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폭우 속에 적의 기습, 하필 귀국병 막사에 포탄이 떨어졌다
▶푸른 낙화
무섭게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비 때문에 즉각 반격이나 응징을 할 수 없는 불리한 조건을 틈타서 우리 사단사령부로 베트콩들이 포격을 가해왔다. 한밤중의 폭우 속에서 갑자기 비상이 걸려, 처음엔 일반교육훈련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중대본부에 알아보니 방금 사령부가 기습을 받았다는 것이다.
51포대 앞에 홍등가 쪽에서 적 82밀리 포탄과 대전차포인 적탄통 B40이 수없이 쏟아져 들어와, 하필이면 귀국을 위해 집결해 있는 귀국병 막사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있는 푸른 꿈들이 무참하게 꺾였단다. 이제 곧 돌아갈 고향과 그리운 부모 형제, 또 남몰래 묻어둔 아름다운 사랑을 못 잊어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복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심 속에서 잠자다가 이처럼 맥없이 허무하게 꺾여버리다니. 이런 억울한 죽음을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며칠 후면 부산 부두에서 반갑게 만나리라 미리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을 고국의 여러 친척과 가족들은 또 얼마나 가슴 치는 아픔을 당해야만 하는가.
장대 같은 빗줄기를 뚫고 조명탄들이 하늘로 치솟아 밤새도록 현란하게 피어난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젊은 원혼들의 눈물같이 내리는 빗방울들이 불빛을 받아 붉게,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새벽이 되도록 비상은 해제되지 않고, 전 부대가 목표물도 확인하지 못한 채 엄청난 포격과 위협사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포격을 가해온 베트콩들은 날이 밝자 홍등가의 여인들을 여러 명 끌고 정글 속으로 숨어 입산해 버렸다고 했다.
모두가 불운한 사람들이 아닌가. 덧없이 죽어간 사람이나 그렇게 끌려가 버린 사람들 모두가 불쌍하기 짝이 없다. 오늘 베트콩들에게 붙들려 간 그 여인들은 지하생활을 하는 수많은 남자들에게 자신을 제공하는 위안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어쩌면 우리의 총탄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전선 없는 전쟁을 치르는 이 나라 사람들의 불행이고 슬픈 운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갓집 아름다운 규수라고 해도 베트콩들의 눈에 들면 곧바로 납치되고, 키워오던 푸른 꿈이 모두 좌절되고 만다. 그리고 무서운 사상 속에 숨어서 살며 어두운 지하생활과 불안 속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상 사방을 견제하며 전전긍긍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오늘, 이 나라의 현실이다.
병장으로 최종 진급을 했다. 부관으로 옮겨 앉은 소대장을 따라 중대본부로 왔다.
그러고 보니 바로 앞 제대한 사람들까지 어느덧 다 귀국을 하고, 벌써 우리 20제대가 귀국 날짜를 손가락 꼽으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을 보니 어느덧 내 파병 생활에서 한 해가 흘러갔다는 것이 아닌가.
한 해 동안의 일들이, 그 삼백예순여 날들의 고달픔과 고난이 그리움과 회한으로 어제처럼 가깝게만 느껴진다.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짧게만 느껴졌다.
귀국. 그래, 내게도 설레는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살벌한 이국의 전선에서 그래도 한 해 동안 무사히 살아왔고, 이제 귀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부산 부두를 보며 눈물 흘리며 떠나오던 그날을 생각하면서 복무를 마치고 무사귀국을 한다는 것이 마음 가볍지만은 않은 것은 왜일까.
무언가 허무하고 또 허전한 생각이 든다. 처음 파월을 결심했을 때,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 수많은 공방전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고 목숨을 경각에 내걸고 내 운명을 가름해보는 그 촉박한 순간, 참다운 전쟁터를 경험하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그런 상황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 해 동안 이국의 전투지에서 내가 얻은 삶의 지표는 무엇이며 내 스스로 세우고자 했던 가치는 얼마만큼 만들어졌는가. 젊은 목숨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 죽음의 주인공이 내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며 가슴 쓸어내린 것 말고 또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처음 배 타던 날의 비장한 각오와 결심이 부끄럽도록 스스로 비겁하거나 옹졸하지는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 와서 지난 세월을 어쩌겠는가. 이 땅에서 한 해가 다 흐른 지금, 그래도 무운을 빌어준 고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염원이 내 무운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고난과 고통이 있을 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늘 앞에 그 짐을 가볍게 해달라는 기원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래도 하늘은 안팎으로 얼마나 염려하시고 또 이끌어주셨는지 헤아릴 수 없는 크기가 아닌가.
