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가까운 곳에 친구가 있다

입력 2017-04-08 04:55:01

봄은 뿔 달린 짐승처럼 힘이 세다. 땅에서는 온갖 것이 속속 돋아 오른다. 봄이란 글자에 뿔을 두 개 달고 있는 것이다. 먼저 오른 것이 쑥이요, 원추리요, 머위다. 머위와 원추리는 데쳐서 먹으면 어떤 반찬도 부럽지 않다.

청명과 한식, 식목일을 지나니 기온이 날마다 올라서 겨울옷을 벗었다. 비가 자주 왔다. 나무들은 봄 안개에 비를 머금어서 꽃들도 만개한다. 봄이 오면 방 안의 물상들이 시들해지고 자주 창문을 열어 두고 밖을 내다보게 된다.

삼월 삼짇날 남도에서 편지가 왔다. "완전한 봄이 되었네. 이름 없는 야산에도 최고의 선물은 매화 한 송이로 충분하다네."

음력 3월 3일은 3이 겹쳤다 하여 중삼(重三)이라 하며, 단오를 중오(重五), 9월 9일은 중구(重九)라고 하며 중양(重陽)이라고 부른다.

차나무는 남방에서 자란다. 지금은 생육 한계선이 북쪽으로 올라 대구에서도 차나무가 잘 자란다. 신농(神農)은 차의 시조이자 농사와 의약의 신이다. 차는 이제 세계인의 기호 음료로 커피와 함께 완전한 식품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 이름은 알가(閼伽)라고 하며 감로라고 부른다. 차는 만덕을 갖춰서 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고 먼 친구를 모이게 한다.

신라 경덕왕(742~765) 때의 일이다.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삼짇날과 중양절에 차를 올렸다. 그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안민가를 받쳤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어미라. 백성을 아해로 여기시니, 백성이 은혜로 알지니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자연히 태평하리라." 이른바 '답게' 철학이다. 우리 정신문화의 정점에 차문화가 자리했다.

빠름과 경쟁의 세상에서 차는 번뇌를 쉬게 하고 사람의 품격과 멋을 향상시켜 왔다. 사람은 속 멋이 깊어져야 진정한 차인이 되는 것이다.

매화를 좋아해 심었더니 친구가 없어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혼자 차를 마시려니 적조하여 달을 불러 차를 같이 마신다.

참배차 비슬산 대견사에 올랐다. 사람들이 다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기도하는 사람과 등산객이 산을 이루고 일연 스님의 못다 한 남은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 이제 대견사는 영남의 성소가 되었다. "한 잔 두 잔 찻잔을 기울임에 속진이 씻겨지고, 신선이 된 듯 신선과 놀고, 또 한 잔에 부처가 된 듯 부처와 놀고, 또 한 잔을 기울이니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개미처럼 숨 쉬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 있다. 그 한 사람으로 하여 다시금 우리들은 희망을 만들어간다. 비슬산 호랑이와 삼각산 호랑이가 꼭 친구가 될 필요가 있을까? 앉은 자리가 꽃자리다. 지금은 꽃 세상이다. 봄꽃에는 벚꽃 만한 게 없다. 그중에서도 산벚꽃은 새들이 씨를 뿌린다. 무리지어 피어서 화려하지 않아 깨끗하고 요란하지 않아 눈 내린 듯 아련하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의 판단을 유도하는 것이다.

봄은 생명의 시작이다. 생명은 여리고 강인하다. 봄날 화단에 차씨를 심고 담장 계단에 찔레꽃 뿌리를 심었다. 이 봄날이 지나가도 오래오래 생명의 꽃을 피우길 기도한다. 미국 시인 랭스턴 휴즈는 "봄은 재즈같이 자유롭고 발랄하며 힘이 넘치고 신명이 난다"고 노래했다.

봄날 차 도구를 챙겨 삼가헌 하엽정에 갔다. 하엽정은 건축사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주거의 한 공간을 정원으로 만들어 정자를 세웠다. 파산서당기(巴山書堂記)에 건축 과정을 자세히 남겨 놓았다.

비 오는 날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어보라. 마을과 멀고 고요하며 19세기 우리 고장의 명품 차실이다. 찻물은 최정산 산수가 일급수이다. 가까운 곳에 친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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