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급 차단에 앞서 애끊는 노래로 견훤군 마음 흔들어 놔
◆이름으로 남은 그날의 진실
시간의 실타래 속에 갇혀 있던 아득한 과거가 현재와 닿으면 역사가 된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흔적은 아무도 모르게 웅크려 있다가 홀연히 나타나기도 하지만, 더러는 그 상처가 너무나 깊어 웅크릴 수조차 없을 때도 있다. 얼마나 깊었으면 1천 년의 세월에도 그 흔적을 지우지 못했을까. 그때의 상처는 면면히 이어온 세월 속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그날의 진실을 전하고 싶어 한다.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에는 견훤과 싸운 왕건이 크게 이김으로써 붙여진 '태조방천'이 지금의 일선교 근처에 있다. 생곡리 앞 낙동강 가에 있는 작은 산은 고려 태조가 머물면서 군영을 차려 전투를 독려한 곳이라 하여 '어성정'(御城亭)이라 한다.
생곡리를 지나면 신기리에 또 하나의 태조산이 있다. 이는 후백제를 정복할 때 왕건이 말을 멈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산 북쪽 5리 초곡의 작은 산 위에 어성정이 있었으며 지금도 진영 터가 남아 있다. 왕건이 군사를 사열할 때 그 수가 많아 대열의 끝이 마을 앞까지 뻗친 곳은 대지미 마을이다. 죽고 죽이는 처참한 현장을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했을 백성들의 아픔이 그 이름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당시의 정황은 호족들의 처신이 애매한 상황이었다. 왕건과 견훤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엇갈릴 수 있음이었다. 왕건의 편에 선 일선군의 호족들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견훤에게 처참한 보복을 당할 수도 있음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는 견훤의 의도였을까. 장사꾼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여보게 자네, 그 말을 들어봤는가? 후백제 견훤왕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 사람,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자가 어디 있나. 헛소리하지 말게."
"헛소리가 아니야. 견훤왕은 지렁이의 화신이라더군. 아무리 화살을 맞아도, 또 칼을 맞아도 강물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멀쩡해진다네."
"그럼 어찌 되는가?"
"어찌 되긴 알아서 줄을 잘 서야지."
이 전쟁에서 반드시 견훤왕이 이길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그들의 말이 신경 쓰였다. 어쩌면 자신을 돕는 호족들에게 보내는 경고일지도 모른다고 왕건은 생각했다. 강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쉽게 왕건을 돕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을 흐려놓고 물고기를 잡으려는 견훤의 속셈이 아닌지 은근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외팔이 털보
주막을 나서 매봉산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벌써 하루해가 서산마루에 걸렸다. 붉게 물든 석양빛을 안고 돌아가는 길에 멀리서 황혼을 등진 한 사나이가 걸어왔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물고기 몇 마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파닥거렸다. 희끗희끗한 수염이 온 얼굴을 가린 사내는 외팔이였다. 왕건과 선궁을 보더니 당황한 듯 멈칫거렸다. 선궁이 인사를 건넸지만, 말없이 지나쳐 버렸다. 민망해진 선궁은 왕건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년 전에 도리사로 흘러들어와 강창마을에 터를 잡은 사람이옵지요. 소문에는 장군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나라에 죄를 지어 숨어 산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사람들은 그를 외팔이 털보라 부르옵니다. 이곳에서 고기잡이도 하고 매를 길들여 사냥도 하면서 근근이 생활하옵지요."
왕건은 주막집에서 들었던 장사꾼의 이야기를 곱씹느라 선궁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들판의 끝을 잡은 산자락에 드문드문 민가가 보였다.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기고 있던 백성들은 멀건 죽 한 그릇 때울 거리가 아직도 남았는지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때 어디선가 메나리조의 구슬픈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구곡간장 사무친 마음을 녹여내듯 들려오는 그 소리는 하늘이 게워내는 빛보다 더 진하게 들을 적셨다. 쉰이 넘도록 전장을 누벼야 했던 왕건의 피폐한 영혼 속으로 노랫가락은 끊어질 듯 이어졌다.
아득히 먼 유년의 그리움에 빠져든 왕건의 마음은 어느새 송악산 언저리에 가 있었다. 해가 지면 돌아갈 집이 있었고 자신의 이름을 다정스럽게 불러주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다. 자꾸만 깊어지는 자신의 눈동자를 느끼며 얼른 정신을 차렸다. 대업을 이루어야 할 그로서는 그런 사소한 감정조차도 눌러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전운이 감도는 들판
이튿날 아침, 왕건의 처소로 능산이 날아들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찾아온 것이냐?"
왕건은 반가운 마음에 능산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자세히 보니 능산의 다리에 마지(麻紙)가 묶여 있었다. 바로 아랫동네인 월곡리 입구에 후백제군의 세작을 잡아 묶어두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자신만이 능산을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누가 능산을 보낸 것일까? 궁금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바로 월곡리로 선궁을 보냈다.
