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항쟁 30주년 '그날의 주역들'…강금수·이근성·안경욱·박형룡 씨

입력 2017-06-10 00:05:00

◇강금수 대구참여연대 사무처장(계명대 학생)…"6월의 뜨거웠던 경험 삶 바꿔, 청년단체 만들어 지금도 활동"

"6월 항쟁이 제 인생을 바꿨죠."

1987년 당시 계명대 철학과 1학년이었던 대구참여연대 강금수(49) 사무처장은 성인이 된 후 맞닥뜨린 6월 항쟁은 충격 그 자체였다고 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졌고, 처음 참여한 집회인 4'19혁명 기념식에 경찰이 늘어선 모습을 보고 "나라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담은 영상을 보며 부당한 권력의 민낯을 목격했다. 6월 10일 대학 캠퍼스를 떠나 거리로 나선 이유다.

"대구지역 대학별로 교내에서 집회 후 시내에 집결했습니다. 교문에서부터 막고 선 경찰 벽을 통과하는 게 우선 과제였고, 그 이후엔 삼삼오오 숨어서 명덕네거리, 반월당네거리를 통과했습니다. 누군가 '호헌철폐' 구호를 선창하면 집회는 시작이었습니다. 6월 내내 서문시장 주변, 동성로, 각 대학가에서 수백~수천 명이 모였고 집회는 이어졌습니다."

뜨거웠던 6월의 경험은 강 사무처장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는 "6월 항쟁을 경험한 이후 데모를 다니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졌고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들과 청년단체를 조직했다"고 말했다. 그의 청년운동은 1998년 참여연대 출범으로 이어졌고 지금까지 조직과 함께하고 있다.

강 사무처장은 6월 항쟁이 정권 교체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낸 만큼 '시민이 승리한 역사'라고 평가했다. 그는 "전 시민적 항쟁이 승리로 이어진 역사적 경험이었고 이는 시민 개개인의 삶을 바꾸는 근간이 됐다"며 "이후 30년 동안 한국사회에 시민사회가 뿌리내렸고 민주화의 열망을 담은 학문적, 문화적 자산으로 축적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2017년 촛불 혁명을 낳았다"고 덧붙였다.

박영채 기자 ycpark@msnet.co.kr

◇폴스미스 이근성 대표(경북대 총학생회 사무국장)…"대학교·도심 시위 이끌어, 옆 건물서 물 던져주기도"

"살면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습니다."

여론조사 전문회사 폴스미스 이근성(52) 대표는 6월 항쟁 당시 경북대 총학생회 사무국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짧은 기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라고 했다.

이 대표가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총학생회가 막 생겨날 시점이었지만 학교에는 사복형사가 즐비했고 대학본부 학생과장이 학생회 사무실 들어와 대자보를 찢어버리는 일도 예사로 벌어졌다. 특히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은 군사정권의 억압 속에 완전히 억눌러져 있었다. 그는 "군부정권에 대한 분노가 사회 전반으로 만연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폭로되자 민심은 폭발하고 말았다"며 "그나마 숨통이 틔어있었던 학생운동이 6'10항쟁의 중심에 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학교와 도심 시위를 주도했던 이 대표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된 기억은 일반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자발적인 동참이었다. 시위를 하는 동안 옆 건물에서 창문을 열고 물과 수건을 던져주는 시민들이 많았다. 이전까지 대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많은 직장인과 일반 시민들도 여러 여건 때문에 참여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동참한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당시를 '살면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학생이면서 젊었지만 뚜렷한 대의명분만 보고 순수하게 헌신했던 시기였다"며 "지금은 사회생활하면서 그런 순수함을 잃은 게 가장 아쉽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던 이 대표는 2000년 여론조사 전문회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구민수 기자 msg@msnet.co.kr

◇안경욱 대구 중국문화원장(계명대 학생)…"최루탄 가스 탓에 정신 혼미, 인근 가게서 씻고 다시 행진"

"시민들을 잡으러 오는 백골단과 최루탄 가스를 피해 근처 가게로 숨어들었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나와 행진하던 치열했던 항쟁이었습니다."

안경욱(54) 대구 중국문화원장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6'10 항쟁 당시 앞장서서 도청으로 향했던 그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계명대 경영학과(83학번) 재학 중 학교 측의 제지를 피해 친구들과 중구 대구백화점 앞에서 따로 만나 행진을 시작했다. 수십 명 규모로 시작했지만 다른 대학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인원이 급격히 불어났고 이내 출동한 경찰과 마주했다.

시민들 틈으로 백골단이 진압을 위해 뛰어오고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그는 "최루탄 가스에 노출되면 눈, 코, 입이 다 괴로워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입에 마스크를, 눈에 랩을 씌우고 코 밑에는 치약을 바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집회에 참여했다"며 "너무 고통스러우면 최루탄 가스와 경찰을 피해 인근 가게로 숨어들기도 했다. 대부분 가게 주인들은 우리를 숨겨줬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깨끗이 씻게 해 줬다"고 말했다.

당시의 경험은 안 원장의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그는 "6월 항쟁 이후 사회를 정의롭게 바꾸겠다는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며 "지금까지 각종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이를 몸소 실현하고자 해 왔고 앞으로도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안 원장은 지난해 전국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고 했다. 그는 "6월 항쟁 당시 경찰이 강제 진압을 하고 붙잡히면 각종 고문이 기다리고 있어 학생들도 대항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며 "지난해 촛불집회는 이와 달리 너무도 평화롭게 끝나 아주 좋았다. 현장에서 생업에 바빠 미처 연락하지 못했던 항쟁 당시 동료들도 만나 과거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박상구 기자 sang9@msnet.co.kr

◇박형룡 씨(경북대 총학생회장)

"1987년 6월 10일 전후로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 조치 발표 등으로 '살인 정권'의 독재연장 의도가 노골화된 탓입니다. 더는 묵과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비등했던 시기였습니다."

6월 항쟁 당시 경북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형룡(53) 씨는 항쟁의 배경을 담담히 설명했다. 경찰 감시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는 후배 2, 3명과 항상 함께였지만 두려움보단 분노가 컸다. 박 씨는 "10일 시내 집회에 1만 명이 훌쩍 넘는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며 "경찰도 방패와 헬멧을 빼앗겨 무장해제당하는 등 손쓸 수 없는 광경이 곳곳에서 벌어졌다"고 말했다.

박 씨는 안타까운 사연도 들려줬다. 중구 중앙파출소 앞에서 시민들에게 무장해제당한 전투경찰 중에 이종사촌 친척이 있었던 것. 박 씨는 "친척으로부터 나중에 전해 들은 얘기였지만, 한국 현대사의 슬픈 단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이 일부는 대학생이 돼 돌을 들고 전투경찰을 향해 던지고, 또 다른 일부는 전투경찰로 방패를 들고 최루탄을 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라고 했다.

6월 항쟁 이후 청년단체 회장,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쳐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도 출마하는 등 박 씨의 삶은 사회 변혁에 닿아 있었다. 지금은 생계를 위해 모 중소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뜨거웠던 젊은 시절의 마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박 씨는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탄핵정국에 20대 아들과 함께 짬을 내 서울 광화문 광장을 찾았다"며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한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모습을 보고 민주주의에 큰 진전이 있었음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박영채 기자 y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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