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연기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넌 최민수니까
코믹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소화 가능한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쉽다. 코믹 연기를 잘한다는 건 곧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부각시키고 공감대를 형성해 웃음까지 자아낼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다는 말인데, 그래서 코믹 연기가 되는 배우는 어떤 역할을 맡든 '기본 이상'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뒤집어 말해 설득력 있는 코믹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설명은 MBC 수목극 '죽어야 사는 남자'에서 코믹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최민수에게 딱 맞아떨어진다. 남성미를 부각시키며 선 굵은 연기를 주로 했던 배우, 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카리스마'라는 단어에 가려 이 배우가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와 '코믹'까지 가능한 인물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던 이들이 은근히 많다. '죽어야 사는 남자'의 최민수를 보면서 놀란 표정을 짓는 시청자들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과장된 캐릭터 매력적으로 표현하며 극찬
지난 19일 첫 방송을 시작한 '죽어야 사는 남자'는 경쾌하고 밝은 톤이 돋보이는 드라마다. 중동에서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억만장자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한국으로 돌아와 딸을 찾으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보여준다. 극 초반부에는 억만장자 사이드 파드 알리 백작을 연기하고 있는 최민수가 한국으로 돌아와 동명이인을 자신의 딸 이지영으로 착각하고 접근하는 내용이 그려졌다. 이지영이란 동명이인을 배우 강예원과 이소연이 각각 연기하고 그 사이에서 강호림 역의 신성록이 강예원과 부부 사이로, 또 이소연의 불륜남으로 등장한다. 신성록은 '이지영의 아버지'라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최민수를 자신의 조강지처가 아닌 내연녀 이지영의 친부로 착각하고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좌충우돌 소동극의 조건이 잘 갖춰진 내러티브다. 여기에 배우들의 재치 있는 연기, 중심축을 이루는 최민수의 코믹 연기가 더해져 큰 재미를 준다.
애초 이 드라마가 기획될 때부터 '관건은 최민수'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극 중 최민수의 비중은 크다. 말 그대로 최민수는 모든 사건의 핵심이 되는 캐릭터를 맡았으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아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까지 짊어지고 드라마에 출연했다. 최민수가 맡은 사이드 파드 알리 백작이란 캐릭터 자체가 이름만큼이나 잔뜩 과장된 설정으로 도배된 인물이다. 이런 경우, 어느 정도 '오버 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면 보는 이들을 부담스럽게 만들 확률이 커진다. 캐릭터의 매력을 알리고 시청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적절한 수위 조절까지 하며 드라마를 끌고 가야 하는 메인 캐릭터. 자칫 그 몫을 해내지 못했을 때 '최민수 때문에 드라마 망쳤다'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최민수를 그저 '센 연기'만 잘하는 배우로 아는 사람이라면 걱정이 될 법도 했을 터. 하지만 최민수의 '과거'를 아는 이들의 입장은 달랐다. 오히려 오랜만에 만나보게 된 최민수의 본격 코믹 연기에 대한 기대가 컸을 뿐이다.
그리고 '죽어야 사는 남자'의 뚜껑이 열리고 나서 예상했던 대로 최민수의 연기는 극찬을 받았다. 상황에 따라 속도까지 조절해가며 대사 톤을 살려내고 표정과 손짓에도 디테일을 담아 캐릭터의 성격을 단번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능청스럽게 캐릭터를 가지고 노는 모습이 흡사 무대 위를 휘저으며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베테랑 로커처럼 자유분방해 보였다.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로 과장된 설정, '오버 액션'이 필수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이 캐릭터를 드라마에 깨끗이 스며들도록 표현해 냈으니 이거야말로 배우 최민수의 진가다. 드라마가 비키니에 히잡을 쓴 여성을 보여주고 발밑에 코란을 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무리한 설정으로 '무슬림 희화화 논란'에 휩싸여 비난받기도 했지만, 이 때문에 최민수의 연기력까지 비하하는 건 안 될 일이다.
