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배지 노린 노동운동 곤란…비례대표 제안 소신껏 거절"
"이제 와 생각해보니 노동자와 함께하는 삶은 저의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20대 때 우연히 시작한 노동운동이 인생의 전부가 됐고, 70살이 넘은 지금은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대구지역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김경조(71) 전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은 그동안 정치 참여의 유혹이 많았지만 "노동운동을 발판 삼아 정치하는 것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력이 필요하고 노동자가 정치 세력화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노동운동이 정치권 진출을 위한 스펙쌓기여서는 곤란하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지방의회는 물론이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할 기회조차 고사했다고 했다.
◆얼떨결에 노조 간부가?
1947년 선산에서 태어난 김 전 의장은 구미초등학교 2학년 때 대구로 전학 와 대구서부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하루 3끼 배불리 먹어봤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경북공고 기계과를 졸업한 뒤, 최전방 12사단에서 철책근무를 마치고 26살 때 승리기계(쌍용중공업 대구공장의 전신)에 입사했다.
입사 4개월 만에 노조 간부가 된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조회시간에 회사 간부가 사규를 위반한 근로자들을 앞에 세워놓고 "……소나 개'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발언을 했다. 신입사원이었지만 근로자를 소'돼지에 비유한 것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손을 들고 벌떡 일어나 "잘못을 했다고 해서 어떻게 사람을 짐승에 비유할 수 있느냐?"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현장 근로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4개월 뒤 노조 간부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노조위원장이 되기까지 5년이 걸렸다.
당시 근로 조건은 너무나 열악했다. 회사와의 갈등이 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잔업을 시키고도 수당을 주지 않았다. 명백한 불법이었지만, 신군부의 5공화국에서는 파업을 할 수 없었다. 가장 강력한 합법적 수단은 태업이었다. 생산성은 급격히 떨어졌고 결국 회사 측은 두 손을 들었다. 그렇지만 "이제 노조는 절대 상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립에서 협력으로!
회사에서 상대를 해주지 않으니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화 창구를 여는 방법을 고민하다, '회사가 어려울 때 한 번 도와주자'고 결심하고 "1년 동안 점심시간 1시간 중 30분을 반납하고 무임으로 일을 더 해주자"는 제안을 했다. 일부 노조원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게 노조가 할 일이냐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나를 믿고 위원장으로 뽑아 주었으니 모든 것을 백지위임해 달라"며 대의원들을 설득했다.
7개월 뒤 회사 측에서 반응이 왔다. "이제 (점심시간 단축을) 그만 해라." 그리고 7개월간 반납한 점심시간과 생산성 향상분을 모두 계산해 연말 특별보너스 형태로 근로자들에게 돌려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사관계는 180도 달라졌다. 노조의 단결력이 높아지면서 생산성도 덩달아 뛰었다. 회사 측도 이익이 생기면 먼저 근로자들을 배려했다. 노사 간 신뢰가 쌓이면서 가장 모범적인 노사관계를 구현한 기업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 김재휴 사장이 "노조를 강하게 육성해야 회사가 발전한다"면서 전국에 강의를 다닐 정도가 되었다.
◆대구지역 노동운동의 대부가 되다
1984년 회사 측과의 합의 아래 김 전 의장은 전국금속노조 대구경북본부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노사합의에 따라 월급은 2010년 한국노총대구지역본부 의장을 마칠 때까지 계속 회사 측에서 부담했다) '구태의연한 전투적 노동운동의 방식을 바꿔 노동운동이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신군부의 노동운동 탄압은 극심했다. 산별노조는 기업별 노조로 전환되었고, 임금 인상은 한 자릿수 가이드라인에 묶여 있었다. 노사화합이라는 단어를 쓸 때가 아니었다. 강경 투쟁은 불가피했다. 가장 강력한 투쟁 수단은 태업이었다. 불법이 아니면서도 태업으로 인한 손실은 엄청났다. 김 전 의장은 정보기관의 눈엣가시로 인식되었다. 안기부로 끌려가 협박도 수차례 당했다.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 빨갱이다"는 음해도 끊이지 않았다. 정보기관 요원들이 (월급을 주고 있는) 회사를 방문해 "회사로 다시 불러들이라"고 반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때 고 김재휴 사장은 "(김경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리 회사를 이렇게 (좋은 회사로) 만든 사람이다. 끝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며 오히려 비호해 주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암흑의 시대가 걷히자, 김 전 의장은 눈만 뜨면 현장으로 달려가 노조조직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지금 대구경북지역의 노조 중 80% 이상이 이때 만들어졌고, 그 대부분은 김 전 의장의 손길이 미쳤다. 김 전 의장이 대구지역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쯤이다.
