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험한 나무, 한 품은 여인…달빛에 물든 전설 주렁주렁
전설은 상처의 증언이다.
주인공은 항상 앓았다. 몸과 맘에 치료가 필요했다. 깨지고 멍들며, 쓰리고 아렸다. 헐고 짓무른 상태의 삶이었다.
배경은 주로 밤이었다. 짙은 안개를 미장센으로, 원한(怨恨)을 낳는 사건이 펼쳐졌다.
마무리는 욕심을 응징하는 교훈이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단죄가 이야기 속에서 이뤄졌다.
삶의 상처가 상상으로 아물었다. 전설은 약자들의 한풀이이자 진통제 같은 판타지였다.
실패·좌절 이겨내려 한 민초
돌·나무 등 실물 이야기 전해
◆기묘한 이야기 속으로
"옛날 옛적 한 마을에~." 여름이면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 떠오른다. 지역마다 전해지는 옛날이야기를 담았다. 원한으로 구천을 떠도는 하얀 소복의 귀신이 기억에 남았다. 억울한 사연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이 드라마는 1977년에 시작해 1989년까지 578회에 걸쳐 안방극장을 찾았다. 이후 1996~1999년, 2008'2009년 여름 납량물로 부활했다. "이 이야기는 OO지방에서 전해져 내려온 전설로~"라는 마무리 해설로 유명했다.
전설은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 무서움의 근원은 실패이다. 주인공이 어려움에 부딪혀 좌절한다. 거대한 자연이나 불합리한 사회, 탐욕적인 인간 등에 의해 무릎을 꿇는다. 불행과 폭력에 맞서며 대결하지만, 결국 지게 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이야기 속 주인공과 같이 안타까워하는 이유이다.
예부터 전승해 내려온 이야기를 설화(說話)라고 한다. 그 안에 신화(神話), 민담(民譚) 등과 함께 전설이 있다. 신화와 민담은 각각 영웅과 민중의 승리를 담았다. 반면 전설은 패배하는 이야기인 점이 다른 점이다. 신화와 민담의 낙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처한 세계를 비극적으로 인식한 결과이다.
전설은 지역적이다. 전설이 민족 차원에서 전해지는 신화와 범세계적인 성격의 민담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전설에는 지역마다 실물이 있다. 이야기의 증거처럼 돌과 나무. 인물, 건물, 지명 등이 실제로 존재한다. 비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나 신비한 기운이 있는 사물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전설에는 반전이 있다. 숨겨졌던 인물이 더 뛰어나고, 비범한 인물이 실패하는 등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대를 깨뜨린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반영돼 있다. 민중은 이야기를 통해 복수했다. 좌절했던 역사적 경험을 승리로 바꾸려는 바람이 담겼다. 지역의 인물과 역사에 허구를 더했다. 그 허구에는 실패를 이겨 내려는 의지와 현실을 고발하는 의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바위에 담긴 교훈과 역사
전설 중에는 바위와 관련한 내용이 유독 많다. 지역마다 특이한 모양의 바위에 이야기가 더해졌다. 욕심을 응징하는 교훈과 장수(長壽)를 바라는 기원 등을 바위에 빗대어 전한다. 긴 세월을 견딘 바위와 함께 전설이 살아있다.
▷경북 영주 풍기읍의 한 마을에 금계바위 전설이 있다. 마을 뒷산에 닭 모양의 바위가 있다. 이를 금계바위라고 부른다. 현재 이 바위 주변에 수정 조각돌들이 흩어져 있다. 옛날, 이 바위 가운데에 금이 묻혀 있었고, 닭의 눈 부분에 두 개의 빛나는 황금이 박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바위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었다는 것.
그런데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한 나그네가 바위의 황금을 빼내려 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가파른 절벽을 간신히 기어 올라갔다. 닭 머리 부분에서 나그네는 망치와 정을 꺼내 닭 눈동자를 쪼기 시작했다. 그러자 닭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눈의 황금이 떨어지자 하늘에 먹구름이 덮였고, 벼락이 쳤다. 벼락 탓에 바위 일부분이 무너졌고, 나그네는 바위에 깔려 숨졌다. 이후 마을은 가난해져 생활하기 어려워졌다. 마을 사람들은 금계바위를 모시며 용서를 빌었다.
