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나서 늘 들르곤 하던 해장국집이 있었다. 언젠가 미국에서 살다 몇십 년 만에 귀국하는 선배를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가 그 집으로 직행해서 해장국을 같이 먹은 적이 있다. 선배는 자신이 한국을 떠나기 전 젊은 시절에 먹던 맛과 흡사한, 자신이 이국 땅에서 사는 내내 그리워하던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서 '언젠가는 이 해장국을 먹으러 다시 고국행 비행기를 탈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몇 년 뒤 그의 말은 실제로 구현되었다.
그 해장국집은 삼시 세 끼를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원래 기사식당 부지여서 널찍한 앞마당이 있었지만 워낙 손님이 많아서 차 대기가 쉽지 않았고 식당 안에서 서로 모르는 손님끼리 합석하는 건 기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와서 땀 냄새 풀풀 풍기며 해장국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셔대는 나 같은 '라이더족'이 이쁠 리는 없겠지만 주인 부부는 늘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들은 지역에서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기부를 많이 하기로도 유명했다. '적선하는 집안에 경사가 생긴다'는 옛말을 되새기게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약 일 년 전 어느 날 바로 그 해장국집에서 6차로 대로 건너 맞은편에 비슷한 간판을 단 가게가 들어섰다. 해장국 전문 체인점이었다. 개업 초기부터 글자 하나가 사람 크기만 한 '착한 가격'이라는 현수막 문구를 내세워 손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해장국에 이쪽 집은 한 그릇 6천원, 저쪽 집은 3천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었다.
내가 먹어보기로는 맛 차이가 있긴 해도 아주 현격한 건 아니었다. 국물이 있는 음식은 양념이며 조미료에 따라 맛이 많이 좌우되고 맛을 특허 낸 것도 아니니 마음먹고 '벤치마킹'을 시도한다면 차별성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비가격경쟁력'인 청결함이나 친절, 분위기, 접근의 용이성 등에서는 두 집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아니 새로 생긴 해장국집이 뭔가 흥분되고 '잘나가는 집'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내 단골 해장국집은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 주차장은 언제든 차를 댈 수 있게 한가해졌고 종업원들의 숫자는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주문 뒤 음식을 내오고 상을 치우는 속도는 비슷했다. 주인이 자원봉사를 하는 사진이 빛이 바랜 채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전과 다름없을 뿐이었다.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주인은 시름이 주름처럼 깊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가격을 낮추지 않고 버텼다. 자신의 양심적 판단에 6천원 이하의 가격으로는 식당이 유지될 수 없고 음식의 질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건 식당 건물이 자신의 소유여서였다. 잘나갈 때 가게를 사둔 덕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해장국집이 있다. 새로운 시장 참여자는 '착한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손해를 불사하고 경쟁력을 확보하려고 애쓴다. 경쟁 상대가 손을 들 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못하면 체인점 본사와 인테리어 업자에게 좋은 일만 하고 말 것이고 큰 손해를 입은 주인은 재기 불능의 상태로 빠지기 쉽다.
오늘도 두 해장국집 앞을 자전거를 끌고 지나다가 '착한 가격'이라는 현수막을 본다. 예전에 비해 글자가 훨씬 흐려지고 찢어진 것을 기운 자국이 나 있기도 하지만 무엇이 착하다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저들은 얼마나 더, 스스로를 찔러 거꾸러뜨릴 저 '착한 가격'으로 버틸 수 있을까.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체인점 해장국집 주인 또한 시름에 겨운 얼굴이었다. 단골 해장국집 주인과 비슷한 나이에 똑같이 저렴한 아웃도어 브랜드의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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