○○제지 노조 결성 때의 일이다. 야근 근무자의 퇴근에 맞춰 회사 부근 식당에서 노조결성식을 하고 있는데, 회사 총무부장이 잠시 보자며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가 하며 나갔더니 몇몇 어깨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옆에 있던 경찰은 본체만체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다시 식당에 들어가 절차를 모두 끝내고 본부에서 서류작업까지 마친 뒤, 병원에 갔더니 갈비뼈 3개에 금이 갔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1995년 2월 김 전 의장은 "노총이 살아 숨 쉬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너무 역할이 없다. 노총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에 출마해 당선된다.
◆이제는 생산적 노동운동의 시대로!
"의장으로서 대구지역 노동계 전체를 보니, 이제 전투적 노동운동을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부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노사가 서로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노사 대등의 단계로 가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김 전 의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는 노사상생에 초점을 두었고, 한국경영자총협회와의 대화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15년간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을 지내면서 역대 대통령들과의 일화도 많았다. 대선 후보 시절 DJ와의 인연(한국노총 16개 본부 중 유일하게 대구에서만 간담회를 허락)은 '대구근로자종합복지관'이란 선물로 돌아왔다.
이미 노동운동으로 인연이 있었던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의 일화는 더 극적이다. 노 대통령이 엑스코에서 대구지역 인사들과 만남을 가질 때, 질문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런데 엑스코 현장에서 느닷없이 김 전 의장이 손을 번쩍 든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싱긋 웃으며) "한 말씀 하세요."
(김 전 의장) "대구경북에 산재병원이 하나도 없습니다. 울산이 아니라 대구에 먼저 산재병원을 지어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지어 드릴게요."
(이번엔 권기홍 노동부장관이 손을 들고) "대통령님, 그건 장관이 결정할 일인데요?"
(노무현 대통령) "대구에 (산재병원을) 짓는 것은 제가 결정하고, 규모 등 세부적인 것은 장관이 결정하세요."
이렇게 해서 1천700억원을 들여 칠곡경북대병원 인근에 근로복지공단 대구병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빨간 머리띠, 빨간 조끼는 이제 박물관으로 가야 합니다. 이런 것 없이도 노동자들의 주장이 전달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노동자들도 내가 만든 제품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세와 사회와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김 전 의장은 이것을 '생산적 노동운동'으로 설명했다.
◆'대구외국인력지원센터'는?…외국인 근로자-사용자 모두를 지원하는 역할
김경조 전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은 2010년부터 '대구외국인력지원센터' 센터장으로 여전히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사실 명칭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 원래는 '대구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였다. 하지만 사용자들이 노조단체로 오해하고 꺼려하는 바람에 '대구외국인력지원센터'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국인 인력 공급 업체로 오해를 하는 사람이 생겼다.
대구외국인력지원센터는 대구경북 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 근로자와 이들을 고용하는 사용자 모두를 지원하는 역할을 정부의 위탁을 받아 수행하는 기관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는 각종 고충 상담과 교육 등을 하고, 고용주를 대상으로는 주로 고용허가제 및 다문화, 노동법에 대한 교육을 한다. 사용주와의 소통을 위해 산업현장을 찾아나서는 경우도 있다.
이용자들은 생각보다 많다. 일요일에는 500명 이상이 몰린다. 그래서 사무실을 현재의 위치(대구도시철도 2호선 대실역 1번 출구 앞 진광타워)로 옮겼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무료 진료와 이'미용 서비스, 컴퓨터 및 법률'안전'생활적응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한국어 교육'이 최고의 인기이다. 한국어는 당장 생활에 필요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고국에 돌아갔을 때 현지 진출 한국기업에 취직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대구센터는 전국 9개 센터 중에서 문화행사가 많은 곳으로 꼽힌다. 아시아스마일페스티벌(5월 21일), 한국문화탐방(상'하반기), 각 나라별 공동체 행사 등이 펼쳐진다. 3, 4년간 대구에서 생활한 외국인 근로자 상당수가 팔공산조차 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대구시 등의 도움을 받아 김경조 전 의장이 특별히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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