선궁에 의해서 끌려온 자들은 주막에서 본 장사꾼들이었다. 상주에서 왔다는 그들은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해서 한 짓이라며 목숨을 구걸했다. 곧 견훤의 군대가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왕건은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지만,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견훤의 또 다른 계략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기에 신중한 대응이 필요했다. 인근의 각 진영에 파발을 띄워 언제든지 출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지시했다. 숭신산성에 군사들을 배치하고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상주 방향에서 내려오는 적에 대비하려면 나루를 건너 북쪽으로 진을 쳐야 했다. 왕건은 지리에 밝은 김선궁을 앞세우고 김훤술 장군은 주로 향군을 움직이며 병참을 돕도록 했다. 대오를 갖추어 나루를 건너니 들판의 논두렁에 조팝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웠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봄은 어김없이 꽃들을 피우고 시간은 흘렀다.
생곡리를 지나 신기리로 향하는 행렬은 고려의 군사로 끝없이 이어졌다. 강가의 모래톱 언저리에는 해묵은 갈대가 미세한 봄바람에 제 한 몸 주체하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먼 곳으로부터 적의 깃발과 함께 함성이 들려왔다. 적은 먼 곳에 있건만, 갑자기 가까이에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견훤의 선발대가 미리 도착해서 마른 갈대숲 속에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고려군이 방어진을 구축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당황한 왕건의 군사들이 우왕좌왕했다. 그러는 사이에 후백제군의 본대가 합세하여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적의 숨통을 끊어라."
우레와 같은 견훤의 목소리와 함께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견훤이 일선군으로 올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을 몰랐던 왕건이었다. 고려군은 그 기세에 눌려 생곡리까지 밀려났다. 적군과 아군이 뒤엉킨 싸움은 강물을 피로 물들였다. 먼 길을 달려온 견훤의 군대임에도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한차례의 태풍이 지나고 고요해진 전장에는 긴장이 흘렀다. 서로가 대치하고 있는 고요는 태풍보다 더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다.
◆애끊는 노랫가락으로 적의 마음을 묶다
복잡한 인간사에는 관심이 없는 듯 태양은 한눈팔지 않고 제 길을 걸어 서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는 해를 바라보던 왕건은 불현듯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병참을 담당하는 군사에게 마을에 들어가 민가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라 명했다. 그리고 선궁을 불렀다.
"장군, 지난날 들판에서 들었던 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
"그럼 당장 그자를 데려오도록 하여라. 아니니라. 일각이 급하니 능산을 불러 파발을 넣도록 하여라."
왕건의 생각을 알 수 없는 선궁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왕건의 부름을 받은 매는 낙산리 진지를 향하여 힘껏 날아올랐다.
얼마가 지났을까. 도리사 아랫동네 송곡리에 사는 소리꾼 김 노인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도착했다. 목청이 좋아 상여의 앞소리꾼으로 불려다니던 노인이었다.
전쟁에 있어 병참의 보급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퇴로와 보급로가 차단되면 전멸하기 쉽다. 역으로 말하면 적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면 그것은 곧 승리로 이어질 수 있음이었다. 견훤의 병참기지가 강변의 모래톱에 있을 것이라 예상한 왕건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현지 지리에 능한 향군과 본영의 명사수로 이름난 궁수를 잠입시켰다. 그들이 적진을 향하는 동안 적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소리꾼을 등장시켰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민가의 굴뚝에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기약 없이 떠도는 군사들의 심정을 흔들며 한차례의 철새들이 둥지를 찾아 하늘을 날았다. 머나먼 저승길 마지막 이별의 아픔을 절절하게 토해내던 노인의 목소리는 그 대상을 달리하여 전장을 울렸다.
'고향 떠나 흘러 흘러 첩첩 만 리 삼만 리/ 굽이굽이 산굽이에 떠도는 이내 신세/ 내동화 가지 꺾어 백년가약 맺은 임아/ 밥한 사발 아랫목에 고이 묻어 두었는가/ 아궁이에 마른 장작 몇 번만 더 지피오/ 천리만리 돌고 돌아 그대 곁에 가오리니/ 물오른 능수버들 봄바람에 흔들려도/ 처음 먹은 그 마음 변치 말고 기다리소/ 가는 길 잃어버려 행여나 못 가거든/ 꺾어 시든 내동화에 꽃이 피길 기다리오/ 그때쯤에 돌아가리 그때 나를 반겨주오/ 보고즈버 보고즈버 임 생각 간절하여/ 비켜가는 저녁놀에 내 마음만 붉게 타네'.
애끊는 가락은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의 마음까지도 흔들어 놓았다. 감각을 가진 온갖 미물을 취하게 했으니 세상은 텅 비어 오직 노인의 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감은 눈을 오랫동안 뜨지 않았다. 깊은 고요 속에 어둠이 찾아왔다. 왕건은 초조한 마음으로 적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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