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그만두고 낮은 직급 옮겨 "산다는 건 자기결정권 행사"
우리는 누가 보더라도 멋지고 대단한 자리를 내려놓을 자신이 있는가. 우리는 삶의 가치나 성공의 잣대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소설을 쓰는 판사이기도 했고, 판사직을 떠나 방위사업청의 실무를 담당하는 원가검증팀장으로 옮긴 점이 특이해서 정재민 팀장은 주목받았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정 팀장은 우리 삶의 더 깊은 가치와 방법을 알려줬다. 정 팀장은 포항제철고를 졸업했고 지난 2010년 '소설 이사부'로 제1회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소설 '보헤미안랩소디'로 2014년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판사를 그만두고 직급도 낮춰 방사청 원가검증팀장으로 왔다. 지금까지 후회는 없었는가.
▶법원에서 나온 지 7개월 됐다. 후회는 전혀 없다. 판사 때보다 여건이 좋아서는 아니다. 원하는 일을 지금 안 해보면 오히려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내 삶을 내 의도대로 변화시킨 것에 만족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몇십 년을 살았는가보다 자기가 결정한 삶이 얼마나 되는지가 삶의 길이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하필 방사청이었나.
▶국방부 정책실에서 법무관으로 2년간 일했다. 14년 전 당시 정책실의 유일한 법무관이었고 그곳에서 김태영, 한민구, 전제국, 김규현 국장님들을 모시고 일했다. 일 자체가 재미있었을 뿐 아니라 스케일 큰 일이 흥미로웠다. 그때 연을 맺은 분들과는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가끔씩 만났고, 그러던 중 방사청이 생기자 국방부에서 같이 일하던 분들도 꽤 많이 여기로 왔다. 그러니 내게 방사청은 생소한 곳이 아닌 익숙한 곳이다. 방사청은 무기를 사고, 팔고, 개발하는 일에 관여하는데 여기에 연간 14조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국내법, 국제법, 공법, 사법 등 법리 연구가 수반되며 이는 법원에서 하는 것 못지않게 복잡하고 어렵다. 법무팀이 따로 있기는 하다. 법률가가 직접 팀장을 맡으면 의사결정이 더 빨라진다. 미국 등 선진국 정부에서도 법률가들이 이런 분야에서 일반 행정을 많이 맡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방사청에 가면 내가 혁신이나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이 있었다.
-방사청은 위계질서가 강하고 융화력도 중요할 텐데 적응이 수월했나.
▶판사들은 대개 혼자 일하고 많아 봐야 배석판사 두 명 정도 함께 일한다. 지금 우리 팀 직원이 25명이니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적응하고 있다. 여기서는 어려운 문제를 다각도에서 고민해야 하므로 윗분들도 업무의 위험성을 다각도로 보고받기 원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법률 이슈에 있어서도 직원의 견해를 다 듣고 내 생각을 바꾼 적도 많다. 이곳에서는 매우 큰 예산이 집행되기 때문에 매사에 민감하고 무슨 결정이 이뤄지면 감사 수사가 상시로 이뤄진다. 따라서 여러 번 생각을 하게 되고 의사결정 과정이 굉장히 합리적이다.
-원가검증팀장이라는 명칭이 너무 직접적이다. 그만큼 원가 검증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텐데 원가를 어떻게 검증하는가.
▶우리가 무기를 살 때 그 비용은 수천억원이 넘기도 한다. 상당수 계약에서는 총액 비율에 따라 업체에 이윤을 준다. 그러니 무기를 비싸게 만들어서 납품액이 클수록 업체는 이윤을 더 많이 가져가게 되고 그만큼 세금은 더 쓰인다. 세금을 방만하게 쓸 수 있는 유인이 있다. 국내 다양한 방위사업체의 현장을 찾아가서 원가를 검증한다. 어떤 재료를 썼는지 회계자료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수입가격이 적정한지도 조사한다. 관세를 통해서도 조사한다. 또 노무비와 재료비 등도 검증한다. 가령, 업체가 비용을 1조원이라고 주장했는데 조사를 통해 7천억원으로 밝혀지면 그만큼 세금이 절약된다.