그러나 한 해 동안의 내 월남 생활이 끝나가고, 이제 이 생활도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현실 앞에 그래도 여러 가지 빛깔의 상념이 많다.
그런 능력도 물론 없었지만, 그리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여느 사람들같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요직에 앉아 사병들의 전투 수당을 등치거나 남들처럼 돈도 벌지 못했다. 전선에 낙엽처럼 흔하다는 훈장 하나 가슴에 달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어떠랴. 전쟁의 시간을, 그리고 생명을 돈으로 바꾸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노라고. 이렇듯 혼자 외롭고 부질없는 변명을 해본다.
사단 부관부의 김영엽 상병. 고향 친구 원태가 자기 부대 동료였던 친구였다고 편지로 주소와 소속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상급 부대니까 무슨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소개시켜 주었고 지난 5월엔가 우리 중대에까지 전화를 해주며 안부를 물어오던 사람이었다.
사단에 나갈 일이 있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가 만나보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 끝에 말년이 된 내 월남 생활과 또 아직 까마득히 남은 군대생활이 여간 난감하지 않다는 푸념 같은 내 이야기를 듣고 그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곳 복무를 마치고 고국에 돌아가서 다시 생소한 부대에 배속되어 어설픈 분위기를 견뎌야 하는데, 여기서 더 생활하다가 귀국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고했다. 복무 연장을 하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는 간단한 자신의 호의로 복무 연장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사병의 정상적 인사명령으로 복무 연장을 조치할 수는 없지만 귀국자 명단 상신 때마다 그 명단에서 누락시키면 얼마든지 귀국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작성되어 올라온 내 귀국 문제도 이름을 누락시켜 놓을 테니까 부대에 돌아가는 대로 복무 연장을 정식으로 상신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었다.
전투병으로서의 복무 연장, 그리고 착잡한 마음. 그러나 베풀어주는 그의 호의를 따르기로 했다. 중대에서는 필수 요원이라고 크게 배려해 주어 10여 일이 걸린 끝에 복무 연장 신청을 상신할 수 있었다.
같이 바다를 건너왔던 동료들이 이제 하나둘 고국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자꾸 마음을 다져보지만 왠지 가슴이 허전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외국에 가 있어야 비로소 고국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고난으로 타향을 돌아본 사람만이 향수를 가슴 저리게 실감할 수 있다고 했던가.
날이 갈수록 단 하루도 고국과 고향이 그립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동안 뵙지 못한 노쇠하신 부모님. 오늘도 이 막내아들의 무사귀국을 기원하고 계시겠지. 이렇게 복무 연장을 해서 이번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소식을 받으시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지금쯤 맑고 높아진 가을 하늘, 싱그러운 코스모스, 찬바람에 낙엽 흩날리는 내 나라의 풍요한 계절. 그 속의 여러 형제들.
또 생각하면 미움과 슬픔이 엇갈리는 사람, 그녀 영. 가슴 저미는 그리움이 엉킨다. 복무 연장이 확정되면 내게도 고국으로 갈 수 있는 특별휴가가 주어질까.
첫 휴가 때는 별다른 기대도 없었고 가족들 반가운 것도 몰랐는데 산수가 다른 외국이기 때문인가. 부푼 맘으로 휴가를 혼자 상상하고 조용히 손가락 세며 그날을 기다려보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매일시니어문학상은
전국 신문사 최초로 매일신문이 제정해 운영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문학상 공모전입니다. 만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공모 부문은 논픽션, 시, 수필 등 3개 부문입니다. 대상 1명 500만원, 최우수상 3명 각 300만원, 우수상 15명 각 100만원 등 총상금은 4천100만원입니다. 주제는 제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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