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전투의 승리와 숭신산성의 마무리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는 신라 외곽인 공산을 비롯해 고창(현 안동)과 강주(현 진주) 등 경상도 낙동강 서부 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다. 927년(태조 10) 공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고려는 죽령만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후백제는 929년 12월 고창을 포위해 죽령을 차단하고자 고창으로 향했다. 이에 맞선 고려가 승리하면서 후삼국 쟁패의 주도권을 잡았다. 한편 후백제는 견훤이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참여한 전투에서 8천 명의 병력이 전사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죽령 길을 통한 고려의 경상도 진출을 봉쇄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하자 30여 군현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다음 달에는 강릉 지역에서 울산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110여 개의 성이 고려에 귀부하는 등 후삼국의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갔다. 이로써 왕건은 통일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고창전투에서 승리한 왕건은 그것이 끝이 아니기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많은 병력을 잃어 독이 오른 견훤이 언제 어디로 다시 치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적을 기다리는 것보다 내게 유리한 곳으로 적을 유인하자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일선군을 떠올렸다. 왕건은 본영을 이끌고 이미 진지를 구축해 놓았을 일선군으로 향했다.
한편, 김선궁은 개경으로 떠났던 왕건을 기다리며 군창과 산성을 짓기 시작했다. 왕건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산성이 마무리되어가던 어느 날, 소백산 자락의 고창에서 한 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끝내고 그 행차가 일선으로 향하고 있다는 왕건의 소식이 왔다. 낙산마을에 3개의 군창이 마무리된 상태에서 4개를 더 지어야 한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군창이 더 필요하다는 것은, 대업을 품은 왕건이 이곳을 요충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선궁은 다시 창고 작업을 지시했다. 고을에는 곧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지긋지긋한 전쟁에 지친 민초들의 가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희망의 불씨는 혼란한 정치로 인해 설 곳을 잃은 지방 호족들의 가슴으로 번졌다.
◆일곱 개의 군창을 돌아보며
하늘이 낙동강 물빛만큼 짙어진 어느 날, 매 한 마리가 유유히 창공을 날고 있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왕건이 일선으로 다시 돌아왔다. 몇 해 전 공산 전투의 처참한 패배를 안고 숨어들었던 그때와 달리 많은 사람이 그의 방문을 기쁘게 맞았다. 자신이 개경으로 떠날 때 소년이었던 선궁은 어느덧 늠름한 청년이 돼 있었다. 햇빛에 그을은 선궁의 얼굴은 더욱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왕건은 김선궁이 지어놓은 군창을 일일이 돌아보며 손으로 두드려 보았다.
"너처럼 단단하게 잘 지었구나. 장하도다."
선궁에 대한 흡족한 마음은 칭찬의 소리가 되어 왕건의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작업이 끝나지 않은 4개의 창고까지 돌아보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창고가 앉은 자리를 살펴보니 북두칠성 자리와 똑 닮아 있었다. 왕건은 창고마다 각각의 위치에 맞는 별 이름을 따다가 붙여주었다. 탐랑, 거문, 녹존, 문곡, 염전, 무곡, 파군으로 창고 하나에도 하늘의 기운을 빌려 뜻을 이루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때의 흔적은 고스란히 이름으로 남아 오늘에 이르렀다. 해평면 낙산리에 일곱 개의 창고가 있던 칠창리가 그곳이다.
선궁은 왕에게 창고보다 산성을 빨리 보여주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왕건과 함께 낙산리 뒤쪽의 가장 가까운 길로 접어들어 냉산으로 행했다. 3년에 걸쳐 지은 산성은 생각보다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었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대를 쌓는 과정에서 큰 바위를 옮기다가 사람이 여럿 다치기도 했다. 애써 쌓아놓은 석축이 장마에 무너지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외부에 경사를 급하게 한 반면 안쪽은 완만하게 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 적군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들판이 보이는 쪽으로 초소를 만들어 주로 서쪽에서 출현하는 적들을 살피기에 있어 용이하게 했다.
산성을 한 바퀴 둘러본 왕건은 그 공로를 치하하는 뜻으로 김선궁과 김훤술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장군의 지위보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더 큰 기쁨이었던 두 장군은 통일로 향한 뜨거운 의지를 다졌다.
◆숭신산성에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다
왕건은 잘 축성된 산성을 보면서 속절없이 당했던 지난날이 생각나 가슴이 먹먹해졌다. '기회를 잡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진즉에 알았다면 그 아까운 장군들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지 않은가.'
왕건은 그날따라 신숭겸 장군이 너무나 그리웠다. 자신으로 하여금 대업의 의지를 다지게 했으며, 실수를 지팡이 삼아 다시 일으켜 세운 주인공이었다. 그의 이름을 보석처럼 이 산 골골이 새겨두리라 다짐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산성의 벽에다 그의 이름 중 '숭' 자를 새겨 넣었다. 이 또한 먼저 간 장군에게 승리의 의지를 다지는 그만의 의식이었다. 덩그러니 써놓은 한 개의 글자가 어색하게 여겨진 왕건은 '겸' 자는 이미 그 쓰임을 정해 두었기에 그의 성씨인 '신' 자를 나란히 새겨 넣었다.
