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선이 만난 사람] 김광규 시인

입력 2017-07-14 00:05:00

"시는 소리와 뜻이 결합된 문학…자주 낭독하면 의미 깨닫게 돼"

시인의 영혼은 맑다. 다채로운 세상사도, 혼탁한 정국도, 소박한 일상이나 벅찬 감동도, 요동치는 마음도 시인의 시를 통해 아름다운 예술로 완성된다. 그건 시인에게 조금의 사욕이나 물러섬이 없기 때문이다. 시를 감상하는 우리의 머릿속은 덩달아 맑아진다. 무심히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계속 읽히는 시가 있다. 그때마다 감동을 선사한다. 시는 짧지만 위대하다.

김광규 시인을 만났다. 그는 1975년 등단한 이후 열 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했으며 4'19의 아픔을 노래한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이미 대중적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시는 언뜻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읽을수록 마음속에 더 큰 여운을 남긴다. 시인은 어떤 삶을 살까. 시를 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후텁지근한 여름 장마철에 김광규 시인과 시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더위를 잊었다.

-시는 세상에 항거하는 소극적인 방법 같다. 시 안에는 번민, 한탄, 심지어 무력함이 자주 보인다. 사랑을 노래하는 시 중에도 아픈 실연과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더 감동적이다. 시는 '한'의 정서를 담은 슬픈 문학인가.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여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시를 잘 쓰지 않는다. 머리띠를 두르고 광장에 나갈 것이다. 물론 정치시, 노동시, 선동시도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수줍음이 있다. 나는 내가 시 쓴다는 사실을 집안에서도 드러내지 않는다. 시를 쓰는 게 인기가 높아지거나 큰 수입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구석방에서 혼자 쓰고 서랍에 감추어놓았다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꺼내서 수없이 고치고 그러다 나중에 발표한다. 나만 그렇지 않고 소위 시를 쓴다는 사람은 모두 그럴 것이다. 외국 시인들과 이야기를 해 봐도 그들 역시 그렇다고 한다. 수줍은 사람이 시를 쓰는 것이다.

-지금까지 천 편에 가까운 시를 발표했는데, 그중에는 시대 상황을 담은 시도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도 혼란의 시기다. 혹시 선생님의 시 중에서 관련된 시가 있는지 궁금하다.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참여했던 것은 대학교 1학년 젊은 시절 4'19였다. 그다음 1979년 부마사태가 일어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는데, 나는 당시 부산대학교 교수였다. 나로서는 학생들이 다치면 안 되니까 막아야 했다. 그때 나온 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다. 이 시는 본의 아니게 4'19와 관련한 대표작이 됐다. 그리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는 작품은 4'19 20주년에 서울대학교신문의 청탁을 받고 쓴 행사시인데, 젊은이들의 저항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때는 신군부 독재 시절이라 잘못하면 붙잡혀 가는 상황이었다. 지난번에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에는 내가 느낀 공분을 2014년 문학잡지에 시로 써서 발표했다. '바다의 통곡'이다. 이 외에도, 경제 현실을 담은 '좀팽이처럼', 현실의 왜곡을 풍자한 '안개의 나라', 부마항쟁을 다룬 '어린 게의 죽음', 정치 현실을 묘사한 '어둠 속 걷기' 등이 있다. '어린 게의 죽음'은 여러 해가 지난 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용되기도 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마지막 구절 중 '늪으로 발을 옮겼다'는 표현에 검열관이 빨간 줄을 그었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그 '늪'은 무엇을 상징했나.

▶늪은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자꾸 빠져드는 곳이다. 대략 40대에 접어들면 사람이 후줄근해진다. 그때는 늪에 무릎까지 빠진 거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늪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시간이 갈수록 자꾸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 결국은 죽는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 사회가 바로 늪 아닌가.

-요즘은 글보다는 영상과 사진 혹은 줄임말이나 신조어를 앞세운 짤막한 시적 표현이 디지털 매체를 통해 확산되며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는다. 시인의 안목으로 어떻게 보는가.

▶예전 우리 선조들은 시를 매우 사랑했다. 그분들은 자주 모여서 시를 짓고 읊조렸다. 그런데 활자 매체의 발달과 함께 낭송문화가 사라졌고, 디지털 매체가 나오면서 이제는 읽는 것도 짧게 줄여 한두 마디 또는 'ㅠ.ㅠ'라고 쓰기도 한다. 시는 소리와 뜻이 결합된 문학이다. 소리 내어 낭독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뜻을 터득하게 된다. 소리와 뜻이 합쳐진 것이 시라는 정의에 따르면 요즘 디지털 매체를 통한 그런 표현들은 시가 아니고 말장난이다. 요즘 정치인들도 사자성어를 만들어 내어 서로 다투곤 하는데 이는 적절치 않다. 젊은이들도 그것을 보고 똑같이 흉내를 내니 한심하다.

