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칼럼] 신뢰 부족의 한국경제

입력 2017-07-26 00:05:01

서울 출생. 관악고. 서울대 무역학과. 미국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조사국 통화재정팀장. 한은 부설 경제연구원 부원장
서울 출생. 관악고. 서울대 무역학과. 미국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조사국 통화재정팀장. 한은 부설 경제연구원 부원장

타인을 신뢰 못하는 국민 정서

'한강의 기적' 학계서 설명 안돼

위계질서'연고문화가 큰 작용

이제는 창의력 시대 대비해야

한국은 '신뢰 부족 사회'다.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에 따르면 한국인 중 "생면부지의 사람을 대체로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 비율은 26%에 불과하다. 이는 네덜란드(66%), 독일(45%) 등 서구 선진국은 물론 일본(36%), 대만(30%) 등 아시아지역 경쟁국에 비해서도 낮다. 한국 사회의 신뢰 부족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한국 경제 곳곳에 '저신뢰 맞춤형' 구조가 엿보인다.

생계형 자영업과 영세 사업체가 과밀한 기형적 구조가 단적인 예다. 전국의 치킨 점포 수가 전 세계의 맥도날드 매장 수보다 많아 '치킨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다. 또한 종업원 9인 이하의 업체 비중이 92%에 달할 정도로 기업의 영세화도 심각하다. 동업을 하면 과당경쟁도 피하고 규모의 경제도 누릴 텐데 그러지 못하는 이면에는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국민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의 법인 중 동업 형태 기업의 비중이 4%대에 불과한 것이 그 증거다.

또 다른 예는 노사 불신이 초래한 경직적이며 이중적인 노동시장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제도는 고용 보호는 강하되 실업 보호가 빈약한데 이런 특징은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은 국가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국가 간 비교분석의 결론이다. 실제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 따르면 노사관계를 적대적으로 인식하는 정도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63개국 중 두 번째로 높다. 노사 불신 탓에 '기업의 경기 대응 필요성'보다 '부당해고 방지'에 힘이 실려 고용 보호는 강화된 반면 공공재 성격이 강한 실업 보호는 유권자들의 관심 부족으로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기업이 비정규직 채용을 통해 고용의 유연성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나 정규직 근로자가 실업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고용 보호를 낮추는 법 개정에 반대하는 것 모두 지극히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임금이 근로자의 기여도보다 정규직이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되는 이중적 시장 구조이다.

마지막 예는 위계(hierarchy)에 바탕을 둔 기업 간 원'하청 구조이다. 한국의 대기업'중소기업 관계는 일본식 원'하청 관계를 모태로 하지만 신뢰에 바탕을 둔 장기관계라기보다는 위계에 바탕을 둔 종속관계에 가깝다. 그 결과 비록 원청 대기업의 기회주의적 행동이 법적으로 제약받고 있지만 불공정거래에 대한 중소기업의 불만은 여전하다.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른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 행태는 자영업계의 사정도 중소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신뢰 부족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비결은 무엇인가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높을수록 정보의 비대칭 문제가 완화되어 시장거래가 활성화되고 경제성장이 촉진된다는 학계의 정설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지만 경제 개발 초기에는 각종 특혜를 소수의 기업에 집중하고 공권력으로 이들 기업의 경제 활동을 보호함으로써 시장거래 관련 법제 미비를 보완한 정부의 역할이 컸다. 아울러 위계질서와 연공서열에 기초한 기업 문화, 계열화를 통한 기업 간 거래의 내부화 그리고 지연과 학연의 연고문화가 신뢰 부족을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한국민의 남다른 신분 상승 욕구가 고도성장 시기와 맞물려 강력한 경제 유인으로 작용한 점도 무시 못할 요인이었다.

그러나 저신뢰 구조를 유지한 채 경제 발전을 지속하기는 어렵다. 주력산업이 기술 프런티어에 이르러 기술 모방에 의존한 추격 전략은 더 이상 쓸 수 없는 데다 4차 산업혁명시대가 도래하고 있어 창의력 배양이 절실하다. 이는 위계질서로 신뢰 부족을 보완하던 시대가 지났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연고문화로 신뢰 부족을 보완하기도 어려워졌다. 한국민의 신분 상승 욕구는 여전하지만 성장이 둔화되고 계층 간 이동이 정체된 상황이라 연고를 매개로 한 불공정거래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의 예들이 보여주듯이 저신뢰 구조는 이미 여러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사회의 신뢰 부족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경제적 이유는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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