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암컷인 까투리가 한 마리씩 그릇에 들어 있었다. 밤 대추 인삼 황기를 넣은 탓에 향기가 은은하게 어려 있고 맛이 고소했다. 꿩 고기가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겨울 음식으로 제격이라고 서요가 말했다. 후루쇼는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전주에서 당나귀 고기를, 봉화에서 두루미 회를 먹었고, 홍천에서 기러기 고기를 먹었는데 대구는 마땅한 게 없다며 투덜댔다. 꿩고기는 어디서든 즐기지 않느냐고 했다. 온돌방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 마흔 살쯤 된 여주인이 들어와 생글생글 웃으며, 며칠 전에 야마모토 각하께서 오셨다고 일렀다. 야마모토는 박중양의 일본 이름이다. (그 무렵 박중양은 대구 군수와 겸직하던 관찰사 서리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에 백남준 임명되었다.) 서요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오, 그래요? 고기만 드시고 그냥 가셨나요?" "에이, 그냥 가실리가요." 여주인이 고개를 젖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식탁 위로 음탕한 웃음이 흘렀다. 아무튼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정종도 몇 순배가 돌았다. 권종성은 취기를 얼큰히 느끼며, 불쑥 임계승을 입에 올렸다. 저번에 광문사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임계승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아, 달배(월배) 사람 말이지."
후루쇼는 임계승을 잘 기억했다.
"부산 초량에서 바다 매립을 하다가 대구로 왔지요. 여기가 고향이라 금방 옛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그게 대체로 달성회 회원들인 것 같습니다."
후루쇼가 꿩 날개를 빨다가 고개를 들었다.
"달성회?"
후루쇼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다. 10여 년 전인 1898년에 설립한 수창사가 이제 거부가 된 한때의 상인들 출신의 모임이라면 달성회는 장사 경력이 일천한 이삼십 대 젊은 상인들의 회합체였다. 공교롭게도 달성회는 일인 상인들이 대구로 대거 진출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다보니 점차 결사체 성격을 띠었다. 그게 수창사와 큰 차이점이었다.
"읍성이 무너진 뒤로, 달성회 동향은 예사롭지 않은데 말이야....."
서요는 달성회가, 자기 아버지가 관여하는 광문사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듯 혼잣말을 했다.
"최근에 달성회가 모임 장소를 옮겼습니다. 남문 밖 교남상회에 모이다가 요즘 큰시장 안에 장소를 정했습니다."
그때 후루쇼 옆에 앉은 사내가 일어로 말했다. 그 사내는 그때껏 탁자 귀퉁이에 앉아 고기만 뜯고 있었다. 권종성은 여기서 그를 처음 보았다. 쓰시마 출신으로 이름이 우치타라고 했다. 읍성을 허물 때 부산에서 대구로 왔다가 그 후 이곳에서 죽 머무는가 보았다. 권종성은 뒤늦게 그와 수인사를 나눴다. 악수를 하는데 손바닥이 놈의 눈빛처럼 차가웠다. 밀정인가? 후루쇼가 데리고 왔으니 그럴지 모른다. 그가 달성회의 활동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후루쇼가 둘을 경쟁시키고 있지 않나 싶었다. 사실 밀정이나 첩자는 어디에든 있었다. 관청에도, 상가에도, 심지어 감영의 진위대 안에도. 다만 암살이 일어나고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한, 밀정이 하는 것은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 그칠 것이다. 감옥에 갔을 때 후루쇼가 말하지 않았던가. 도시는 의병이 거병하는 장소가 아니라 시장이라고. 의병을 만들면 시장은 파괴된다고. 그러나 언제까지 시장으로만 볼 것인가?
지난 달 그런 일이 있었다. 대구의 전환(錢換) 상인 한 명이 상주에서 화적에 당한 사건이었다. 한국인 여관에서 자다가 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마차에 실려 대구로 왔다. 증거가 잡히지 않았지만 달성회가 상주 의병들에게 비밀리에 통보를 한 사건으로 일경은 의심하고 있었다.
후루쇼가 싸늘한 목소리로 권종성에게 말했다.
"권 군도 알고 있었나?"
"뭘...... 말입니까?"
"달성회 아지트 옮긴 거 말이야."
"아, 처음 들었습니다."
권종성은 황황히 고개를 저었다. 뱀눈을 번뜩이는 우치타란 사내와 정보력을 타투고 싶지 않았다. 한발 물러서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우치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잘 살펴보게. (서요를 돌아보며) 사람들 눈을 피하려고 오히려 시장으로 옮긴 거 아니겠습니까? 장이 서면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하니까요. 누가누군지 어떻게 알겠어요."
후루쇼가 입술에 비웃음을 띄웠다. 권종성은 새로 옮긴 달성회의 아지트를 알고 있었다. 장상만의 면포가게 뒤쪽, 물품 창고였다. 오일 시장이 설 때 곱사등이 오돌매와 지물포 사 씨와 마부 정 씨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뿐이었다. 사실 더 이상 캐고 싶지 않았다. 달성회가 지방 의병과 연결되어 있다면 여간 두려운 게 아니었다. 어쩌면 큰시장을 뒤흔드는 뇌관이 될지 모른다.
후루쇼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요즘 하타모토 씨가 대구에 와 있어요. 중국 여순에서 무역상을 했는데, 러시아 군의 포대 위치나 방어선을 정탐해서 우리 군에 알려주었지요. 우리 함정이 러시아 군항을 기습할 때 크게 공을 세웠어요. 전쟁은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하타모토 씨 같은 분들이 있어서 이기는 거요."
하타모토와 같은 짓을 하라는 것인가, 권종성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상한 취기에 휩싸였다. 앞에 놓은 정종을 거푸 마셨다. 갈등의 골을 술만큼 손쉽게 매워주는 것도 없었다. 두려움이 까닭모를 흥분으로 바뀌고 갈등은 느닷없는 자신감으로 전환되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보니까 우치타는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다. 좀 전과 다르게 놈이 아주 하찮게 보였다. 홀에 나와 보니 손님들을 배웅하려고 여관주인과 여급들이 모여 있었다. 어느새 바깥은 컴컴했다.
"하하, 우린 가고, 권 군은 내일 아침에 나오게."
후루쇼가 어깨를 툭 쳤다. 권종성은 깜짝 놀랐다. 홀을 휘둘러보았다. 안쪽 페치카 옆에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다소곳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식사를 하기 전에 차를 따르던 일본 여자, 흰 손등에 파란 정맥이 그어져 있던.
권종성이 얼어붙어 있는데 다들 현관을 빠져나갔다. 여관 인부가 뒤채에서 말 두 마리를 끌고 왔다. 후루쇼와 서요가 말에 올랐다. 인력거는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인력거는 서요가 아니라 기모노가 타고 온 것 같았다. 후루쇼와 서요를 태운 말이 점점 멀어졌다. 우치타는 약간 절뚝거리며 영선못 옆으로 난 길을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매운 바람이 꽝꽝 얼은 영선못을 핥으며 불어왔다.
"도우죠, 오헤야니." (저어, 방으로 들어가셔요)
여자의 나긋한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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