산성의 이름까지 지어놓고 보니 왕건의 흡족한 마음은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넓은 들을 내려다보며 3년 전 그때처럼 그리운 숭겸의 옛 이름 '능산'을 큰소리로 불렀다. 그 순간, 강 건너편 산에서 커다란 매 한 마리가 왕건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왕건은 몇 해 전에 자신이 치료해 주었던 매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앞으로 내민 왕건의 왼팔에 사뿐히 내려앉은 매는 반갑다는 듯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그동안 많이 컸구나. 지난날 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능산의 이름을 불렀더니 그것이 네 이름인 줄 알았구나. 이렇게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준 걸 보니 너도 나를 돕고 싶은 게지?"
매는 왕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이제부터 너를 '능산'으로 불러주마. 대신 내가 부를 때는 언제든지 날아와야 할 것이니라."
몰라보게 성장한 매의 날렵한 날개를 쓰다듬고는 허공으로 날려주었다.
◆낙동강 너머의 들을 둘러보다
매는 왕건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더니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낙동강에 물그림자를 담근 채 우뚝 솟아 있는 산은 매를 품 안으로 들이더니 시치미를 뚝 뗐다. 왕건은 매가 내려앉은 강 건너 남쪽의 산을 눈여겨보았다.
"폐하, 저 산은 매가 앉은 모습과 똑같지 않습니까?"
말없이 지켜보던 김선궁은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그럼 오늘부터 저 산 이름을 매봉산이라 할까?"
"그에 꼭 맞는 이름이옵니다. 폐하."
왕건은 김선궁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매봉산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을 따라 길게 형성된 평야의 허리를 자르며 벌떡 일어나 있었다. 왕건은 매봉산을 잘만 이용하면 승산 있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유리한 싸움을 위해서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함을 백전노장 왕건이 놓칠 리가 없다. 왕건은 산 위에서만 내려다보았던 낙동강 너머의 들을 직접 둘러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적지와 다름없는 그곳으로 나선다는 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왕건은 김선궁과 함께 촌부의 차림으로 괭이를 어깨에 멨다. 마을 앞의 나루를 건너서 들판에 들어서니 빈 논에 파릇파릇 풀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뒤돌아본 냉산은 하늘 높이 우뚝 솟아 그 기운이 들판 곳곳으로 넘쳤다.
강물은 버거운 봄볕을 소리 없이 받아 안고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내려갔다.
'저 강물도 부지런히 흐르고 흐르면 언젠가는 넓은 바다에 도달할 테지.'
왕건은 말없이 흐르는 강물을 보며 긴 전쟁으로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저기 보이는 강창나루에는 일리천(감천)이 흘러들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곳이지요."
선궁은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김천을 거쳐 동쪽으로 내려오는 강의 뿌리 중 하나는 추풍령에 닿아 있고 또 한 줄기는 덕유산 줄기인 민주지산에 닿아 있지요. 소금과 물품을 실은 배들이 낙동강을 이용하여 저곳으로 많이 왕래하는 곳이옵니다."
선궁의 설명을 들으며 걷다 보니 담장 위로 석탑이 보였다. 왕래하는 사람이 많은 나룻가에 터를 잡아 풍요로운 사찰이라는 선궁의 설명이 이어졌다. 낙동강을 마당 삼아 앉은 강락사의 법당에서 향냄새가 진하게 흘러나왔다. 왕건은 선궁을 남겨두고 성큼 안으로 들어가 법당에 향을 꽂았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두 손을 모았다. 언제 따라 들어왔는지 선궁이 법당 밖에 서서 왕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발을 신고 나오는 왕건에게 선궁은 보여줄 게 많은지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대웅전 마당을 가로질러 공양간을 지나는데 언뜻 보이는 한 여인의 눈빛이 눈에 익어 왕건은 잠시 움찔했다. 뒤가 궁금하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보이는 주막집에 가면 장사꾼이 많이 드나드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옵니다."
◆왕건은 선궁이 하자는 대로 응했다.
일리천에는 봄철이라 강물이 많이 줄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혼란한 시기에 몸을 사린 장사꾼의 예민함 탓인지 소문과는 달리 나루는 한가했다. 혼란한 시대를 맞은 사람들은 세상 시름을 막걸리 한 사발로 달래려는 것일까. 나루와는 달리 주막은 시끌시끌했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두 사람은 탁주 한 잔씩 시켜놓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멀지 않아 또 싸움이 시작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농사를 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심하는 그들은 막걸리 한 사발이 자신의 근심거리라도 되는 양 단숨에 들이켜고는 입을 쓱 닦았다. 한쪽에서는 제법 큰 봇짐을 마루에 걸쳐놓은 거로 보아 장사꾼인 듯한 두 사람이 취기가 올라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크게 떠드는 그들의 이야기에 왕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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