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차례 산제 지내고 이튿날 육로 탐색…30리 산길 넘어 태하 도착
영(嶺)을 넘다
배들은 포구에서 밤새 삐걱거리며 울었다. 묶어 놓은 닻줄이 위태로웠다. 사공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배 두어 군데가 개먹었다. 서풍이 일면 배가 크게 손상될 듯했다. 전라도 사람 김재근이 칡넝쿨을 엮어 만든 밧줄을 내어 주었다. 배 세 척을 단단히 맸다. 배는 아침까지 무사했다.
"나리, 개먹은디는 염려 마시랑께요. 섬을 떠나시는 날까지 소인 말끔히 손봐 놓겠어라."
"고맙네. 허나,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섬에 들어온 이유가 있느냐?"
"아이고 나리, 질 좋은 육송으로 배 맹글 욕심에 그만… 소인 죽을죄를 지었구만이라."
규원의 차분한 물음에 김재근이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말을 이었다.
"저 멀리 왜놈들도 무시로 드나드는디, 저러다 언젠가는 섬을 날로 먹으려 들게 분명하당께요."
'아! 정녕 왜놈이라 하는가.' 규원은 까마득하면서도 섬 어딘가에 있을 왜놈을 떠올렸다. 독기 있는 바람이 불어 구름이 사방으로 일었다. 는개가 끼어 산바람이 축축하였다. 날이 사나웠다. 규원은 움막 뒤 후박나무 숲에 있다는 산신당에 올랐다. 마음이 함부로 날뛰었다. "섬 깊이 들어가야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함부로 들어와… 무상으로… 폐단… 소상히 보고 소상히 아뢸 것이다." 왕의 말은 단호하고 선명했다. 가슴 언저리에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규원은 깊고 오래도록 산제를 올렸다.
이튿날 제당 언저리 숲에서 내려오는 한 사내를 만났다. 그는 경남 함양 출신 생원 전서일로, 약초를 캐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규원은 전생원과 약주를 나누었다.
"이 포구의 지명을 아시는가?"
"예, 나으리. 소황토구미라 하옵니다. 저기 저 봉우리 너머에는 이곳보다 훨씬 큰 대황토구미라는 큰 포구가 있습지요."
"약초를 캔다면 섬 구석구석 지리에 능하겠구나. 예서 그리로 가는 길이 있는가?"
"나으리, 저 골짜기를 곡태령이라 하옵니다. 길이 있긴 하오나 초입부터 사납기 그지없지요. 벼랑으로 굴러도 구해낼 방도가 없을 만큼 골이 깊사옵니다."
전생원은 차분하고 믿을 만했다. 규원은 중추원도사 심의완을 불렀다.
"풍랑은 좀 잦아들었는가? 섬에 당도한 지도 벌써 사흘이 되었다. 전생원의 도움을 받아 오후에 탐색을 시작할 것이니 사공과 여독이 심한 자들을 제외하고 채비토록 하라. 길이 험하다 들었다. 전 수문장 고종팔, 군관 출신 서상학과 함께 일행의 안전을 각별히 신경 쓸 것이다."
행렬의 선두와 말미에 포군들을 적절히 배치하였다. 전생원의 말대로 곡태령은 초입부터 숨이 막혔다. 행렬은 길고 오래도록 늘어졌다. 선두에 선 전생원과 포군들이 풀을 헤치며 길을 내느라 애를 먹었다. 봉우리는 높고 가팔랐으며, 바람은 느리고 습했다. 열 보 나아가고 쉬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한 시진쯤 오르자 고개 상 마루에 다다랐다. 흙의 결이 곱지 못했다. 는개가 끼었음에도 먼지가 푸석거리며 일었다. 내려오는 동안 지치고 집중력이 흐려져 미끄러지는 자들이 넘쳤다.
"한눈 팔지 마라. 골이 깊다."
푸르스름하게 이내가 내렸다. 행렬은 더욱 늘어졌다. 깎아지른 산세를 막 빠져나온 일행은 무기력했다. 바람이 불었다. 풀들이 같은 높이로 일렁였다. 몽롱하게 번져오는 여독 속에 걸음이 평온하였다. 육지의 너른 들을 걷듯 나른하였다.
어찌 된 일인가. 규원은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살폈다.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분명 너른 들판이었다. 들 가운데로 흐르는 개울은 물이 넉넉하였고, 평지 끝으로 포구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꿈인가 생시인가.' 규원은 홀로 너른 땅 가운데로 나아가 구석구석 흙을 들췄다. 혀끝으로 맛을 보고, 코를 대어 냄새도 살폈다. '돌이 많아 담을 쌓고 마을을 형성한다면 수십 호 사람들이 살 만한 땅이로구나. 개울에 물이 넘치니 식수와 농수 걱정은 할 것이 못 되겠다. 흙이 추지고 가뭇하다. 지룡이 살아 적당히 비릿하고 토심이 깊다. 논과 밭으로 일군다면 필시 경작에 적합하겠다. 수십 호가 먹고살 소출은 거뜬할 듯하구나.' 땅은 넓었으며 비옥하고 가지런했다. 임금의 마을은 실로 민생이 풍족할 것이었다. 규원은 해가 저무는 쪽을 향해 깊게 절했다. 임금은 거기에 있었다.
박시윤 작가
◆검찰사 흔적 따라 넘는 고갯길
이규원이 울릉도에 도착한 다음 날에도 풍랑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규원은 타고 온 배가 걱정돼 학포를 떠나지 못하고 하루 더 머문 뒤 풍랑이 조금 잦아든 2일 오후 육로 검찰에 나선다. 학포에 머물며 3차례나 제를 지냈을 만큼 날씨가 좋지 않았다. 당시 고사를 지낸 신당은 '임오명 각석문'이 있는 바위 위쪽 '산왕각'이 있는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산왕각은 2년 뒤 지어졌다. '광서 10년'(1884년)이라고 적힌 낡은 현판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육로 검찰을 위한 첫 번째 목적지는 '대황토구미'였다. 서면소재지인 태하리로 학포마을에서 북쪽으로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바닷가 마을이다. 학포정류소에서 버스로 5분 정도 거리다.
