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다행히 남자 몸 되었건만/무엇 하나 이루지 못하고 가나니/청산이 비웃고 녹수가 꾸짖는구나.'
1921년 8월 52세로 삶을 마친 독립투사 박상진의 절명시다. 1915년 8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 투쟁에 나섰던 그는 대구에 가게를 차리고 독립운동에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놓았다. 목숨과 전 재산까지. 대지주의 장남인 그는 누구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군자금 마련을 위해 헌납한 논밭은 7천 석 규모의 900두락(마지기).
전 재산을 잃은 아버지는 1923년 아들의 대상(죽고 두 돌에 지내는 제사) 때, 2천700여 자의 긴 제문을 지어 죽은 아들과 한 맺힌 대화를 나눴다. "일곱 집안 백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옛 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렇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어 네 아내에게 물어보았더니 '지금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천운(天運)이라 할까요? 천운이라 할까요?'라고 하였다."
박상진은 아버지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등 남은 가족 생계조차 뒤로 했다. 나라 위해 모두 헌납한 더없는 사례다. 일찍 대구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우연이 아니다. 신라 6두품 호족 중알찬 이재(異才)가 스스로 대구 수창(현 수성지역)에 성을 쌓고 호국성이라 부르고 누각을 세워 나라 안녕을 빈 이후부터 맥을 이은 일이다.
조선 세종 시절, 지금의 달성을 나라에 바치고 대가 대신 대구 백성의 세금 감면을 요청한 서침의 토지 기부, 하루 천냥이 나온다는 명당 사연을 간직한 집터 즉 오늘날 경상감영 자리를 나라에 내놓은 귀화 중국인 두사충의 사례가 그렇다. 이처럼 대구의 역사 물줄기 속에는 기부 정신이 흘렀다. 지금도 이어져 지난 4일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대구 아너 소사이어티'의 100호 회원이 나온 까닭이다.
2010년 12월 1호 탄생 이후 6년 6개월 만이다. 특히 회원도 해마다 늘어 고무적이다. 도시철도 2호선 경북대병원역 벽면 한쪽에는 이들 이름을 새겨 기리고 있다. 이런 나눔의 사람이 넘치는 대구를 누가 '골통'보수'수구 도시'라 했던가. 지하철 벽마다 기부 시민 이름으로 넘치는 날도 오리라. 유서 깊은 기부 전통을 이을 곧 기부열전(列傳)과 기부거리쯤도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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