-화제를 좀 바꾸겠다. 소설을 쓴 것은 특이한 이력이다. 판사 업무도 바빴을 텐데 가능했나.
▶11년간 판사로 재직하면서 소설을 2권 썼다. '소설 이사부'의 경우, 넉 달 동안 주말을 이용해 틈틈이 썼다. 또 다른 책은 조금씩 써나가다가 2년 만에 완성했다. 그 소설들이 상도 타고 하니까 '소설만 쓰고 있나'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소설 쓰는 일은 힘들다. 전업 작가들처럼은 못 한다. 취재가 많이 수반돼야 하는 소설은 포기한다.
-소설 쓰는 방법이 있으면 알려 달라.
▶소설에는 딱히 쓰는 방식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특정한 글쓰기 방식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데, 틀에 박힌 방식이 없어서 더 끌렸다. 소설을 쓸 때 막막하긴 하지만 답답하지는 않다. 쓰고 싶을 때 쓰고 막히면 내버려둔다. 나는 경지에 오른 소설가도 아니고 전업 소설가도 아니니 그렇게 한다. 때때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써놓고 그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서로 연결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창의력이 발휘된다.
-요즘 베스트셀러 책들은 내용이 가볍고 편안하고 짧은 경우가 많다. 진지하고 호흡이 긴 책은 인기가 덜하다. 이를 어떻게 보는가.
▶장단점이 있다. 요즘은 심지어 언론조차도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려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을 옹호해주고 꾸짖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내 경우에는 책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 읽는 것인데, 소위 '가벼운 책'을 고른다고 하면 자기 생각을 강화하는 내용일 확률이 높다. 읽으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도 그 효용이 따로 있다. 짧은 책도 읽으면서 위로도 받고 독서의 근력을 기를 수 있으니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문학은 창의성이 필요한 작업인데 원가 검증은 창의적인 것과 상관있나.
▶원가 검증에는 창의력이 많이 필요하다. 무기가 새롭기 때문이다. 가령 선례가 없던 드론에 대해서 그 원가를 어떻게 상정해야 하는가, 어떤 자료가 있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일이다. 또 잠수함을 두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원가를 평가할지 기준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더없이 창의적이다. 첨단무기에 대한 원가 검증은 마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처럼 창의적인 작업이다.
-지금까지 국제재판소, 외교부, 판사 등 재직 경력이 화려하다. 비결이 무엇인가.
▶다소 모호하고 손해날 것 같지만 끌리는 일을 에라 모르겠다고 질러본 것이 오히려 흔치 않은 기회들을 만들어낸 것 같다. 내가 남들보다 더 용감해서는 아니다. 일단 사법시험에 합격했기에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남들보다 혜택을 받은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좀 더 많은 이익을 보고자 자리를 요리조리 따지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법시험 자격증 같은 것 없이 삶 속에 던져져 있는데, 자꾸만 재고 손해 안 보려는 것이 경상도 말로 속 시끄러웠다. 삶의 유한성, 일회성을 생각하며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조금 더 해보는 것에 집중해왔다.
-해보니 그중 뭐가 가장 좋던가.
▶정말 다 좋았다. 판사 때는 존중받으면서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판단할 수 있었다. 방사청에서는 어떻게 하면 국민 세금을 아끼는지 굉장히 숙고하며 궁리한다. 또 여기는 구체적인 판단을 하고 돈으로 딱 떨어지는 결정을 한다. 외교부에서도 국제 관계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배우는 좋은 경험을 했다. 나는 국제법(공법)을 전공했는데 외교부에서 이를 실무적으로 사용할 기회를 가졌다는 점은 큰 행운이었다. 당시 대통령이 최초로 독도를 방문했으며 일본이 소송을 하겠다고 하고 위안부 문제 등이 불거질 때 나는 거기 있으면서 독도에 대한 글도 썼다. 국제재판소에 근무하게 되면서는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해봤다. 외국 변호사들과 같이 일하면서 국제적으로 법률가들의 수준을 체험할 수 있었다.
