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금지법 시행 1년] 공직사회는 신뢰 회복…소상공인은 죽을 맛

입력 2017-09-25 00:05:04

청탁금지법 1년을 맞아 꽃 소비가 줄어드는 등 대구 꽃시장은 손님들의 발길이 끊겨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3일 오후 대구 칠성꽃시장에 화환 제작용 나무 지게가 많이 놓여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청탁금지법 1년을 맞아 꽃 소비가 줄어드는 등 대구 꽃시장은 손님들의 발길이 끊겨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3일 오후 대구 칠성꽃시장에 화환 제작용 나무 지게가 많이 놓여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이달 28일 청탁금지법이 시행 1년을 맞는다. 그동안 대구경북의 행정'교육기관 등 공직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업무와 관련한 부적절한 만남이 자취를 감췄다. 행사를 간소화하고 외부 단체나 기관의 협찬과 후원도 받지 않는 분위기가 일반화됐다. 빠르게 적응한 공직사회와 달리 관련 업계는 급격한 매출 감소라는 어려움에 빠졌다. 새로운 메뉴 개발이나 업종 전환 등 변화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에도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는 상황이다. 이때문에 관련 업계에선 지원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화훼'식당은 된서리

22일 오후 2시쯤 대구 북구 칠성꽃시장. 칠성지하차도를 따라 크기와 색깔이 다양한 화분과 꽃들이 진열돼 있었다. 하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생화 도'소매상 30여 곳이 모인 대구 최대 화훼시장이지만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점포 임대' 표지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생화 도'소매상 중 두 곳이 지난해 문을 닫았고 다른 두 곳이 내년 초 임대계약 종료에 맞춰 폐업할 예정이라고 했다.

상인 송경희(60) 씨는 "장사를 시작한 지 올해로 딱 30년째지만 요즘처럼 장사가 안 된 적이 없었다"며 "매출이 지난해의 20% 수준이라 가게를 정리하려는데 이마저도 새롭게 들어올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송 씨는 "지난해만 해도 화환제작용 나무 지게를 서른 개씩 쌓아두기도 했는데 요즘은 어쩌다 화환 주문이 들어와도 한두 개에 불과하다"고 했다.

동구 불로동 화훼단지도 타격을 입은 건 마찬가지다. 경력 20년차 업주 최두성(50) 씨는 "스승의 날이면 각 학교 학부모회에서 50개씩 들어오던 국화 화분 주문이 완전히 끊겼다"며 "9월이면 인사이동으로 난초가 많이 나갈 때인데 주문이 거의 없고 매출은 전년대비 반 토막 수준"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사람들이 5만원 이하의 저가 화환만 찾는데 결국 중국산 조화를 쓰거나 꽃을 재활용하는 업체만 살아남을 판"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요식업계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북구 북대구세무서 맞은편 일식당은 지난 22일 주말을 맞이했음에도 빈자리가 많았다. 업주 박모(41) 씨는 "가장 저렴한 코스에 술을 한잔하면 3만원이 넘다 보니 김영란법 이후 매출이 40%가량 떨어져 시간제 종업원 2명을 내보냈다"며 "이 상태로라면 가게를 닫아야 할 것 같다. 정부가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같은 날 수성구 범어동 한정식 식당의 예약상황판에는 점심 6팀만 적혀 있을 뿐 저녁 예약은 한 건도 없었다. 업주는 "김영란법에 대응해 2만원대 메뉴를 새롭게 출시했지만 매출은 예전의 70% 수준"이라고 했다.

◆공직사회는 안착 분위기

청탁금지법 시행 초기 애매한 기준 탓에 움츠러들었던 공직사회는 조금씩 법에 적응해 가는 모습이다. 입법 초기 '시범사례'로 걸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위축돼 있었지만, 사례가 쌓이면서 법 취지에 맞게만 행동하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한 구청의 고위 공직자는 "지난해 법이 처음 시행됐을 때는 업무 연관성이 없더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속을 줄이고 봤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며 "업무 연관성이 있더라도 각자 돈을 내고 먹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법이 제대로 정착되면 우리 사회가 투명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대구시청 한 고위 간부는 "법 시행 초기 보는 눈이 많아 밥'술 약속을 잡지 않는 주간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업무와 사교를 위해 꼭 필요한 자리에는 간다"며 "법 위반 사례가 쌓이며 처음에는 모호했던 직무 관련성 등 위반 기준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다. 움츠러들 이유가 없어졌다"고 했다.