-선생님의 시는 교과서에도 많이 실렸다. 우리 교육 현실에서 시는 국어 시험문제의 소재이다. 시의 성격과 주제 등이 정해지고 시는 구절별로 낱낱이 분해되고 해석된다. 정작 시인 본인의 시가 그렇게 해석된 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다.

▶몇 년 전에 '나뭇잎 하나'라는 나의 시가 수능시험에 나왔다. 교직에 있는 제자들이 입시 문제에 내 시가 나왔다고 해서 문제지를 구해 보았다. 모두 다섯 문제가 시에 관한 것이었다. 내 시와 우리나라 고전시가 하나 있었고 그 둘을 비교하는 문제가 나왔다. 질문이 교묘해서 나는 문제 다섯 개를 하나도 못 맞혔다. 우리나라 시험이라는 것이 뽑기보다는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다. 가르치는 것도 그런 식으로 가르친다. 그러니 시라면 학생들이 염증을 느끼게 된다. 유럽 등지의 서구에서는 졸업할 때까지 시 100편을 외우게 한다. 그것을 평생 인용할 수 있다. 서구의 유명 인사들이 고전 시 몇 구절을 인용해 자신의 연설을 빛나게 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시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다. 시 언어 속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인데 시를 쓸 때 반드시 그렇게 중의적인 표현을 담게 되는가.

▶내 경우는 의미를 의도적으로 억지로 넣는 경우보다는 저절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의 다의적, 다층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조시나 축시 같은 행사시의 경우는 좀 다르다. 동기생인 소설가 이청준 씨와 비평가 김치수 씨가 작고했을 때 내가 조시를 썼다. 신문사에서도 가끔 행사시를 요구하는데, 창간 기념과 관련한 시도 의미가 담긴다. 과거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문민정부 수립 기념시' 요청이 와서 쓴 적도 있다. 그런 행사시에서는 의도가 명확하다.

-그렇다면 시를 어떻게 감상하는 것이 좋을까.

▶시는 운율이 있어서 자주 읽다 보면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저절로 외우게 된다. 운율이 뭔지 하나도 모르는 사람도 시를 소리 내 읽다 보면 저절로 율격을 터득하게 된다. 시에 들어가 있는 뜻은 양파 같은 것이다. 껍질을 벗겨도 속이 계속 나온다. 독자에 따라서 속까지 들어가서 '시인이 여기에 담고자 하는 뜻이 이런 거였구나'를 공감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겉만 보고 '아, 이건 양파다!' 하고 더 이상 안 읽는 독자도 있다. 잘 음미해서 소리와 뜻이 결합한, 말하자면 과일로 치면 씨앗 부분까지 들어갈 수 있으면 아주 바람직하다.

-선생님의 시는 유럽, 미국, 아랍, 중국 등 전 세계로 번역되고 소개됐다. 외국 사람들도 시인의 감성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을까.

▶시는 번역이 매우 어렵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번역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 나의 시를 훌륭한 번역자들이 잘 번역해줬다. 영역을 한 사람은 안선재 씨라고 웨일즈 출신 영국인인데, 우리나라에 가톨릭 교단의 수사로 왔다가 한국 문화에 심취해서 자리를 잡고 귀화했다. 그는 우리 문화를 잘 안다. 가령 우리나라의 차 문화를 두고 이야기를 나눠 보면 내가 두 손을 든다. 그 사람이 내 시집을 영어로 번역했다. 첫 번째 번역 시집으로 대한민국 번역상을 수상한 뒤, 2권을 더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작품 가운데 '안개의 나라'가 BBC 라디오 시 낭송 프로그램에 소개되었고 '어느 돌의 태어남'이 미국 국어 교재에 실린 것으로 보아 번역이 잘된 것 같다. 그 후 그는 많은 한국문학 작품을 번역했다. 독일어로도 내 시집이 두 권 나왔는데, 다행히 번역이 잘되어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Frankfurter Allgemeine)와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Neue Zürcher Zeitung) 같은 독일어권 주요 일간지에 큼직한 서평이 실리기도 했다. 역자를 잘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덮어놓고 많이 번역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 시는 10개 국어로 번역이 됐다. 시는 일단 언어의 장벽을 넘으면 국경을 넘어 폭넓게 수용되는 보편성을 갖는다.