◆1990년대 이후 오랜만의 코믹 연기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과거에도 최민수를 돋보이게 해준 건 코믹 연기였다. 온몸에서 카리스마가 뚝뚝 떨어지는 인물이라 데뷔 당시부터 줄곧 마초 캐릭터를 맡았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배우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틀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부작용을 겪을 수 있는데 최민수는 달랐다. 1980년대 중반 영화 '신의 아들'로 강한 이미지를 어필하며 얼굴을 알렸지만, 드라마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뒤로는 한층 부드러운 면모를 드러내며 시청자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수현 작가의 빅 히트작 '사랑이 뭐길래'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최민수는 몸에 힘을 빼고 김수현식 생활 밀착형 코믹 캐릭터를 표현해 '어떤 연기든 잘하는 배우'라는 호평을 끌어냈다. 구두쇠에다 극심한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잘난 아들' 대발이를 연기하며 시청자들을 '대발이 신드롬'에 빠지게 하였다. 이순재-김혜자 등 쟁쟁한 선배들과의 호흡에서도 한 치 밀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박'을 터트린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이후 최민수는 '결혼 이야기' '미스터 맘마' '가슴 달린 남자' 등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 사이에 '걸어서 하늘까지'처럼 최민수 고유의 터프한 캐릭터가 부각된 드라마가 있었고 1995년에 이르러 '모래시계'가 국민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터프한 연기는 최민수'라는 이미지를 다시 한 번 굳혔다.
최민수의 코믹 연기는 이때를 기점으로 한동안 볼 수 없었다. '모래시계' 태수 캐릭터의 여파가 워낙 거셌던 탓에 최민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마초 이미지에 함몰됐다. '나에게 오라' '피아노맨' '인샬라' '블랙잭' '유령' 등의 영화에서 분위기와 성격은 다르되 변함없이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는 캐릭터를 소화했다.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백야 3.98' '태양의 남쪽' '태왕사신기' 등의 작품에서 역시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배역을 맡았다. 그 사이에 영화 '주노명 베이커리'를 통해 '사랑이 뭐길래'에서 보여준 것처럼 가벼운 느낌의 연기를 하기도 했지만, 그 뒤에도 역시 최민수의 전매특허는 힘이 느껴지는 마초 캐릭터로 한정됐다.
영화 '청풍명월'과 드라마 '태양의 남쪽' 등에 출연하던 2000년대 초반은 최민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초 기질이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최민수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따라 평상시 성격까지 바뀔 정도로 몰입력이 강한 배우로 유명하다. 마침 본인의 원래 스타일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강렬한 캐릭터들이 줄줄이 들어왔고 연거푸 작품에서 센 연기를 한 탓인지 일상에서도 그 강한 기질이 드러나 주변 사람들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현장에서 촬영이 진행될 때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감독의 영역을 침범해 '최 감독'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최민수는 '다루기 어려운 배우'로 낙인찍혔고,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개성을 드러내 '괴짜' 또는 '기인'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드라마 '오만과 편견'으로 MBC 연기대상 우수상 수상자가 됐을 때도 후배 연기자 백진희에게 멘트를 전달해 읽게 하며 상을 고사했다. 세월호의 충격에서 국민이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검사 역할을 맡은 자신이 시상식에 나가 상을 받으며 즐거워할 순 없다는 내용의 멘트였다. 그만큼 최민수가 깊이 캐릭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최민수 스스로 자신의 괴짜 기질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된 듯하다. 공식석상에 나가 "촬영장에서 가장 힘든 게 아이, 그리고 동물 찍기, 또 최민수 데리고 찍기"라는 농담까지 하며 자신을 희화화할 정도로 요즘 최민수는 여유가 넘친다. 잔뜩 힘이 들어간 캐릭터 외에 다시 한 번 코믹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최민수 본인이 가진 마음의 여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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