘리셨다.

"어디 갔다 오면 너무 적적해서 불이라도 켜져 있으면," 사립문 나섰는데 어머니는 야윈 손 풀잎처럼 흔들며, 되뇌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감기 조심하고 집안 편안해라"

부모와 자식의 차이란 이런 것일까? 나는 먹먹함을 이기려 필요 이상 목소리를 높였다.

"마루와 마당 불도 항상 켜놓고 지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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