-방사청 관련 논란이 많았다. 법조인 출신으로서 이런 사안을 어떻게 생각하나.
▶'방산 비리'라는 이름으로 불신이 많다. 내가 여기 온 것도 판사 출신으로 투명성'공정성 측면에서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산 비리는 척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근거 없는 방산 비리 혐의를 무작정 부풀리기만 하는 것은 국익에 해가 된다. 조그마한 문제가 있으면 그 모든 것이 불법과 비리로 인해 잘못된 것으로 단정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최신 무기들은 고장이 잦다. 그렇다고 다 불량이라 하지 않으며 만든 기관 전체를 무조건 범죄자로 낙인찍거나 하지 않는다. 무기 만드는 것은 어렵고 실패가 없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헬기를 만들었다. 헬기는 프로펠러가 돌아가는데도 본체는 가만히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전투기보다도 만들기 어렵다. 이게 무슨 자판기에서 물건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니다. 의도치 않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방사청과 방위사업체의 비리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대기업에서 비리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산업통상자원부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비리가 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방산 회사에서 문제가 생기면 근거가 발견되기 전에도 방사청도 같이 비리를 저지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불필요하게 방사청을 위축시키고 외국 정부가 우리의 무기 품질 수준을 의심하게 해서 국익을 해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어서 조금 더 근거 있는 비난을 해주면 더 좋을 것 같다.
-방사청의 순기능적 역할로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가 무기를 개발하고 국방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우리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전적으로 기여한다. 인터넷과 컴퓨터 모두 처음에는 군사기술에서 유래됐다. 자동차의 최신 자동주행 기능의 상당 부분도 유도무기기술에서 비롯됐고 미국의 우주산업 개발도 국방기술 개발과 연결돼 있다. 이른바 '기술적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 동기요인도 있고 우리만의 기술력도 있고 열정도 있다. 잘만 밀어주면 산업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또 다른 꿈이나 계획이 있나.
▶일단 여기에서 기여를 많이 하고 싶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단 여기서 오래 기여하고 싶다.
-지금까지 과감하게 자기가 가진 자리들을 내려놓고 또 다른 도전을 해온 점이 대단하다.
▶아니다. 아까웠고 그래서 붙들고 살았다. 그동안의 자리들이 별 가치가 없어서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을 활용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나에게는 내 삶이 소중한 것이다. 1년 1년이 빠르고 힘들어진다. 여름도 금세 지났고 이제 찬바람이 부니 출퇴근할 때 타는 자전거를 타고 싶지 않은 마음들, 그런 것들도 하나하나가 다 아깝다. 그러나 계속 이것이 아까워서 저 좋은 것 지나가는 것을 못 잡으면 내 삶이 아까운 것 같다. 다 가지고만 있으면 다른 것이 올 때 그것을 못 갖는다. 과감히 내려놔야 한다. 나도 내려놓을 때 '부장판사까지는 하고 그만둬야 하나' 뭐 이런 식의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일단 부장판사는 하고 다음에…' 자꾸 이렇게 한다면 끝도 없더라.
-요즘 취업난이 심각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생각하며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우리 때에는 나처럼 시골에 있던 사람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대학 가고 거기서 과외도 해가며 학비를 벌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니 내가 조언을 할 입장이 못 된다. 다만, 내 아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공부는 자기 뜻을 세워서 말하기 위한 것이다.' 한 문장이라도 자기 말을 하기 위해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말을 잘하려면 자기 뜻이 뭔지 알아야 하고 자기의 색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다. 나이를 먹으며 바뀌기는 하지만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자기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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