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 당시 38살…인민군 기관총 뚫고 뛰어 들어 붙잡힌 울진 지도급 인사 구출
"할매요, 도꾸(도끼)는 어딨니껴! 저러다 다 죽겠십니더. 얼릉 도꾸 내놓으시소!"
불타는 울진경찰서를 향해 도끼를 든 38세의 청년이 뛰어들었다. 연합군 폭격기는 끊임없이 공습을 퍼부었고, 북한군이 쏜 총알들은 한낮에도 뚜렷할 정도로 번뜩였다. 총탄이 빗발치는 대로변을 가로질러 경찰서 유치장(당시 교화장)에 다다른 청년은 준비한 도끼로 창살을 마구 찍어댔다. 유치장에 갇혀 꼼짝없이 죽을 일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탈출의 기쁨을 쏟아냈다.
당시 구출됐던 한 인사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울진면 읍내리의 이재동 동지가 뛰어 들어와 교화장의 문을 파괴한다. 사방의 산봉우리에서 쏘는 인민군들의 기관총 소리에 놀라서 우리들은 갈 바를 모른다. 하나님도 무심치 않아서 승리의 날이 왔구나, 혼자 반가운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1950년 9월. 한반도를 뒤덮었던 전쟁의 포화는 어느덧 경북의 끝자락, 울진까지 다다랐다. 남쪽으로 밀려든 북한군은 울진경찰서를 점령하고 그들의 작전캠프로 삼았다.
저항하던 경찰들과 반공단체원, 공무원들은 모조리 잡아다 유치장에 가뒀다. 관리가 힘들어지면 트럭 한 대씩 사람을 태워 늦은 저녁 야산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마침내 27일 연합군의 공세가 울진까지 도달하고 북한군은 인근 산봉우리에 반격 기지를 구축했다. 유치장에 남아 있던 82명은 미처 처리하기 힘들자 불을 질러 타 죽도록 했다.
총탄이 어지러운 전쟁통이라 대로변에는 사람이 얼씬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유치장에 이들을 구하러 갈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얼핏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이들의 구출에 나선 사람이 바로 이재동 씨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씨는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에서 근화여관을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근화여관이 당시 울진경찰서(지금의 울진군청 자리) 정문 앞에 있던 까닭에 북한군의 참상과 갇힌 이들의 고통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심지어 사촌 동생마저 반공청년단 활동을 이유로 유치장에 갇히자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가득 찬 북한군을 상대로 반항할 수도, 행동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950년 9월 27일 오후 4시쯤,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북한군이 경찰서에 불을 지른 채 자리를 비우자 이 씨는 근처 집에서 도끼를 빌려다 유치장에 돌진했다. 화염 속을 뚫고 6개 유치장의 창살을 마구 부숴 안에 갇힌 사람들을 모두 살려냈다.
이때 구출된 사람들은 이 씨의 사촌 동생 이재하 씨를 비롯해 국회의원을 지낸 진기배 씨, 전 경찰서장 김진규 씨, 전 군수 김수근 씨 등으로 이들은 훗날 지역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사촌인 이재하 씨 역시 이후 초대 울진농협 조합장을 맡아 지역을 위해 봉사했다. 38세 청년 한 사람의 용기가 울진지역의 미래를 구해낸 셈이다.
이 씨는 1959년 1월 28일 47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아쉽게도 이 씨의 의로운 행동은 당시 생존자들이 사라지면서 점점 잊히고 있다. 흔한 공적비나 기록물조차 변변치 않은 탓이다. 지역사회의 근현대사 연구와 기록유산 관리가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 씨의 아들 이부형(미국 로스앤젤레스 거주) 씨는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아버님이 참 큰일을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추모 행렬이 얼마나 많았는지 시오 리에 뻗쳤고 월변다리 전체에 만장이 이어졌다"면서 "국가유공자처럼 거창한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버님의 용기가 조금이나마 지역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면 더 바람이 없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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