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오면서 봤냐? 성이 무너졌어. 여기선 안 보이지. 밤새 도시 뒤통수를 까버리고 부산으로 튀었어."
17살 때 헤어진 장상만은 어깨가 벌어지고 고수머리에 턱수염도 꼬불꼬불한 힘깨나 쓰는 장정으로 변해있었다. 계승과 한참 얼싸안고는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은 뒤, 참을 수 없다는 듯 북문에 갔다 오는 길이라면서 성 얘기를 꺼냈다.
"그래?"
계승은 모른 척했다. 눈을 부리부리 뜬 장상만에게 '나도 밤새도록 성을 헐었어' 하고 실토할 수 없었다.
"곧 대시가 열리잖아. 모두들 장사 준비한다고 정신없는 틈에 그걸 헐어버리네."
씹어뱉듯이 던지는 장상만의 말에 계승은 왜 그짓 하냐고 짐짓 동조하는 투로 응대했다.
"돈 때문이지. 지금 대구에 와 있는 일본놈들은 전부 돈 벌 기회만 노리지. 벌써 북문 밖은 거의가 일본놈 땅이야. 이제 성을 없애고 도시를 다 차지할 참이지."
계승은 아침부터 보았던 북쪽 성벽 바깥으로 늘어선 일인 상점들을 떠올렸다. 장상만이 수년 만에 친구와 만났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듯 "우리 술이나 한잔하자."하고 웃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망경루 서북쪽에 대야동 있잖아? 거기 저지대 말이야. 이놈들이 거기 유곽을 지으려고 성을 허는 거야. 성 헐은 토석으로 그걸 메워서. 그 땅 수천 평이 왜놈 소유거든."
"유우카쿠를?"
계승은 유곽을 잘 알았다. 이때만 해도 초량 아미산에 있는 유곽은 특이한 장소였다. 일인 인부들이 일주일에 한번 있는 목욕을 기다리는 것도 유곽에 가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돈 버는 데는 물과 여자만 한 게 없다지만 이건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하네."
성을 부순 게 상권을 넓히기 위해서라는 건지 유곽을 짓기 위해서라는 건지 상만의 말은 애매했다. 그러나 따져보면 같은 소리였다. 성을 허는 것도, 그래서 유곽을 짓는 것도 돈을 버는 방법이니까.
상만이 종이를 가져와 "지금 왜놈 상점이 어디까지 침범해 있느냐면 말이지." 하고 붓으로 대구 지형을 그릴 때였다. 가게 앞에 무엇이 얼씬거리는 것 같았다. 계승이 뒤를 돌아보다 소스라쳤다.
곱사등이였다. 망경루부터 자신을 뒤쫓고 있었던 곱사등이. 얼핏 다리가 없고 머리만 있는 사람 같았다. 키가 앉아 있는 계승의 턱이 미쳤다. 검고 팽팽한 얼굴에 광대뼈가 불거져 살쾡이 같은 인상을 풍겼다. 자신을 뒤쫓지 않았다 해도 마주보기가 꺼려지는 얼굴이었다.
"돌매야, 아까 보이지 않더니 어디 갔다 왔어?"
계승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곱사등이가 자신이 성을 무너뜨린 인부 중 하나란 걸 알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뒤를 밟을 리가 없었다.
"임...계승입니다. 달배(월배, 月背)가 고향이에요. 예전에 사문진과 큰시장을 왔다다 하며 장사했죠. 잠시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계승은 일어나 허리를 굽혀서, 친근한 목소리로 자신이 무너진 성과 무관하다는 걸 넌지시 강조하며 인사를 했다. 곱사등이가 비웃듯 코를 벌렁거리며 "난 오돌매요." 커다란 손을 흔들고 옆자리에 앉았다.
상만은 오돌매를 보지도 않고 붓으로 성을 그린 뒤에 전체적으로 대각선을 그었다.
"망경루(북장대)와 남장대를 이은 선에서 오른쪽이 죄다 일인 지역이야. 애들 빨아먹는 눈깔사탕부터 종이, 연필, 석유, 담배, 벽돌... 뭐 닥치는 대로 취급해. 러시아 전쟁 후엔 군용물자까지 가져와 우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식아, 연초 가져와."
상만이 심부름꾼 아이를 불렀다. 아이가 연초 봉지를 가져오자 일어나서 곰방대에 잎담배를 재웠다. 장상만이 자리를 비운 틈에 곱사등이가 계승의 소매자락을 거칠게 당기며 귀엣말을 속삭였다.
"난 당신이 성을 무너뜨렸다는 걸 알아."
계승은 상체가 휘청일 만큼 놀랐다. 짐작은 했지만 쇠로 바닥을 긁는 듯한 음성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냥 품을 팔았던 거다. 성을 부수든 성을 세우든, 기차비를 안내고 대구 오는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계승은 침착하려고 애를 썼다. 왜 그런지 곱사등이는 곰방대를 돌리는 장상만에게 아무일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계승만 들어라는 듯 묘한 말을 했다.
