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존재와 부재 사이

입력 2017-05-04 00:05:00

"속에 것 다 덜어내고/ 기우는 무게중심// 못 갖춘 마디마디/ 속살에 바람인다// 가쁜 숨 내려놓으며/ 물고 가는 땅거미.

가파른 직립에는/ 기댈 수 없는 그림자// 그 높이 내려앉으며/ 포물선을 그릴 때// 어머니, 지고 오신 풍경/ 저녁놀에 부린다." - 졸시 '등'

방바닥에 등을 맞대고 이틀 꼬박 몸살을 앓으며 이리저리 뒤척여 보아도 몸이 마음처럼 쉽게 일어나지를 못한다. 초등학교 방향에서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로 짐작하건대 이 시간, 운동회가 열리나 보다. 아! 오월이구나. 창밖의 햇살만으로도 쉽게 짐작이 가는 계절이다.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 알록달록 꽃을 단 고깔모자를 쓰고 작은 북에 장단 맞춰 응원가를 부르던 시절, 그 번잡한 운동장 한구석에 어머니는 그림처럼 앉아계셨다. 그때부터 이미 허리가 조금씩 아팠다는 것을 그 후로 한참 지나서 알게 되었다,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많은 것을 아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기에 또 오랫동안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존재와 부재 사이에 시간이 있고 그것이 곧 기억일 테니,

어쩌다 가만히 있는 혀를 깨물어버렸다. 사실은 제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던 혀를 깨물었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이다. 음식이 놀랍게 맛이 있었다거나 배가 너무 고픈 것도 아니었는데 잠시 마음의 평정을 잃어 씹는 과정에 박자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아찔했고 침과 함께 한 움큼의 피를 뱉어야 했다. 우물우물 적당히 넘기고 서둘러 식사를 끝냈지만, 그 후로 모든 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더 큰 일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찬 것도 뜨거운 음식도 먹기 어렵고 맵거나 자극적인 것은 물론이고 말할 때조차 불편할 만큼 발음이 새기도 했다. 그래도 바쁜 일들에 치여 제대로 돌보지 않았더니 급기야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몸살을 선물 받았다. 아프기 전에는 혀의 기능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고 잘 몰랐는데 상처가 나고 보니 '입안의 혀'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겠다. 음식을 잘 씹을 수 있도록 요리조리 제 몸을 굴려서 올리고 내리기에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하는지, 게다가 침샘을 길어 올려 음식의 맛을 돋우는 역할까지 묵묵히 지켜온 제 나름의 역사가 일제히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쩌면 결이 다른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많은 것이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게 아닐까?

내 '속살에도 바람이 인다.' 이 계절에는 특히 어머니가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온통 마음이 휑하다. 당장 전화 한 통화만이라도 할 수 있는 곳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나, 지금 많이 아파요." 이 말만 전해도 금방 나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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