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절·효부? 이의 있습니다! 여성성 찾고자 했던 사람들

입력 2017-05-06 00:05:08

악녀의 재구성/ 홍나래 등 3인/ 들녘 펴냄

"역사 속 악녀 재해석 통해 여성성 회복"

현모, 양처, 내조의 여왕, 열녀, 효부, 효녀….

경구(警句)나 고전에서 나오는 '귀감이 되는 여성'들의 전형이다. 이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이라는 권력과 가부장 체제라는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여성을 이처럼 규정하는 사회적 편견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사 속에서 드러나 있지 않던 여성들의 일상을 복원하고 남성 못지않은 역량과 지혜, 인품을 갖춘 여인들을 현실로 불러내고 있다. 신라시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정절'이나 '모성' '효열'(孝烈)에서 과감히 벗어나 여성성을 찾고자 했던 문제 여성들을 들여다본다.

◆모성 이데올로기의 실종 이유=저자들은 고전을 연구하며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들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다고 말한다.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적은 게 아니라 모성(母性) 이야기 자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한석봉의 어머니 같은 이야기들은 어디로 갔을까. 왜 이야기 속 어머니들은 자식에 무심하고 때로 자식의 비밀을 발설해 위기에 빠뜨리며 심지어 이런저런 이유로 자식을 죽이기까지 했던 것일까. 물론 아동들의 사회적 지위가 지금과 달랐던 시대적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 책은 강력한 효열 이데올로기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 '혐의'를 두고 있다. 즉 당시 여성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던 정체성은 어머니보다는 며느리, 아내로서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고 강요하면서도 모성을 우선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전근대 사회체제에서 '모성'의 실종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냈던 것이다.

자결함으로써 서얼 출신 아들의 신분상승을 얻어낸 '희생의 아이콘' 양사언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모성에 기인한 희생'이라기보다 '자식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등치시킨 열혈 엄마'로 해석하고 있다.

◆역사 속 '문제 여성들' 들여다보기=저자들은 현대까지 영향을 미친 역사 속 '문제적 아내들'을 주목하고 있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아내의 지위와 역할, 아내에게 기대하는 바가 항상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처첩의 위계와 일부종사의 개념을 세운 조선 초기나, 종법제와 가문의식이 신분 상승의 욕망과 맞물려 강화된 17세기 이후, 그리고 가부장 사회에서 억압받던 여성의 자의식이 도처에서 고개를 들던 근대 말에 이르러 여성상 역시 크게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 변동의 시기에는 특히 아내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고민들이 담론장을 통해 공유되면서 새로운 인물상이 등장했다. 대표적 인물이 정실의 자리를 차지한 한명회의 후첩(연일정 씨)과 동성혼으로 새로운 부부상을 꿈꾼 방한림의 처 영혜빙 등이다. 부부와 가족 개념이 재정립되는 오늘날 전통시대 여성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던 이들의 행적을 살펴본다는 것은 자체로도 흥미로운 일이다.

◆열녀 이데올로기를 벗어던진 여인들=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가 익숙한 시대에 열녀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이미 식상하거나 지루한 일로 치부된다. 현실에서 열녀를 미화하면 남존여비의 부조리한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자극하는 꼼수로 배격되고, 또 열녀를 폄훼하는 것은 여성의 몰주체성을 일반화시킬 위험이 있어 불편하기 때문이다.

성적 주체로서 여성의 자발적 선택과 행위들이 각광받고 소위 '나쁜 여자'가 '착한 여자'보다 매력적이라 통하는 이 시대에 열녀는 오히려 낯설게 다가온다.

저자들은 남편의 죽음 이후 평생을 수절하거나 혹은 자결한 열녀들, 즉 우리들의 문화적 기억 속에서 열녀들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있다. 대신 여성의 온몸을 칭칭 감았던 '정절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열녀라는 사회적 통념에 거부했던 여성들을 불러내고 있다.

이 책은 여장 남자 사방지를 끼고 살았던 이순지의 딸 이 씨, 본처를 죽인 '독살 미인 김정필' 등을 통해 전통시대 열녀, 열부 관념에서 과감히 탈출했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죽음을 넘어 신의 영역에 이른 여인=전통시대 여성 욕망은 현세에 그치지 않고 초월로 비상하기도 했다. 여성의 분노는 죽음을 넘어서 신적 영역에까지 뻗치고 있었다. 떠나간 남편을 원망하는 박제상 부인의 집요하고 독한 마음은 환상 속에 스스로를 가두다가 마침내 돌이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가 열녀라고 칭송하기도 하고 신으로 섬기기도 한다. 저자들은 여성 욕망이 죽음 너머 종교와 제의의 영역까지 침범해가는 정황을 살피고 있다.

절망 속에서 좌절하며 목숨을 놓았던 여성들이 죽음을 넘어 신적 능력을 펼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거나 공동체를 정화시키는 신성(神性)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이화여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던 세 저자(홍나래, 박성지, 정경민)는 페미니즘적 시각, 인간의 기본권적 차원에서 여성들의 삶과 인격, 정체성을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덧씌워진 낡은 이데올로기를 하나씩 지워내며 여성성을 회복시키고 있다. 309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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