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말발이 먹힌다. 온 나라의 공직자들이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문 대통령을 만들어 낸 쪽이라면 더하다. 입만 벙긋해도 즉각 실행에 나선다. 정책에 대한 찬반이나 효과, 후유증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미래 국가 이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안중에 없다. 소통과 통합은 그저 수사였다. 그런 대통령을 향해 촛불을 들었던 국민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지지율은 고공행진 중이다.
북핵과 미사일 방어용 무기인 사드 4기 추가 반입을 두고 대통령은 '매우 충격적'이라 했다. 대통령의 이 한마디에 국방부 장관이 청와대에 불려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국가 의전서열 12위인 국가안보실장도 불려갔다. 한 나라의 국가 안보를 책임진 수장들이 졸지에 비밀 집단이라도 된 양 옹졸해졌다. 할 말이 많을 법한데 정작 조사를 받고 나온 당사자들은 입을 굳게 닫았다. 새 정권의 위세에 단단히 가위가 눌린 모양이다. 덕분에 중국은 사드 철수 기대감을 높이고, 미국은 한미동맹에 대한 새 정부의 의지를 의심하게 됐다. 대통령의 한마디는 긁어 부스럼이 된 꼴이다.
대통령은 "하절기부터 녹조 발생 우려가 심한 6개 보부터 상시 개방하라"고 못박았다.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관련 부처들이 모여 서둘러 보 수문을 열었다. 바야흐로 1973년 이래 최악의 가뭄이라고 한다. 이제야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던 농심은 그냥 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속이 타들어간다.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공과가 검증돼야 한다. 보 설치 후 4대강의 수질이 악화한 것은 맞다. '녹조 라떼'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여름철 녹조 발생이 심해졌다. 하지만 보 설치로 인해 수량은 풍부해졌다. 해마다 되풀이되던 홍수와 가뭄 피해도 획기적으로 줄었다. 환경론자들의 주장처럼 보를 허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4대강 사업으로 안정적으로 풍부해진 수량을 이용할 방안 마련에 골몰하던 지방자치단체들만 뒤통수를 맞았다. 서둘러 한쪽 손을 들어주며 정치적 논란거리를 만든 대통령의 이 한마디 역시 소통이나 화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계도 입을 닫았다. 일자리 창출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는 국가 경제와 직결되는 중요한 이슈다. 정부는 재계와의 합리적 논의 없이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재계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한국 경총이 "비정규직은 나쁘다는 이분법으로 접근하면 갈등만 부추기고 전체 일자리를 감소시킨다"는 의견을 내놓자 "사회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 경총은 반성하라"고 일침을 놓았기 때문이다. 경제를 조금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비정규직의 맹목적 정규직 전환이 궁극적으로 기업이 고용을 기피하게 하고 결국 일자리 감소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다 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나서 '반성'하라는데 이에 맞설 기업인이 있을 리 없다. 정권이 기업을 윽박지르는 자세는 전 정권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대통령의 말이 여과 없이 이행되는 것을 보며 새삼 우리나라가 대통령제 국가란 사실을 되새기게 된다. 대통령은 원하건 원치 않건 제왕적 대통령이란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야당이나 반대파에 대한 아무런 설득이나 소통 없이 진행되는 순간 대통령은 이미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파격적 행보로 국민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이런 소탈한 행보가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지금 하는 일이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는지를 평가받을 시기는 곧 온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다시 진보와 보수를 편 가르고 정쟁을 유발한다면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없다. 대통령은 말을 아끼고 주요 정책 수립에 있어 여야 간, 당정 간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침묵하라. 그렇지 않으면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하라"는 국가 지도자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주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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