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시인이라면 정거장은 수천만의 이별과 수만 갈래의 미로를 내장한 시간의 육체임을 안다. 정거장엔 아무도 집 짓지 않고 정거장엔 아무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당신이 시인이라면 폐허로 태어나 폐허로 살다가 폐허로 되돌아가는 이 세상 정거장의 아픈 숙명을 안다. 기록이 필요한 이유이리라."(서문)
수만 갈래의 삶의 미로가 얽혀 있는 정거장. 이 정거장의 문학적 기록을 평생 화두로 삼고 살아온 강현국 전 대구교대 총장이 단행본 '고요의 남쪽'을 펴냈다. 문단데뷔 40년 동안, 저자가 겪고 느낀 삶의 궤적이 담긴 자전적 에세이다. 섬세한 감수성과 명증한 언어가 돋보이는 시인의 내면일기이지만 고희를 맞은 기념문집으로서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행간 가득 유년시절 추억과 아픔=자전 에세이라는 고백에서 보듯 이 책의 행간에는 저자의 유년시절부터 까까머리 청소년기까지 다양한 추억들이 잔잔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저자는 1949년 경북 상주시 화남면 임곡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마을 유지 아들의 '쎈 기'에 눌려 울음 속으로 도망치던 '처참한 좌절'의 기억으로부터, 충북 보은으로 중학교 진학, 경상도와 충청도 두 지역의 문화와 언어 차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철봉대만 안고 빙빙 돌았다는 실개천 에피소드는 잔잔한 웃음을 자아낸다. 중학시절 첫사랑의 설렘을 담아 연애편지를 쓴 얘기며 1977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의 사연,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 '캐비닛 세 번째 서랍'에서 빛바랜 수첩을 찾아내고는 한 인간으로서, 가장으로서, 고단한 일생을 살다 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회고담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가고 없는 날들을 따뜻한 목소리로 불러낸다.
◆고난 딛고 양지로…잔잔한 신앙고백=책장을 넘기면서 우리는 곳곳에서 저자의 신앙고백과 만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와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는 아내 덕에 신앙은 생활이었고 힘들 때마다 찾아가 의지하는 안식처가 되었다.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에서는 2006년도 대구교대 총장 선거 당시 출마부터 당선에 이르는 과정의 심경들이 신앙고백 형태로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당시 "폐쇄적이고 무풍지대에 안주하던 학교를 시대의 변천을 선도하는 역동의 캠퍼스로 개혁하겠다는 공약이 표심을 얻은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교내 갈등으로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도 신앙은 그를 든든히 받쳐주는 방패, 산성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3년 불비(不蜚)의 지옥살이' 속에서 저자는 성지순례와 고향의 논밭을 가꾸는 노동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을 다독이고 용서하는 삶의 지혜를 얻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시와반시' 창간, 문학사에 큰 획=이 책은 문학적 자전 에세이 성격을 띠면서 시인의 문학 이야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저자에게 운명이었을 '문학'은 시로, 에세이로, 때론 담론으로 각 파트마다 독특한 빛깔과 향기의 장(章)을 열어간다.
1976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저자는 문인협회장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런 문학에의 의지와 애정은 지역 최초 시 전문 계간지인 '시와반시' 창간으로 이어졌다. 1992년 창간된 '시와반시'는 4반세기 동안 한 차례의 결호도 없이 올해로 창간 25주년, 지령 100호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한국문단사의 불가사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강현국 시인의 문학적 행보에는 수많은 미로를 내장한 정거장이 있었고, 이 책 '고요의 남쪽'은 삶의 애환이 교차하는 시간의 육체, 그 역(驛)들의 내면 풍경이자 고독한 순례기이다.
386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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