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서예는 삼국기의 고신라와 일통삼한 후의 통일신라기로 구분될 만큼 그 색깔이 분명히 다르다. 고신라의 전성기인 6세기 신라는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을 거치면서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율령을 반포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통일의 기반을 굳건히 다졌다. 이런 역사를 기록한 6세기의 금석문이 501년 세워진 '포항중성리비'로부터 550년대에 건립된 '단양적성비' '임신서기석'을 거쳐 591년 만들어진 '남산신성비'에 이르기까지 20여 점이라는 사실과 그것들이 세워진 지역이 왕경 경주로부터 가야령인 창녕, 백제령인 북한산, 고구려령인 마운령과 황초령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는 사실은 신라의 비약적 발전과 한자문화의 확산을 여과 없이 보여 준다. 또 함안 성산산성, 하남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은 지방행정에서도 한자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런데 사용된 서체에 있어서 금석문과 목간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금석문은 예서의 필의를 지닌 해서로, 목간은 해서의 필의를 지닌 행서로 주로 쓰여, 돌에 새긴 글씨와 나무에 직접 쓴 육필의 차이점을 명백히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풍은 공히 질박하면서 힘찬 신라인의 토속적 성정을 대변한다.
7세기에 이르러 외래문화가 입수되고 그 영향이 통일신라 서예의 기본 사조를 형성한다. 통일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당나라와 빈번하게 교류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서예문화를 수용했다. 그 결과 통일신라의 글씨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해서에서는 초당의 구양순풍, 행서에서는 당 태종이 흠모한 동진의 왕희지풍이다. 특히 네 점의 왕릉비에서는 모두 구양순풍 해서가 사용되었다. 그 엄정하고 정연함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통일 후 국가 체제를 굳건히 하려는 당시의 시대적 요청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구양순풍 해서와 왕희지풍 행서는 그 용도나 서가 개인의 취향에 맞춰 적절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구양순풍은 통일신라 전대를 풍미했다.
통일신라의 불교문화는 서예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사경이 성행하게 되고 그것이 각기 다른 재료에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8세기 중반에 쓰인 지본인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 이미 국보로 지정되었다. 석경으로는 서풍이 흡사한 '금강석경'과 '화엄석경', 그리고 '법화석경'이 당나라 사경과는 구별되는, 수준 높은 신라 사경풍을 보여 준다. 또 사적비에는 행서의 필의가 있는 해서가 주로 사용되었고 종명, 탑지 등의 글씨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한편 8세기경 지방의 행정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알려 주는 토지와 녹봉 관련 행정 문서가 일본 정창원에서 발견되어 행정 관리의 수려한 행서와 초서를 살필 수 있다.
신라 하대에는 선종이 교종을 대체하게 되고 당나라의 선종을 배운 신라의 선사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왕실과 지방 재지 세력의 후원으로 구산선문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선문의 선사들이 입적한 후 왕명으로 그들을 기리기 위한 선사탑과 선사비가 세워졌다. 9, 10세기의 선사비는 최치원, 최인연, 영업, 혜강 등 당대의 명필이나 명승들이 각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해서나 행서로 써 자가풍의 형성이라는 새로운 서예 사조를 형성했다. 평생 왕희지의 글씨를 공부한 김생은 고신라풍이 가미된 독특한 자가풍의 행서를 구사했다.
경상북도에서 기획한 '신라사대계' 총서 발간 작업에서 136명의 필자를 통해 신라의 역사는 물론 문학, 종교, 예술 등이 두루 소개되었다. 그중에서도 필수적이지만 접근이 쉽지 않은 문자예술인 서예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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