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23>-엄창석

입력 2017-05-29 13:08:32

짓누르던 사내들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튕겨나간다. 돌처럼 빳빳한 허리가 풀어지고 몸이 아뜩하게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지? 주위가 어둡다. 금릉은 오싹 추위를 느낀다. 바닥을 짚고 가까스로 윗몸을 일으킨다. 방에 탁자가 있고 술병과 안주 접시가 그대로 놓여 있다. 숯이 탄 잿속에 희붐한 잔불이 담긴 화로가 보인다. 방에 아무도 없어 다행스럽다. 허벅지 안쪽을 철사가 찌르듯이 쩌릿, 통증이 일어난다. 금릉은 흩어진 옷을 주워 몸에 걸친다. 옷을 입는 게 음부와 가슴을 가리는 짓이라는 자괴감이 든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 기생이니까. 앞으로 기생이 시와 노래를 버리고 몸을 팔아야 하니까. 금릉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때 문이 드르륵 열린다. 한인 집사가 얼굴을 들이밀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밝은 음성으로 집에 돌아가도 된다고 말한다.

"손님들이 눈이 온다고 자네 인력거 비용까지 계산해 줬어. 편히 돌아가게."

금릉은 어정쩡하게 집사 뒤를 따라 댓돌에 내려선다. 눈이 내리고 있다. 저녁 어스름이 끼고 있는데도 커다란 눈송이에 작은 불빛이라도 담긴 듯 마당이 환하다. 넓은 마당에 인력거가 들어와 있다. 인력거는 대구에 유입된 게 최근이어서 아직 타본 적이 없다. 레이스가 달린 지붕으로 장식된 소형 마차 모양의 인력거가 그녀를 태우고 성 안을 쏜살같이 달린다. 함박눈이 비스듬히 흩날리며 금릉의 무릎과 뺨에 달라붙는다.

기루로 돌아오자 금릉은 발소리를 죽여 방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침상 위에 몸을 던진다. 그러다 힘을 내어 저고리와 겉치마를 벗고, 이번엔 이불을 뒤집어쓴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죽고 싶다.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몸이 훼절되어 목숨을 버렸던 기녀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던가. 아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자 아련한 기억 하나가 가슴에 차고 오르는 것이다. 아주 어릴 때였다. 해성재 학우들과 소풍을 다녀올 때였으니까 열 살 무렵인 것 같다. 남문 밖, 아미산 비탈을 내려오다가 그만 미끄러진 적이 있었다. 비탈은 꽤 가팔랐다. 신발이 벗겨지고 치마가 훌러덩 뒤집혔다. 앞서 가던 임계승이 놀라 뒤돌아보았다. 넘어진 일이나 무릎에 피가 나는 것보다, 허벅지 살결이 한 뼘이나 드러났던 게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무릎이 아파 걷지 못하는 그녀를 임계승이 업었다. 금릉은 걸을 수만 있었으면 절대로 업히지 않았을 것이다. 계승이 나중에 결혼하자고 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지. 사내에게 허벅지 맨살을 보였으니까. 그날 등에 업혀 가다 큰시장에서 잠시 쉬었는데 피가 치마를 적셨지. 계승의 엉덩이에도 피가 묻었어. 피를 닦아주려고 치마를 걷으려는 계승의 손목을 세게 후려쳤지. "오빠, 손대지 마!" 계승은 바보같이 우물우물하다 등을 보이며 앉았어. "업혀, 얼른 가야지." "필요 없어. 걸어갈 거야." 그녀가 앙칼지게 내뱉었지만 계승은 한참 그렇게 앉아 기다렸어. 계승의 등을 생각하자 왜 그런지 울음이 터졌다.

"금릉아, 왔니?"

밖에서 앵무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예, 금릉은 입술만 달싹 뗀다.

"목욕물을 데워놓을 게. 씻고 쉬어라."

괜찮아요, 금릉의 대꾸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거야. 아주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이 치솟는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솟구치던 화가 거품 꺼지듯 풀썩 내려앉는다. 금릉은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다.

앵무 아주머니가 일꾼 김씨에게 목욕통을 옆방에 갖다놓으라고 지시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나무로 짠 둥근 목욕통은 평소에 거꾸로 뒤집어 뒤안에 놓아둔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옆방에 등이 켜지고, 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린다. 목욕통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듯 금릉의 침상 방까지 더운 습기가 전달된다. 그때까지 금릉은 꼼짝 않고 엎드려 있다.

준비 다했다는 김 씨의 말이 들리고, 금릉은 장지문을 열었다. 속속곳과 단속곳을 벗고 욕통으로 몸을 넣는다. 일인 사내들의 흔적을 샅샅이 씻는다. 난봉쟁이들이 휘저어놓은 가슴과 다리 안쪽을 손으로 빡빡 문지른다. 추잡한 입으로 자극했던 유두에 비누 거품을 듬뿍 묻혀 씻고 또 씻는다. "금릉아." 문밖에서 아주머니가 얼씬거린다. 문이 열리고 아주머니가 들어온다. 그림자처럼 방으로 육박해 목간통 앞,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선다. 금릉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석유등 불빛에, 벽에 비치는 그림자로 아주머니의 동작을 감지한다. 아주머니가 옆에 놓인 조롱박으로 물을 어깨에 끼얹으며 손으로 씻어준다. 아주머니가 그녀의 목욕을 도와준 적이 없었다. 동갑내기 설루나 다른 기녀 동생들이 등을 밀어주기는 했지만 아주머니가 그러진 않았다. 아주머니는 씻는 게 아니라 쓰다듬는 시늉이다. 앵무의 손바닥에서,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길의 조심스러움에서, 문득 금릉은 오늘 오후의 사건을 아주머니가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참 예쁘네. 허리와 젖가슴이 너처럼 고운 아이는 처음 본다."

금릉은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려다 그만둔다. 앵무가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어서라는 듯이 힘을 준다. 금릉은 마지못한 듯 욕통에서 일어선다. 몸에 묻은 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앵무 아주머니가 앞으로 와서 그녀의 배와 가슴에 손을 대는 모습을, 금릉은 벽에 비친 그림자로 바라본다. 앵무가 또 말한다. "내가 열여덟 살일 때 너만큼 어여쁘지 않았어." 금릉은 아무 말도 않고 눈을 감는다. 아주머니가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니?"

아주머니의 그 목소리는 낮고 잠잠한 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어떤 분노도 서려 있지 않다고 금릉은 느낀다. 감사의 명령조차 거절했다는 지조가 강한 앵무 아주머니였다. 그런 아주머니마저 맞설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몰려오고 있는가.

"아니요."

금릉은 조금 음성을 돋워 대답한다. 석유등불이 얼굴에 비치지 않게 얼굴을 튼다. 금릉은 다시 입속으로 아무 일도 없었어요, 대답한다. 금릉은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눈을 깜빡인다. 맞은 벽에 두 여자의 검은 그림자가 휘청 휘청, 포개지다 떼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지난밤에 석재 선생이 그녀의 속치마에 그렸던 풍죽(風竹)이 떠오른다. 거센 바람을 맞아 활처럼 휘어지는 대나무, 풍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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