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과 장상만은 인파에 끼어 정거장을 나섰다. 꽤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고 공터 밖으로 작은 기와집과 초가들이 자갈이 박힌 푸성귀 밭처럼 어수선하게 뒤섞여 있었다. 가옥들 사이로 나 있는 넓은 길 끝에 웅대하기 그지없는 남문(숭례문)이 보였다. 석조로 된 무지개문 위로, 2층으로 된 우람한 기와지붕은 마치 두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펼치고 포개 앉은 것처럼 찬란했다. 대구의 영남제일문과 모양은 비슷했으나 규모가 컸고, 뚜렷한 기왓골과 양 옆으로 이어진 성곽의 단단함도 인상적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사대문 안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전차를 타고 가라는 서석림의 말과는 다르게 남대문 주변에는 전차가 없다는 것을 계승은 도성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 알게 되었다.
시장했고, 허리가 아팠다. 옷 등판에 숨겨둔 취지문이 훼손될까봐 기차에서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총을 지니고 있는 장상만도 긴장이 풀린 표정이었다. 도성 안을 구경하면서 계승에게 말을 걸거나 난전 앞에서 물건 값을 물어보고는, 대구와 비교하기도 했다.
길을 물어서 전동(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신문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문에서부터 줄곧 길이 넓었고 곧게 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문사는 2층 목조 건물이었다. 안내를 받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므로 복도가 컴컴했다. 양기탁을 뵈러 왔다고 하자, 한 젊은이가 방에서 나와서, 그가 외출했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일러주었다. 계승과 장상만은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양기탁을 기다렸다.
양기탁이 다른 두 사람과 같이 신문사로 들어온 것은 방마다 불이 켜지고 있을 때였다. 물론 계승은 양기탁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2층으로 올라오는 세 사람에게 양기탁을 뵈러왔다고 하니까 그 중 하나가 "내가 양기탁이오." 하고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요?"
"대구 서석림 선생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용익 공을 뵈러왔다고 하면 아실 거라 하셨습니다."
양기탁의 눈이 반짝했다. 둘은 양기탁을 따라 신문 조판실로 들어갔다. 여러 사람들이 조판과 교열을 하는 곳을 지나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계승은 발소리도 낼 수 없었다. 네댓 평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신문을 짜고 있는 광경은 여간 감동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나온 신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지 않는가. 이 협소한 곳에서 번져나가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비분강개하고, 격렬하게 토론하고, 전국토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전깃불이 켜져 있는 것도 놀라웠다. 초량에서 전깃불을 보았지만 신문사에서 활자를 비추는 불빛은 어딘가 섬세해보였다. 대구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였다.
내실에 있는 탁자에 다섯 사람이 앉았다. 계승과 장상만이 이쪽에 앉고 건너에 양기탁과 다른 두 사람이 앉았다. 곧 알게 되었지만 한 명은 신문에 논설을 쓰는 유명한 신채호고 다른 사람은 이준이란 이였다. 계승은 신문을 통해 늘 신채호의 글을 보았지만 그의 나이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국채보상이 이토록 전국을 흔들 줄 몰랐어요."
계승은 양기탁의 말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처럼 들려서, 신문사 조판실을 지나면서 가졌던 위축감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신문에 이름이 실린 출연자만 해도 지금 십만 명이 넘었습니다."
"오호!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신채호가 탁자를 두드리며 경탄했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목숨을 잃었습니까.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저항입니다."
양기탁이 양손을 펴고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 앉은 얼굴이 희고 둥근 이준이란 사람은 고개만 끄덕였는데 어딘가 침통한 빛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계승은 옷 속에 감춘 취지문을 보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옷을 뜯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계승은 이용익 군부대신을 언제 뵐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양기탁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용익 대감은 지금 나라에 없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서석림 공에게 편지를 받았어요. 임계승이라 했소? 이름을 기억하지요. 오늘밤에 바로 경운궁으로 들어가세요."
