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퇴위 앞둔 일왕의 방한 염원, 고마 신사 가다

입력 2017-09-26 00:05:00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일어일문학 문학박사. 국경없는 교육가회 기획홍보특보. 수필가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일어일문학 문학박사. 국경없는 교육가회 기획홍보특보. 수필가

일본 패전 지켜본 아키히토 일왕

즉위 후 피해 입힌 나라 '위령 여행'

대한민국·북한·대만은 방문 못해

고마 신사 참배는 방한 염원 표현

일왕은 1년에 2차례 공무가 아닌 사적인 여행을 한다. 2013년부터 시작했다고 하니 지난 20일의 여행은 여덟 번째의 사적 여행이었다. 이 소중한 시간, 일왕은 일본 내 고구려 왕족을 모시는 고마 신사를 참배했다. 1천300년 전에 '고마군'(高麗郡)이라는 마을을 세운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을 신으로 모시는 곳이다. 다양한 역사를 접하기 위해서 여기를 찾았다고 하는데, 출발 전 전문가를 통해 도래인에 대해 공부를 했으며,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는가?" "고구려인과 백제인은 어떻게 다른가?" 등 약광의 후손인 신사 관리자에게 질문을 할 정도로 한반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역대 일왕 중 고마 신사 참배는 처음의 일이라 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생전퇴위를 앞둔 일왕의 고마 신사 방문에 대해서 혹자는 "한국에 대한 반성과 화해의 메시지"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고마 신사의 방문은 일왕의 뜻을 반영해서 결정했다고 하니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끔 했다.

일본 의회는 지난 6월 9일, 일왕이 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왕위를 물려줄 수 있는 일회성 특례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일본법은 일왕의 재임을 종신제로 규정하고 있어서, 생전퇴위를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요했다. 내년 말경 아키히토 일왕의 퇴임과 나루히토 왕세자의 즉위가 이루어질 것 같다. 83세의 아키히토 일왕은 작년 8월 8일 "점차 진행되는 신체적 쇠약을 고려할 때 몸과 마음을 다해 상징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는 내용의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른바 생전퇴위를 표명한 셈이다.

일왕의 생전퇴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참 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일왕의 생전퇴위 의지 표명은 아베 정권의 개헌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반면 개헌의 지렛대로 보는 시각도 있으니 헌법 개정 추진의 실이 될지 득이 될지, 거미줄처럼 엮인 정치적 함수관계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없다. 그래도 생전퇴위를 말하는 일왕의 마음을 인간적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당시, 히로히토 일왕의 장남인 아키히토 일왕은 11세였다. 일본의 패전을 지켜본 아키히토 일왕은 아버지 시대의 전쟁에 대한 반성을 직접 언급하는 등 평화주의적 행보를 보여 왔다. 1989년 즉위하자 일본군이 피해를 입힌 각국으로 '위령 여행'을 계속했다. 1992년 중국을 방문했으며, 2015년 팔라우, 2016년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를 방문하고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2005년에는 사이판의 한국인 전몰자 기념비를 찾아 참배했다. 공식 일정을 끝내고 갑자기 방문한 것인데 일왕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도 일왕이 아직 가지 못한 세 나라가 있다. 대만, 북한, 그리고 대한민국이다. 대만과는 1972년 일왕이 아직 황태자였을 때 단교되었다. 일왕의 대만 방문은 중국 측의 맹렬한 반발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북한과는 1990년 이래 국교정상화 교섭을 진행하고 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국교를 정상화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집한다. 고로 일왕의 북한 방문 실현은 불가능하다.

아키히토 일왕은 즉위 때부터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친선 관계 증진에 노력하겠다"고 말해왔으며, 직간접적으로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으나 정치적 이유 등으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해서 황태자의 방한을 희망하기도 했다. 2015년 4월 대구에서 '제7차 세계 물포럼'이 열렸을 때, 유엔 '물과 위생에 관한 사무총장 자문위원회'의 명예총재를 맡고 있는 황태자의 방한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아베 총리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단독 정상회담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시점인지라 무산되었다.

여하튼 가까운 미래 이 세 나라를 방문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고로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판단하면서 일왕은 생전퇴위를 선언했다고 보는 바이다.

지난 8월 15일 일본 종전일의 희생자 추도식에서 일왕은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반성'을 언급했다. 3년 전부터 반복해서 언급하는 '반성'이다. 그러니 일왕의 고마 신사 참배는 방한의 염원을 작게나마 대신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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