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눈이 그치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림자가 짙은 골목 구석엔 아직 잔설이 쌓여 있었다. 전날 열렸던 오일장의 흔적이 시장길 여기저기에 뒹굴었다.
달성토성에서 헌병대들의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우두둑우두둑 저녁의 맑은 대기를 흔들었다. 일본 상인들이 토성 안에 요배전(遙拜殿)을 거창하게 세운 뒤로, 일본 헌병대들은 주둔지 옆 공터를 버려두고 곧잘 이곳에 들어가서 훈련을 했다. 달성토성은 옛날 신라 때 높은 지대 위에 1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둘레로 성을 쌓은 곳으로, 마치 천지를 에워싼 백두산 같은 지형을 띠었다. 움푹 꺼진 중앙은 갈대가 무성했고 완만하게 경사진 가장자리 밖으로는 까마득한 벼랑이었다. 일본 황제의 조상을 모시는 요배전은 토성 입구 정면에서 보면 갈대밭 너머 둔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황제의 가호라도 느끼는 모양이지. 놈들은 꼭 요배전 근방에서 훈련을 한다니까.
계승은 초가들 사이로 난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낮은 초가와 점포 형 판자집에 가려 토성은 보이지 않았다. 몇 차례나 골목을 돌고 있는지 모른다. 어둠이 점점 내렸다. 오돌매가 아지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낮에 심부름꾼 아이가 광문사로 와서 편지를 전해주었다. 6시에 '거기서'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거기'는 보름 전에 만들었던 마구간 밑을 가리켰다.
계승은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뜻을 납득해줄까. 핑계를 댄다고 여길지도. 만약 오돌매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자신이 이 아지트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버려야 할지 모른다.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비밀을 알고 있는 대가를 치르라는 위협이 아닐까.
살쾡이 같은 놈.
계승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침착해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골목 안쪽, 눈에 익은 초가로 들어섰다. 집은 비어 있었다. 마구간에는 노새 세 마리가 여물통에 머리를 처넣고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금방 여물을 준 듯했다. 오돌매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계승은 노새 엉덩이를 슬쩍 떠밀며, 닫혀 있는 입구를 두드렸다. 조금 뒤 문을 열렸고, 계승은 사다리를 밟고 내려섰다. 땅 밑이라선지 의외로 공기가 훈훈했다. 지하는 어두웠으나 공기통으로 빠져나온 희미한 조명으로 세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들어올 때 아무도 없었지?"
뜻밖에도 장상만의 목소리였다.
"어, 상만이네?" 계승은 공연히 반가웠다. "여기가 헌병대 턱밑인데 발각되지 않을까?"
"도시 안은 어디든 턱밑이오. 출입할 때나 조심하시오......그러고 어찌 됐어?"
오돌매였다. 뒷말은 장상만에게 묻는 소리였다. 장상만이 전날 안강에 간 일을 얘기하는 중인 것 같았다. 장상만은 앞뒤를 추려서 계승에게 알려주었다.
"마욱진이 27일에 노새 수레 십여 대를 끌고 포항으로 간다는 정보를 알려주고 왔어. 신돌석 휘하에 있던 조영하란 사람이 안강을 중심으로 활동하거든. 영천에서 포항으로 넘어가는 시티재에서 마욱진의 수레를 칠 거라고 해."
마욱진은 저번에 달성회가 노렸던, 일본 상인들의 화물을 취급하는 유통업자였다.
"27일이라고?"
"그래, 닷새 뒤 27일이야. 기차로 하역한 왜놈 물건이 지방으로 가는 걸 막아야 하는데, 의병들과 접선하는 것부터 굉장히 힘들어. 이번에도 조영하 의진에 속한 하씨란 자를 시티재 아래서 만나기로 했거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거야. 눈앞에서 곰 가족이 슬금슬금 지나가는 데 오줌을 싸겠더라. 하씨는 오늘 새벽 3시에 나타나더라고."
"숨어서 하는 게 오히려 위험해. 흐흐, 먼저 호랑이 밥이 될지 모르잖아. 영천이나 안강에 점포를 정해서 접선하는 게 낫지 않을까. 보부상으로 위장해서 말이야. 아니면 대구에 점포를 정하고 이쪽으로 부르던지."
옆에 있는 채소상 조씨가 말했다.
"그런 방도 있네. 궁리해보자...... 여기 있을 거야? 난 피곤해서 안 되겠어. 먼저 집에 갈게."
장상만이 밖으로 나갔다. 옅은 빛이 출렁거리다 사라졌을 때 오돌매의 목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울렸다.
"임 형, 눈도 그쳤고 날씨도 맑소. 27일이면 이와세 상점이 잘 마른 장작더미가 되겠어. 준비는 다 됐죠?"
이와세 상점에 불을 지르는 일을 셋만 아는 것 같아, 계승을 놀랐다. 하긴 최소한의 인원만 공유하는 게 비밀을 더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계승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두워서 곱사등이 오돌매가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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