"제 옷 속에 취지문이 있습니다만."
계승은 자신의 신분을 확인해달라는 뜻으로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등을 가리켰다. 쉰 살쯤 된, 가장 나이가 많은 이준이 손을 저으며 앉으라고 했다. 이준이 약간 턱을 낮추고 긴밀한 어조로 계승에게 속삭였다.
"지금 밖으로 나가서 숭례문 방향으로 걸어가세요. 길은 신경 쓸 거 없어요. 아무 길이나 가면 돼요. 얼마쯤 가다보면 넓은 도로를 만나는데, 그곳으로 전차가 다닐 거요. 전차 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줄곧 가시오. 한참 가다가 광화문이 보이는 곳에서 멈추고,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요. 스무 발짝 걸어가 모자를 벗고 왼손에 들고 있으면 누군가가 나타날 거요. 그 사람을 따라 가시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점점 두려워진 계승은 간신히 예, 하고 대답했다.
"거기서 궁이 멀지 않아요. 왜병들이 많이 깔려 있소. 천연덕스럽게 행동해서 저들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하시오. 자, 일어납시다."
"제게 총이 있습니다. 총을 지니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일어나면서 장상만이 물었다. 이준이 장상만을 돌아보았다.
"그건 이따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보시오. 그리고, 궁에는 한 사람만 들어가야 합니다."
계승과 장상만은 밖으로 나왔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둘은 방향을 가늠한 뒤, 골목을 내려갔다. 얼마가지 않아 넓은 길이 나왔고 그곳으로 전차가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은 대구와는 다르게 청결했다. 장옷을 어깨까지 올린 여자들과 터벅머리의 사내들, 갓을 쓴 이들이 길가에 죽 늘어서 전차를 기다렸다. 한인들보다 오히려 일인들의 수는 적어보였다. 얼마 걷지 않아 느릿느릿 다가오던 전철이 그들 앞을 지나갔다. 둘은 자신 있는 걸음으로 바지런히 전차를 따랐다. 긴장해서 들은 탓인가, 좀전 이준이란 사람이 일러준 길이 마치 지도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거리에 이르자 정말 오른 편 길 끝에 웅장한 대문이 보였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이었다.
이준이 지시한 대로 둘은 첫 번째 골목으로 접어들어서 스무 걸음을 걸었다. 그 골목은 좀 번다했다. 그렇지만 누군가 미행을 하거나 의심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둘은 시장기마저 잊고 초조해 하면서 모자를 왼손에 들고 십여 분쯤 서 있었다.
"아저씨, 절 따라오세요."
애들이 모여 칼싸움을 하고 있는 골목에서 조무래기 하나가 톡 튀어나오더니, 계승과 장상만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계승은 깜짝 놀랐다. 밀정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사방으로 눈을 굴리며 나타날 줄 알았던 터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계승과 장상만은 꼬마에게 사실을 확인할 틈이 없었다. 시커멓게 때 전 무명옷을 입은 꼬마가 저쪽 골목으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대로는 곧았지만 골목은 꼬불꼬불했다. 낮은 구릉을 따라 작은 집들이 빽빽했다. 그러나 일반 가옥 지대는 곧 끝이 났고, 서양식 건물들이 곳곳에서 치솟아 있었다.
"저기 다리가 보이죠? 경운궁에서 경희궁을 잊는 구름다리예요. 저 다리 밑, 두 번째 교각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여긴 으스스해요. 경운궁은 폐하께서 계시는 곳이죠. 길바닥에 침이라도 뱉으면 당장 목이 싹 달아날 거예요."
꼬마는 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는 오던 길로 뛰어가 버렸다.
계승은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저기까지 갈까. 주변을 둘러본 뒤, 둘은 다리 밑을 따라가지 않고 길을 에둘렀다. 지나가는 행인처럼 먼저 서대문 쪽으로 옮겨가서 다리 밑으로 접근했다. 푸른 옷에 짧은 상투를 쓴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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