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 醫窓]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

입력 2017-06-21 00:05:00

저헌 이석형은 조선 초의 명신(名臣)이다. 세조 2년,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석형은 강진 만덕사에 들렀다. 그곳에서 이석형은 장덕(張德)이라는 의원을 성토하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권력 있는 사람의 가족만 정성껏 치료하고 일반 백성들은 소홀히 대한다는 호소였다. 억울함을 관가에 호소해도 힘 있는 자들과 결탁해 오히려 백성들이 불리한 처사를 당한다고도 했다. 이석형은 진상 조사 후 '나쁜 의사' 장덕을 국법에 따라 처리했다. 이후 대사헌에 올라 의사들이 가져야 할 '바른 마음'을 규범으로 만들었다. 바로 '한국판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불리는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다. 이석형은 의원정심규제를 전국에 훈시했고, 5년 뒤에는 팔도도체찰사로 전국을 순회할 때 직접 널리 알렸다.

매년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의원정심규제를 읽는다. 이 규범은 '의사의 도리는 정직하게 진료함'이라고 명확히 밝힌다. 또한 '빈부고하로 환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의학자는 교만을 버리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환자를 대해 세상의 존경을 받아야 하며 치료를 빙자하여 다른 것에 이용하면 안 된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이석형의 생가터에는 서울대병원이 들어서 있다. 서울대병원은 최근 기자회견을 열고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고 백남기 씨의 사인을 '병사'(病死)에서 '외인사'(外因死)로 수정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서울대병원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다 사망한 농민의 사인을 '병사'로 규정해 논란을 자초했다. 의과대 학생들까지 나서서 비판했지만 병원은 요지부동이었다. 해당 의사는 진단서에 '주치의의 철학'과 '진정성'이 담겨 문제가 없다며 버텼다. 그러나 진단서에 담겼어야 할 것은 의학 지식을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의식인 '전문가 정신'과 '의사로서의 양심'이었다.

A. J. 크로닌의 자전적 소설 '성채'(城砦)의 주인공 앤드루는 의과대를 졸업한 후 광산촌에서 폐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봤다. 보상금을 노린 허위 진단서 요구를 거부했고 의료계의 독단에도 저항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높아져 상류사회에 어울리게 되자 그토록 경멸하던 탐욕과 권력의 덫에 빠져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성채인 '부와 명예'를 좇는 사이 '인간적 의술'이라는 '보이지 않는 성채'를 망각한 것이다.

"잊어버리셨나요? 언덕 위에 있음을 알지만 보이지 않는 성채를 차지하기 위해 힘겹게 언덕을 올라야 한다고 당신이 늘 말했잖아요." 타락해 가는 남편 앤드루의 순수했던 열정을 상기시키려 죽음을 앞둔 부인 크리스틴이 보낸 간절한 호소다. 필자 역시 '보이지 않는 성채'를 향한 초심을 잃어버린 채 환자들을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도 진료실로 향하며 '의원정심규제'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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