대구시는 올 8월 을지훈련 때 그동안 관행적으로 민간단체로부터 받아온 과일, 떡, 치킨 등의 격려위문품을 청탁금지법 시행 후 처음으로 일절 받지 않았다. 대구시 관계자는 "청탁금지법 선물 상한액 5만원 이하 기준과 상관없이 아예 법에 관련되지 않으려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대구시는 그동안 위문품을 보내주던 민간단체에 일일이 연락해 "훈련상황실 방문 때 격려만 해주고 위문품은 갖고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구청 공무원은 "식사 자리는 회의 등 업무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마련해야 하는 경우가 적잖다. 그러나 선물에 담으려는 축하, 격려는 말, 글로 대신해도 무리가 없다"며 "오히려 주고받는 양쪽 모두에게 법 위반 소지를 해소시켜준다" "안 주고 안 받는 게 속 편하다"고 말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주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일선 공무원의 경우 커피 한 잔의 작은 호의조차 거절할 수밖에 없어 난감하기 때문이다. 한 구청 공무원은 "입법 초기 민원 때문에 구청을 찾은 한 노인이 음료수 몇 병을 가져왔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며 "결국 노인은 서운한 마음에 화를 내다 음료수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

◆학교'병원도 적응하는 모습

청탁금지법은 교사와 학부모 간 어려웠던 관계도 바꿔 놓았다. 교사들은 학부모와 만나는 날이면 선물을 완강하게 거절하는 일로 곤욕을 치르곤 했다. 반면 지금은 학부모가 교사에게 작은 물건조차 건네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학부모가 자신이 갖고 온 선물을 문 앞에 몰래 놔두거나, 교실 안으로 던지고 가버리면 다시 돌려주느라 고생이었다"며 "청탁금지법 덕분에 학부모로서는 학교 문턱이 낮아졌다고 느끼게 됐고, 담임교사를 더 편하게 찾아온다"고 말했다.

시행 초기 사제지간의 소통이 위축될 것이란 우려도 사라졌다. 학생이 교사에게 캔 커피 한 개를 건네는 것도 처벌될 수 있어서다. 이를 위해 대구시교육청은 지난해 처음으로 스승의 날에 쓸 카네이션비와 학부모 상담주간 지원비를 예산으로 편성해 이 같은 우려를 막았다.

대학가도 청탁금지법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난해 시행 직전 조기취업 대학생에 대한 학점 부여 여부가 논란이 됐으나 대학마다 학칙 개정 등을 통해 현재는 큰 혼란이 없는 상황이다. 대학들이 고교를 찾아가 여는 '입시 설명회'도 간소화했다. 대구의 한 전문대 관계자는 "과거에는 입시설명회 후 회식 자리를 만드는 경우가 관례였지만 지금은 입시설명회를 열고 간단한 기념품 정도만 주는 수준"이라고 했다.

대구 대학병원들의 아침 풍경도 달라졌다. 진료 시간을 앞두고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이 연구실을 돌며 커피를 나르거나 방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사라졌다. 과거에는 진료과장 환송회나 신입 전공의 환영회, 직원 격려 회식 등 각종 모임이 열릴 때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이 제품 설명회를 빙자해 비용을 대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아예 자취를 감췄다.

진료 예약 시간을 앞당기거나 입원 병실을 구해달라는 청탁으로 몸살을 앓던 병원 직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법 시행 초기에는 간간이 이어지던 청탁도 거의 사라졌고, 답례선물도 줘선 안 된다는 인식도 자리 잡았다는 것. 한 대학병원 교수는 "예전에는 진료 예약을 끼워넣으려는 청탁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면서 "이젠 연락이 와도 청탁금지법을 설명하면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