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라훌라를 위한 세상

입력 2017-07-14 00:05:00

"소년의 이름은 '라훌라'였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아들.

노인이 된 뱃사공 싯다르타는 자신의 심장이 제멋대로 고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일찍이 겪지 못했던 기쁨과 희망이 그의 몸을 감쌌고 강물 위로 흐르던 그의 마음도 온전히 소년에게로 옮겨갔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겪었던, 결국은 환멸로 남을 그 어리석고 독한 세상의 덫에 자신의 아들 라훌라가 걸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구도자(求道者)로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라훌라의 마음은 달랐다. 싯다르타의 삶은 지겹고 따분하기만 했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호감도 매력도 느낄 수가 없었다. 라훌라의 열망은 늘 숲 밖의 세상을 향해 있었고 그런 그에게 싯다르타는 단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늙고 못난 뱃사공일 뿐이었다. 급기야 라훌라는 드러내 놓고 싯다르타를 무시하고 경멸하기 시작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등장하는 라훌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래 불교에서 말하는 라훌라, 즉 석가모니가 구도(求道)의 길을 나설 때 마침 아들이 태어나자 장애가 생겼다며 탄식했다는 그 라훌라의 이야기와는 같은 듯 조금은 다르게 진행된다.

초심자(初心者) 석가모니에 비해 소설에서 싯다르타는 인생 후반, 구도의 여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뒤늦게 그의 아들을 만나게 된다. 독자들조차 이젠 싯다르타가 더는 길을 잃지 않겠거니 여기며 생각의 매무새를 여밀 때쯤 느닷없이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고는 늙고 주름 깊은 우리의 주인공 성자(聖者) 뱃사공을 다시 칠정(七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린다. 싯다르타는 이미 현자(賢者)였고 용자(勇者)였음에도 라훌라 앞에선 그저 자식 생각에 앙앙불락하는 평범한 노인이 되고 만다. 자(子) 라훌라와 부(父) 싯다르타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그토록 강하고 특별했다. 라훌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싯다르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그리고 이 특별한 라훌라의 능력은 시대를 넘고 공간을 건너 오늘 이곳에서도 여전한 힘으로 우리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이 땅의 수많은 싯다르타들이 어떤 이는 라훌라의 힘으로 버티고, 어떤 이는 라훌라로 인해 무너지고, 어떤 이는 라훌라를 가슴에 간직한 채 기뻐하고 슬퍼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만약 정유라가 없었더라면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더 은밀하게 오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성자든 범인이든 모든 싯다르타는 그들의 라훌라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모든 라훌라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한다. 나만의 라훌라를 위한 특별한 세상은 올 수도 없고 와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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