▷영양의 선바위와 남이포 전설도 빼놓을 수 없다. 반변천이 흐르는 입암면에 기암절벽의 선바위가 있다. 인근 냇가를 남이포라 부른다. 기원은 남이 장군 전설이다. 조선 초기 세조 때 아룡과 자룡이라는 형제가 살았다. 이들은 도둑 떼의 우두머리로, 나쁜 짓을 일삼았다. 고을에서 군사를 보내 형제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기세가 오른 형제는 자기들이 왕이 되겠다는 욕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남이 장군을 파견했다. 형제는 남이 장군에게 "항복하면 나라를 빼앗은 뒤 높은 벼슬을 주겠다"고 했고, 남이 장군은 "너희 형제가 나쁜 마음을 품고 나라에 불충하고 백성을 못 살게 한 죄 죽어 마땅하다"고 맞받아쳤다. 이들은 하늘을 날면서 결투를 벌였다. 하늘에서 기합소리와 칼과 칼이 부딪치며 불꽃이 일었다. 한참이 지나 남이 장군의 고함과 함께 아룡이 떨어졌다. 자룡은 겁을 먹고 달아났지만 이내 붙잡혀 목이 베어졌다. 남이 장군은 하늘로 날아올라 큰소리로 웃으며 선바위 앞 절벽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 놓고 땅에 내려섰다. 영양 고을은 다시 평온을 찾았다.
▷경북 성주 선남면에 용바위 전설이 전해져 온다. 산 중턱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었는데, 용의 머리를 닮았다. 전설은 600여 년 전 고려 말까지 올라간다. 민심이 어수선했다. 나라가 기울어지고 백성 생활이 궁핍했다. 이 마을에 부잣집이 있었다. 흉년이 든 어느 해, 승려들은 시주를 받고자 이 집을 자주 찾았다. 집주인은 고민 끝에 탁발(托鉢)을 온 승려들을 광에 가두었다가 풀어줬다. 이후 탁발을 오는 승려가 없었다.
몇 년 뒤 한 도승이 이 집에 찾았다가 광에 갇혔다.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한 도승이 "주인을 도우러 왔다"며 꾀를 냈다. "마을 건너편 산 중턱의 바위는 용이 하늘로 오르다가 변한 것인데, 그대로 두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했다. 이를 들은 집주인이 석공을 불러 용바위 머리를 찔렀다. 천둥이 치면서 석공이 벼락을 맞았다. 용바위 머리는 피를 흘리며 갈라졌다. 도승은 "행실이 괘씸해 하늘이 천벌을 내렸다"며 하늘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버틴 예천 석송령
왕건의 옛 인연 담긴 영주 부부 은행나무
◆나무, 신비로운 이야기의 무대
옛날 사람들은 나무에 신비한 기운이 있다고 믿었다. 마을에 우뚝 선 나무가 영험함으로 사람들을 지켜줄 것을 기대했다. 나무에 얽힌 전설에는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킨 나무에 대한 경외감이 배어 있다. 무성한 잎처럼 풍성한 이야기가 나무에 있다.
▷예천 석송령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감천면 석평마을의 석송령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이다. 그늘 면적이 1천㎡로 품이 넓다. 600여 년 전 지역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주민들이 강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를 건져 지금 자리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1927년 이수목이란 사람이 석송령이란 이름을 짓고 자기 소유 토지를 상속했다. 일제강점기 때 이 나무를 제거해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 일본 군함의 재료로 쓰려고 했다. 일본인이 인부를 동원했다. 나무를 벨 톱과 장비를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개울을 건너는데 갑자기 자전거가 부러져 일본 순사는 목이 부러져 죽고, 인부들은 나무를 보자 겁에 질려 달아났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이 나무 주변에 야전병원을 세웠는데, 인근 모든 지역이 비행기 폭격으로 피해를 봤지만 우산 모양의 나무 밑은 무사했다고 한다.
▷칠곡 유학산에도 나무와 관련한 전설이 있다. 유학산 기슭의 듬티마을에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었다. 다섯 아름이 될 만큼 큰 나무였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직전에 며칠 동안 울었다고 한다. 그 소리가 크게 울렸다고 했다. 마치 탈곡기 소리처럼 "으응, 으응" 울었고, 나무에 등을 대면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1973년 겨울에 아이들이 놀다가 밑둥치 구멍에 불을 질러 순식간에 타버렸다.
▷영주 금대마을에 암수 두 그루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700~800년으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왕건) 시대 전설이 있다. 전쟁에 진 왕건이 계곡에 궁을 지어 피신했다. 왕건은 신하를 거느리고 금대마을을 자주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처녀 진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진이도 왕건을 흠모했지만 표현하지 못했다. 떠날 때가 되자 왕건은 신하를 시켜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을 입구에 심게 했다. 하나는 자신이고, 또 하나는 진이라고 여겼다. 비록 마을을 떠나지만 인연을 기억하겠다는 의미였다. 그 후 진이는 은행나무에 물을 주면서 왕건을 그리워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자리를 지키는 두 나무를 부부 은행나무라고 부른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떨어진 구미 금오산
의성 금성산 꼭대기에 묘 쓰면 가뭄 든다
◆산, 복을 가져다주는 영험함
산은 우러러보는 대상이었다. 높고 웅장한 산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 그 자체이자 일종의 종교였다.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이라 기대했다. 속세에서 바라는 복을 내려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비를 내려달라 기우제를 올리는 대상이었다.