뱃길로는 지척이었으나 일행은 험한 산길을 택했다. 이규원은 2일 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날 지나온 산길은 험한데다가 거의 30리나 되었다. 고개가 아주 높아서 올라갈 때엔 얼굴이 부딪히고 내려갈 땐 뒷머리가 부딪힐 정도였다. 길은 가는 실 같아서 있는 듯 없는 듯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곤 하였다.'
급경사로 이뤄진 울릉도의 험준한 산세는 큰 장애물이었다. 아무리 에둘러가도 30리가 될 수 없는 산길이지만 일행은 반나절을 꼬박 걸어 태하에 이른다.
검찰사 일행이 걸었던 길은 아니지만 지금도 학포와 태하를 잇는 고갯길이 있다. 이 길이 포함된 '현포~학포 생태길'은 울릉군이 최근 '해담길'로 이름 붙인 둘레길 9개 코스 가운데 하나다. 학포마을로 내려왔던 길을 되짚어 오르다 보면 생태탐방로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40여 분을 걸어가면 태하리에 있는 천태종 사찰 삼도사에 이른다. 산줄기를 따라 나선형으로 완만하게 길이 나 있어 힘들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조선 수토역사 고스란히
검찰사 일행이 2일 저녁 무렵 도착한 태하리엔 울릉도 수토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태하는 조선시대 수토관들이 주로 상륙했던 곳이다. 수토관의 흔적도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태하항 왼쪽 바위 절벽 아래 곳곳엔 글씨가 새겨져 있다. 1801년과 1805년 각각 수토관으로 왔던 삼척영장 김최환'이보국과 그 일행의 이름을 새긴 '태하리 각석문'이다. 소중한 역사의 흔적 앞에 안내판 하나 없는 모습이 안타깝다.
울릉군지 등에 따르면 태하항 오른편에도 각석문이 있었으나 개발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30년과 1847년 각각 울릉도를 다녀간 삼척영장 이경정'정재천의 기록이다. 이 마을에 사는 박해수(85) 씨가 각석문이 있던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50년쯤 전이었어. 항구 만들고 길 낸다고 다 부숴버렸지. 그때 발파를 반대하던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가 타박을 마이 줬어. 먹고살기도 힘든데 마을 발전이 먼저라고 생각했지. 그놈을 그냥 뒀어야 했는데…."
마을 들머리 들판에 있는 '광서명 각석문'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1890년과 1893년 새긴 것으로, 울릉도 재개척기에 울릉도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는 내용이다. 이규원 검찰사를 비롯해 흉년으로 신음하던 울릉도 주민에게 곡식을 지원한 영의정 심순택 등의 이름과 공적을 적었다.
성하신당도 조선 태종 때 안무사로 임명돼 울릉도를 두 차례 다녀간 김인우와 얽힌 전설이 깃든 곳이다. 울릉도 순찰 후 풍랑이 심해 돌아가지 못하던 김인우가 '남녀 아이 두 명을 두고 가라'는 꿈을 꾼 뒤 그대로 했더니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고, 훗날 다시 울릉도에 와 죽어 있는 아이들을 발견해 사당을 짓고 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다.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먼 얘기지만 울릉 주민들은 매년 음력 3월 초하루 이곳에서 제를 올린다. 동해안 어민이 선박을 진수할 때 안전조업을 기원하며 제를 올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오른쪽 해안 절벽 아래엔 주황색 황토 띠를 두른 '태하 황토굴'이 있다. 한 주민이 말했다. "옛날 수토관이 울릉도에 다녀오지 않고도 갔다 왔다고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보낼 때는 반드시 황토와 울향(울릉도 자생 향나무)을 가져오게 했다고 해요. 황토를 캐 간 곳이 바로 여기라요. 대황토구미란 이름도 그래서 생겼지요." 이규원이 전날 머물렀던 소황토구미도 황토가 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지만 태하보다 지역이 좁고 황토도 적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을 불러모은 풍요로운 땅
개척 초기 20년 넘게 관청이 있었던 태하는 검찰 당시 이규원의 생각처럼 넓고 풍족한 땅이었다. 울릉도를 통틀어 논이 가장 많았고 1980년대 초반까지도 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박해수 씨는 북면 평리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살다가 15세 무렵 이곳에 정착했다. "다시 울릉도에 와서 '논이 젤로 많은 곳이 어데고?' 물으니 태하동이라 카데. 쌀농사 지어 쌀밥 먹으려고 여 왔는데 쌀밥은 못 먹고 고생만 진탕 했지."
태하등대 옆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북면 해안과 대풍감 경관은 태하의 자랑거리다. '태하 향목 모노레일'을 타고 5분 정도 오른 뒤 10여 분 걸어가면 등대 옆 전망대에 이른다.
모노레일에서 내려 걸어가는 숲길엔 동백나무가 지천이다. 울릉도 동백유는 머릿기름으로 유명했다. '동아일보'는 1934년 10월 28일 자에 '울릉도 동백유' 기사를 실었다. 당시 울릉도 특산물로 마늘, 오징어, 소 등이 유명했는데 여기에 동백유를 추가할 만하다는 내용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 왼편으로 '툭'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 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수토관들이 육지로 돌아가기 위해 순풍을 기다리며 정박했다는 대풍감 해안이다. 대풍감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향나무 자생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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