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난리를 당한 뒤 점점 기울어가던 왕조, 조선을 부흥시키려 노심초사했던 정조(正祖)대왕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그리워하고 존숭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1792년(정조 16년) 서울서만 치르던 과거시험을 퇴계를 기리며 도산서원에서 거행토록 한 것은 그 대표적인 증거다. 정조대왕은 그것도 모자라다고 생각한 건지 4년 뒤인 1796년 퇴계의 신주(神主)가 한양 도성을 지나는 길에 '치제'(致祭·국가에서 왕족이나 대신(大臣), 국가를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 제문(祭文)과 제물(祭物)을 갖추어 지내주는 제사)를 지내도록 하교(下敎)를 내린 것이다. 이 치제가 열리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퇴계의 9대 종손인 이지순(李志淳)은 1796년 음력 7월 평안도 영유(永柔'현 평안남도 평원군 동암면) 현령으로 발령이 나 임지로 가게 됐다. 그에 따라 가묘(家廟)가 비게 되자 부득이 임지로 9대조인 퇴계의 신주를 모셔가게 되었다. 그 행차가 같은 해 음력 9월 안동 도산을 떠나 평안도로 가는 과정에서 서울을 지난다는 소식을 접한 정조대왕이 "퇴계 선생 서거 후 신주가 도성을 지나는 일은 처음"이라며 신주를 받드는 제사인 치제를 모시도록 명을 내렸다. 그 장소가 성균관 동북쪽 반촌(頖村)이었다. 음력 9월 13일 치러진 이 치제에는 정조대왕의 명으로 당시 최고위직이었던 좌의정(당시 영의정은 공석)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해 조정관료 950명이 참석하였다. 950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조정의 관료 숫자가 1천 명 남짓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참석률이었다.
또한 치제에 직접 참석하지 못한 정조대왕은 반촌 과 가장 가까운 창덕궁(昌德宮) 월근문(月勤門)까지 행차하여 정중하게 퇴계의 신주를 향해 존숭의 뜻을 표시했다. 퇴계 이황의 신주 이동(안동-예천-용인-한양-개성-평양-순안-영유)의 전 과정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반촌치제일기(頖村致祭日記)다. 이 기록은 이지순의 족형으로 같이 퇴계의 9대손인 이헌순(李獻淳)에 의해 이뤄졌다. 거유대현(巨儒大賢)의 신주가 1천 리나 되는 장거리를 옮겨가 봉안된 것도, 임금의 지극한 관심 아래 조정의 관원이 거의 다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치제의 사례도 전무후무해 이 기록은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도 높다.
이 기록은 1958년 성균관대에서 만든 퇴계전서(退溪全書)에 수록됐고, 퇴계의 14대손으로 한학자였던 이가원(李家源) 전 연세대 교수에 의해 1996년 '조선문학사'라는 책을 통해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97년에는 일부 번역이 행해졌고 지난해 진성 이씨 퇴계 종손인 이근필(李根必) 옹의 의뢰로 허권수(許捲洙) 경상대 교수와 권갑현(權甲鉉) 동양대 교수에 의해 전문 번역이 이뤄졌다. 이것이 지난 3월 진성이씨상계문중운영회(眞城李氏上溪門中運營會)에서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척념무첨(惕念無忝)으로 돼 있는 건 진성 이씨 문중이 "임금과 국민들의 은혜를 잊지 말고 조심스럽게 생각(惕念)하고, 늘 노력하여 조상님께 욕되게 하지 말자(無忝)"는 뜻으로 더한 것이다. 224쪽.
진성 이씨 문중에서는 이 책을 무료로 배부하고 있다.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053-422-3618)나 진성이씨대구화수회(053-762-0703)로 연락하거나 찾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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