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경상북도 입니다] '남보다 낮게 남보다 먼저' 실천한 사람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입력 2017-09-29 00:05:00

'고향….' 떠났던 이들이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 늘 가고 싶지만 마음만 먼저 달려가는 곳. 황금빛 가을 들녘을 가로지르는 열차의 종착역은 바로 고향이다. 한경자 작 '황금들판과 열차'(2016 경상북도 관광사진 공모전 입상작)

경상북도를 이야기하면서 강직한 선비정신과 나눔의 가치를 몸소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솔선수범의 표상이 된 항일 의병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뜨거운 피는 질곡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도 오롯이 남아 지금도 경북의 산과 골, 강과 마을마다 맹렬히 흐르고 있다.

경상도 특유의 끈질긴 근성은 성공의 디딤돌이 됐다. 그 시절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이 무작정 서울 등 대도시로 떠나간 인물들은 왜 그리 많았는지. 돌이켜보면 가난이, 흰 쌀밥에 고깃국 한 번 배 터지게 먹어보지 못한 한이 '경상도 보리 문둥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저 성공하겠다며 이를 악다물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객지의 고생은 산짐승을 피하느라 1시간 넘게 걸리는 등하굣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뛰어다닌 기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맨날 짚신만 신다가 어느 날 고무신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을 세계적인 신발회사 대표로 만든 것도 바로 경상도 사람의 근성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주위에 가장 잘된 사람은 면서기뿐"이어서 성공을 다짐하며 서울로 갔다가 허구한 날 밥과 간장으로 끼니를 때울 때에도, 고향 출신 선배가 써준 추천서 한 장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가 눈물 밥으로 허기를 달래며 주경야독할 때에도 성공을 향한 집념은 커져만 갔다.

남들 중학교 다니던 나이에 사회의 혹독함을 몸으로 배운 소년은 여유만 생기면 고향 돕기를 아끼지 않는 어엿한 기업인이 됐고, "고향 마을 노인회 어르신들이 주신 '감사패'가 가장 소중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찢어지게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동생들 공부를 위해 학업을 접고 서울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던 한 소년은 전날 밤새 잠 한숨 못 이루고 뒤척이며 흘렸던 어머니의 눈물을 지금도 기억한다. '반드시 성공해 나처럼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결국 그 열매를 맺었다.

온갖 비리가 난무하던 때, 청렴을 무기로 삼았던 한 경상도 촌사람은 돈과 관련한 꼬투리를 잡히자 곧바로 사표를 낸 뒤 근거 자료를 들고 오너를 찾아가 전후 사정을 설명해 결국 명예를 회복했다. '사장, 대표, 회장' 등 숱한 직함을 두고는 명함에 '운전자'라고 쓰고 다니는 기업체 대표도 있다. 차별 없이 친구나 동료로 '누구나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세상에 적합한 직책'을 고민하던 중 나온 결론이었다. 유독물질이 가득 담긴 탱크로리 차량에서 사고가 발생하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원들 대신 나선 인물도 있다. '남보다 낮게, 하지만 남보다 먼저'를 실천한 경상도 사람들이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사연도 많았다. 버스 회사를 인수한 친구 삼촌의 "잠시 도와달라"는 요청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고, 부당한 것을 못 참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사장의 부당한 지시에 반항하다 어렵사리 얻은 첫 직장을 잃은 것이 오히려 사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유혹도 많았고 실패도 많았다. 해외 건설 현장으로 나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가산을 탕진한 뒤 피눈물을 삼키며 재기에 성공한 인물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결코 잊지 않았다. 온갖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정신적 자양분이 바로 고향이었음을. 올 추석, 이들은 다시 그리운 내 고향 경상북도를 찾는다.

김수용 기자 ksy@msnet.co.kr

매일신문은 올 추석 특집으로 '내 고향은 경상북도입니다'를 기획해 경북 23개 시'군 단체장으로부터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을 추천받았습니다. 정치인, 기업가, 학자, 운동선수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목록에 포함됐습니다. 많게는 10여 명 이상 추천한 곳도 있어서 누구를 인터뷰해야 할지 결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분야별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걸출한 인물들이었고, 고향 사랑이 누구보다 투철했습니다. 다만 인터뷰 일정과 지면 사정상 지역별로 2명가량만 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일신문은 앞으로도 지역을 빛낸, 지역을 사랑하는 인물들을 꾸준히 발굴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는 것으로 아쉬움과 죄송함을 대신합니다.

인터뷰 대상자를 정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손사래를 치며 마다하는 사람도, 점잖게 몇 차례 사양하다가 급기야 목청을 높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사코 그럴 만한 입장이 못 된다며 하소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추천받은 인물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돌아온 반응들이었습니다. 한결같이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나선다는 말입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취재 기자들은 거듭 취지를 설명하고, 기회가 되는 대로 많은 사람을 소개할 것이라는 변명도 해야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어렵사리 인터뷰에 응해준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 달여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인터뷰가 이뤄졌고, 드디어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를 읽으며 말 그대로 가슴 뜨거워지는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뼈를 깎는 고생 끝에 그 나름 성공을 거뒀고, 그렇게 마련된 시간과 금전적 여유를 고향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는 이들이 이처럼 많았는지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동네, 내 고향 사람이 아니더라도 가슴 먹먹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들의 인생 이야기를 함께 나누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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