-우리나라 시가 유독 번역이 어렵지 않나 싶다. 가령 '사뿐히 즈려밟고' 등을 외국어로 번역하기 쉽지 않을 텐데, 이 때문에 외국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해외 진출이 힘들 거 같다.

▶사실이다. 그러니 좋은 역자를 양성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이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몇 명 나왔다. 수상자들의 작품을 번역한 역자들은 일본에 와서 일본 문화에 매료돼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기가 막히게 번역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지금 한국문학번역원 같은 기관에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는 젊은 작가들 가운데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나올 것이다. 서두른다고 금방 될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달리 외국 문학상 수상에 대해 관심이 많다. 요즘에도 누가 뭐 받았다고 하면 깜짝 놀라곤 하는데, 때가 되면 뜻밖의 수상 작가가 나타날 것이다. 그때를 기대해 본다.

-선생님의 시는 짧은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일부러 어렵지 않은 시를 쓰시는가.

▶보통 독자가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쓰려고 수없이 관찰하고 고민을 거듭하고 또 수정한다.

-그렇다면 시를 쓸 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도 궁금하다.

▶시를 쓰려면 처음에는 아주 오랫동안 관찰 또는 응시를 해야 한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그것이 나중에 시가 된다. 관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자기가 관찰한 것과, 체험, 그리고 생각과 느낌이 한데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게 언어로 표현되면 바로 시 몇 줄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시를 쓰는 과정을 묘사한 시가 '새와 함께 보낸 하루'다.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것이 행복해 보인다.

▶그렇다. 짧은 텍스트지만 시 한 편을 끝낼 때까지 수없이 고친다. 한 20번 이상 고치는 것 같다. 다 되고 나면 행복하고 기분이 좋아서 포도주를 한잔하기도 한다. 나는 시를 쓸 때 원고지나 백지에 쓰지 않고 달력 뒷면이나 프린트 이면지처럼 주변에 굴러다니는 종이에 쓴다. 종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메모를 한다.

-선생님의 시 중에 부인을 언급한 시가 있다. 부인과는 대학 동기동창이고 금년이 금혼이라고 들었다. 문학 얘기가 잘 통해서 좋겠다.

▶'춘추'라는 아주 짧은 시에 나온 대로, 봄에서 가을까지 한 편의 시를 쓰기도 한다. 아내가 방을 치우러 들어왔을 때 달력 이면지가 굴러다니면 나의 시 쓰는 스타일을 아니까 함부로 버리진 않는다. 평소 내가 잘 안 보여주니까 이럴 때 미완성의 시를 읽다가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이렇게 말하려고 한 게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아내와 함께 한-독 문화교류행사를 주관할 때는 엄청나게 서류 작업이 많았다. 아내가 사무적인 일을 도맡아 주었다. 독일의 작가, 또는 저명한 독문학자와 공역으로 나의 시집을 2권 독일에서 출판했고, 한국문학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분주한 삶 속에서 틈틈이 싸우기도 하려니 아주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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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통곡

김광규

이리호 호반에서 혹시

존 메이너드를 만나보았나

디트로이트와 버팔로를 왕복하는 페리선

조타수 존은 갑자기 화염에 휩싸인 배를

죽음 무릅쓰고 호반에 안착시켜 승객들

모두 구하고 자신은 조타실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의 몸은 백여 년 전에 연기로 사라졌으나

그의 혼은 지금도 청동 기념판 속에 살아 있다

치욕스럽구나 영혼을 잃고 육신만 남은 무리들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 침몰했을 때

삼백여 승객 물결 사나운 맹골수로에 버려둔 채

자기들만 구명정 타고 육지로 도망친 선원 팀

승객의 귀중한 목숨보다 선주의 검은돈을 위하여

선박의 평형수와 무게중심을 팔아먹고

가라앉는 배 속에 아이들 가두어 죽이고

침묵의 장막 뒤로 숨어버린 무리들

도저히 인간으로 용납할 수 없어

분노와 절망이 온 땅을 뒤덮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우리 모두를 면목없게 만든

그들이 우리의 동포가 아니라고

짐승만도 못한 어른들이라고

욕설만 퍼부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 애타는 스마트폰 교신도 보람 없이

목숨 잃은 어린 영혼들 너무 불쌍해

실종된 육신이라도 어서 돌아오라고 우리는

목메어 절규하는 수밖에 없는가

조금 사리 때맞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밀려왔다 물러가는 파도 앞에서

통곡하는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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