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신문 속 여성] 어느 여공의 작은 소망

입력 2017-06-13 00:05:00

최세정
최세정

대구는 '섬유도시'라는 별칭이 있다. 한국의 경제를 일으킨 것 중 하나가 섬유산업이었고, 섬유산업이 외화를 벌어들이면서 한국 경제가 탄탄하게 자리 잡았다. 섬유산업의 상당 부분은 여성 노동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960년대 말 당시 대구와 경북의 섬유노동자 가운데 74.2%가 여성 노동자였다는 통계가 있다. 아마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인데다 시골에서 도시로 나오는 여성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에 선호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여성들이 섬유노동에 종사했으며 그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1986년 3월 5일 동아일보 '중졸상경 어느 여공의 작은 소망'이라는 기사를 읽어보자.

기사에서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허모(17) 양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중학교 졸업 이후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 허 양은 동네 새마을공장 미싱사 보조로 일하다가 상경을 결심했다. 소작농가의 2남 2녀 중 장녀로, 가계도 돕고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야 했기 때문이다.

변두리 봉제공장을 거치면서 허 양은 서울 생활의 쓴맛을 봐야 했다. 월 7만원씩 받고 미싱사 보조로 석 달을 일했지만 회사는 약속한 미싱사로의 승진을 시켜주지 않았다. 밀린 월급 4만3천원을 포기하고 다른 회사로 옮겼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지하 공장의 열악한 환경, 연탄가스가 새는 기숙사 여건을 견디지 못해 회사를 옮기고자 결심했지만 입사 때 취사도구와 침구를 마련해주었다는 구실로 밀린 임금 13만원을 주지 않았다.

매일 밤 11시까지 일하고도 실제로 받는 월급은 12만원을 겨우 넘는 정도였다. 허 양이 새롭게 입사한 회사에서 다음 해부터 산업체야간특별학교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내년에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 기쁘다는 허 양. 하지만 당장 심장 수술을 해야 하는 동생의 수술비를 마련해야 하는 허 양이 잔업 대신 공부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불과 30년 전 어느 여성의 이야기다. 동생의 학비를 위해, 가족의 병원비를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을 전전했던 여성 노동자는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임금 체불을 당해야 했다. 공부도 포기하고 가족들을 뒷바라지했던 그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가족들을 위해 또 다른 헌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단하기만 했던 17세 소녀의 오늘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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