▷의성 금성산에는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 산꼭대기에 묘를 쓴다면 일대 지역에 가뭄이 들고 묘를 쓴 사람은 운수대통을 해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조선 고종 때 금성산 주변만 가뭄이 든 적이 있었다. 논과 밭이 메말랐고 곡식이 타죽었다. 기다리는 비가 오지 않자 농민들은 금성산 정상으로 향했다. 묘를 찾기 위해서였다. 샅샅이 뒤진 끝에 10m 깊이 땅속에 돌로 된 관을 발견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관을 산 아래로 버렸다. 그러자 천둥이 치고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단비가 내려 산과 들, 논과 밭을 적셨다. 그 후부터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금성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조상의 묘를 쓰려고 남의 눈을 피해 암매장을 하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울릉 성인봉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비가 많이 오는 울릉도에 석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섬에서 물이 귀해졌다. 민심이 뒤숭숭해졌다. 가뭄이 언제까지 이어질 건지 점을 쳤다. 점쟁이가 성인봉 꼭대기를 파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괭이와 삽, 곡괭이를 들었다. 실제 땅을 파보니 오래되지 않은 시체가 나왔다. 이를 치우니 비가 내렸다. 이후에도 가뭄이 있을 때마다 성인봉 꼭대기를 팠다. 그럴 때면 관이나 시체가 나왔다고 한다. 성인봉이 명산이어서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이 잘된다는 풍수설이 바탕이 된 전설이다.
▷구미 금오산 마애보살입상 옆 절벽 밑 옹달샘에는 이무기 전설이 있다. 옛날 이무기가 천 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 하늘로 올라갈 날이 됐다. 어느 봄날 바위를 타고 큰 소리를 지르며 하늘로 오르던 중이었다. 그때 언덕 아래 산나물을 캐던 아낙이 이를 보고 "저 이무기 봐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무기는 용이 되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때 낭떠러지 암벽에 홈이 팼고, 비늘 자국이 남았다. 이를 용회암이라 하고, 그 밑에 옹달샘을 용샘이라 불렀다. 이 근처에 묘를 쓰면 가뭄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가뭄이 들 때면 주민들이 몰래 쓴 묘를 찾거나,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
아버지 기다리다 돌 된 효녀 울릉 촛대바위로
경산 남매지에는 슬픈 오누이 이야기 전해져
◆고난 속 슬픈 여인들
전설에는 유독 딸과 처녀, 누이가 많이 등장한다. 이들은 피해를 겪거나 희생을 선택한다. 정절을 훼손당하거나 아버지를 기다리는 효녀로 그려진다. 가족을 위해 스스로 원치 않는 결혼에 나서기도 한다.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는 옛 시대 상황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분석이다.
▷구미 선산에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한다. 선산에 부임한 조 군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예방이 군수의 딸(조 색시)을 겁탈하고 살해해 대밭에 묻었다. 이후 신임 군수가 부임하자마자 죽는 일이 반복됐다. 아무도 선산 군수로 오려 하지 않았다. 한 용감한 사람이 선산 군수로 자청했다. 부임 첫날 밤 조 색시가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 색시는 아침 조회 때 흰 나비가 돼 자신을 죽인 사람 머리에 앉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 날 예방의 머리에 흰 나비가 앉자, 군수는 예방을 포박해 죄를 묻고 조 색시의 시신을 수습, 안장해 주었다.
▷울릉 촛대바위에는 효녀 전설이 있다. 저동마을에 한 노인이 딸과 단둘이 살았다. 노인의 재산은 작은 배 한 척과 좁은 밭이 전부였다. 흉작이 든 해 겨울에는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아야 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도 바다로 나갔다. 어느 겨울날 딸이 말렸지만 노인은 배를 띄웠다. 며칠이 지나도 노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딸은 굶으며 바다만 바라봤다. 헛것으로 돛을 단 배가 보였다. 딸은 바다로 마중을 나갔다. 파도를 헤치며 나아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지친 딸은 그 자리에 서서 그대로 돌이 돼 버렸다. 이를 촛대바위라고 부른다. 현재 방파제 부분에 우뚝 솟아 있다.
▷경산 남매지에는 오누이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날 남매지 인근 마을에 의좋은 오누이가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오빠는 과거에 급제해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꿈이 있었다. 막상 한양에서 과거시험이 열렸지만 여비가 없어 포기하려 했다. 이를 안 누이가 황 부잣집을 찾았다. 평소 누이를 며느릿감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오빠가 말리자, 황 부잣집에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거짓 약속을 했다. 오빠가 과거를 보러 간 사이 강제로 결혼식을 올렸다. 눈먼 어머니는 원통해 세상을 떠났고, 이에 누이도 마을 옆 못에 몸을 던졌다. 과거에 급제해 돌아온 오빠도 사실을 모두 알고서 동생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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