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경황(景況) 혹은 경황(驚惶)

입력 2017-10-02 00:05:05

대학시절 내가 PC 통신을 처음 시작하면서 가입했었던 동호회가 그룹 동물원의 팬클럽이었다. 그때 당시 동물원 팬클럽은 요즘 아이돌 팬클럽들과는 달리 소규모이고, 동물원의 노래 가사들처럼 친근하고 편안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오프라인에서도 자주 만났었다. 모임에는 의사, 회사원으로 바쁜 생활을 하던 동물원 멤버들도 가끔씩 참석을 했었다. 동물원 멤버들이나 일찍부터 팬클럽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동물원 원년 멤버였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김광석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는 아름다운 추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같으면 '기막힌 이야기 실제상황'과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미스터리 스릴러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지난주에는 김광석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가 증폭되면서 김광석의 부인인 서해순 씨가 마침내 언론에 전면적으로 등장하였다. 언론에 나와서 인터뷰를 하면서 과도한 손짓을 하는 것이나 '저기, 이렇게, 저렇게' 등의 지시할 말이 없는 지시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만, 인터뷰를 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다른 말은 없고 '경황'이라는 말만 남았다는 것이다. 아이의 사망 신고를 왜 하지 않았느냐, 왜 아이의 죽음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느냐, 왜 현장에는 두 종류의 담배가 있었느냐, 왜 김광석이 자살했다고 진술했는가 등등 핵심적인 질문에는 모두 '경황이 없어서 그랬다'는 말로 일관을 했다.

우리말에서 '경황'이라는 말은 두 가지가 있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쓰이지만 의미는 약간 다르다. 하나는 '경황이 있다/ 없다'의 형태로 많이 쓰이며 한자로는 景況으로 쓰는 것이다. 이때의 '경황'은 '정신적'시간적인 여유'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황이 없다'는 것은 다른 중요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쓸 정신적'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정신이 있는 상태에서 여유가 없을 때는 '겨를이 없다'는 식의 표현을 주로 쓴다.) 어쨌든 '경황이 없다'고 할 때는 아이의 사망 신고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어서 정신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사망 신고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또 다른 말은 '경황 중'의 형태로 많이 쓰이며 한자로는 驚惶이라고 쓰는 것이다. 이때의 의미는 사전적으로 보면 '놀라고 두려워 허둥지둥함'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당황스러운 일을 당하여 정신이 나간 상태를 이야기하므로 요즘 신조어 중 '멘탈붕괴(멘붕)'와 가장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서해순 씨가 놀랍고 당황스러운 일을 당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멍한 상태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경황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황 중이어서'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서해순 씨가 쓴 '경황'이 어떤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대구 능인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