"처음 성을 허물려고 인부를 구하던 칠성동 최가가 칼에 맞아 죽었소. 누가 찔렀는지 알 수 없소.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거든. 경무관이 나서서 수색을 지휘하고 있지만 대놓고 하지 않아. 야단을 부릴수록 관심이 커지지 않소? 살해 이유가 분명하거든. 흥, 뭔 말인지 알겠소? 성은 조금 무너졌지만 부민들은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어."
곱사등이가 곰방대를 힘차게 빨았다.
그때 심부름꾼 아이가 상만에게 사문진에서 면포가 도착했다고 알렸다. 밖에 말 한 필이 수레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저녁에 다시 만나자며 상만이 일어섰다. 곱사등이가 손바닥처럼 면상을 위로 젖히며 내뱉었다.
"이제 전쟁이야. 끝까지 버틸 거야."
곱사등이의 말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성을 허물었던 자를 끝까지 찾아다니겠다는 건지, 성을 허문 일본 상인 세력을 막겠다는 건지. 아무튼 계승은 끔찍한 쇳소리를 내는 곱사등이에게 겁 먹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곱사등이의 튀어나온 등을 툭 치며 지껄였다.
"항아리가 들어 있는지 옷을 들쳐보고 싶네."
오돌매의 눈이 희번뜩였다. 상만이 왜 그러냐는 투로 계승의 어께에 팔을 둘렀다. 계승이 과장스럽게 미안하다는 시늉을 했다. 상만이 "다 좋은 사람이야. 저녁에 셋이서 술 한잔 하자고."하고 말했고 오돌매는 벌서 마차에 가서 이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계승은 얼른 가계를 빠져나왔다. 곱사등이가 뒤쫓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만 해도 숨 쉴 만했다.
계승은 시장 안으로 들어갈수록 장상만의 말을 실감했다. 예전과 많이 달랐다. 대시가 코앞인데도 빈터가 듬성듬성 있었고 가설 점포를 만드는 기색도 없었다. 시장 초입만 분주했던가 보았다. 무수한 마필을 먹일 짚이 준비된 것 같지도 않았고, 수만 명 상인들이 가져올 물건을 놓을 곳조차 없어보였다. 그만큼 일본 상설 점포들이 평시에 물건을 소화해버린 셈이었다. 철도로 운반하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시장도, 도시도, 7년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장상만이 종이에 그린 그림이 이날 계승이 다녀본 거리를 확연히 느끼게 해주었다. 성 안팎과 성 둘레를 아울러 둘러보지 않았더라도 넉넉히 알 수 있었다. 성의 북서쪽 모퉁이인 망경루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엔 일인이 왼쪽인 한인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 아닌가. 부채를 펴듯이 상황은 선명했다. 일인이 고작 2천명에 불과하다. 그 수가 한인에 비해 열의 하나인 셈일 테지만 힘은 대단해서 도시를 절반으로 쪼개고 있었다.
이제 전쟁이야.
곱사등이의 말이 생각났다. 곱사등이가 계승에게가 아니라 대립하는 상권을 두고 내뱉은 소리인지 모른다. 이제 성을 무너뜨렸으니까 급격하게 성안을 잠식하겠지. 곧 유곽도 세우겠고. 계승은 북문 밖에 있던 왜식 여관과 화려한 요리집과 상점들이 성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광경을 상상했다. 전쟁터의 말처럼 밀려오는 왜식 건물들, 저 나라 인종들, 풍습들. 성안의 기와집과 아직도 수천 채가 남은 도시 서쪽의 초가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계승은 이것이 돈의 힘으로만 가능할까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성을 무너뜨리고 유곽을 세우는 힘의 배후가 무엇인지 생각하다 애란의 집 근처에 이르렀다.
시장 후미까지 왔지만 애란의 집이 보이지 않았다. 시장 뒤가 그렇듯이 꼴사나운 누옥 몇 채가 끝난 뒤로 집 같은 집이 없었다. 초가 한두 채가 골격만 남은 처마를 땅에 처박고 있을 뿐이었다. 그 중 하나가 애란의 집 같기도 했다. 몇 개의 기둥이 구릉에 꽂혀 있고, 부서진 낙엽이 오후 햇살을 안고 몰려다녔다. 넓은 구릉에는 푸성귀도 많이 자라지 않아 황폐해보였다. 계승은 돌아서서 담배를 물고, 성냥이나 아끼려고 아궁이에 불을 넣은 시장 끝 집으로 갔다.
"저긴 뭐하는 데죠?"
갑작스런 예감이 있어 그렇게 물었다.
"뭐 소를 잡지요. 저기서."
늙은 여자가 계승에게 짚에 붙은 불씨를 건네며 퉁명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군데군데 흙빛이 붉었다.
"종종 사람도 잡아요. 화적인지 의병인지 모르지만, 장날 되면 그래."
애란의 집 앞 빈터가 사형장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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