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

입력 2017-03-18 04:55:06

미안하지만 희망을 노래하련다/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중략)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 담아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부분)

기형도는 1989년 3월 7일 서울 종로의 한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 청년의 투명한 우울은 도시의 거리에서 맞닥뜨린 아픈 시간들을 결국 견디지 못했다. 시집 출간을 앞두고 꼼꼼하게 원고를 정리하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래서 더욱 쓸쓸했다. 이미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1980년대의 거대담론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고, 1980년대 말의 시대 풍경은 개인적인 우울의 변두리로 힘겹게 진입하고 있었다. 장석주는 '다가오는 1990년대 시의 한 징후였고 예감이었던 한 섬세한 자아는 이 세계의 부조리성과 뜻있음의 결핍에 대한 진지한 성찰 끝에, 그의 넋에 각인된 악몽의 현실들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 불안과 자학과 절망을 넘어서서, 삶의 한 원리를 제시한다'고 기형도를 말했다. 그리고 28년이 지났다.

여전히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얼굴은 절망과 우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너무나 작았던 그들의 남은 존재마저 잃어버릴까 봐 거리로 나오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하루의 삶을 영위하느라 피곤으로 지쳐 쓰러지고, 아들과 딸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그들만의 공간에서 신음한다. 건물과 자동차는 더욱 화려해지는데 거리에는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로 넘친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희망을 쉽게 말하지만 쉽게 내뱉는 희망은 신기루와 같아 오히려 개인의 희망을 억압한다. '주저앉으면 그뿐'이지만 존재의 내면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존재의 행복을 고집한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은 여전히 무겁다.

정거장은 버스나 열차가 일정하게 머무르도록 정하여진 장소다. 사실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은 정거장이다. 만남과 떠남이 공존하는 장소, 시작할 수도 있고 끝날 수도 있는 공간, 그러면서도 잠깐 머무는 곳, 그곳이 바로 정거장이다. 바로 그 정거장에서 기형도는 충고한다. '나는 이미 늙'었지만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라고. 서른 살밖에 먹지 않은 젊은이가 늙었다고 고백하는 것도 마음이 아프지만, 자꾸만 앞에 붙은 '미안하지만'이라는 단어가 걸린다. '미안'(未安)은 내가 저지른 어떤 부당한 행위에 대한 내 마음의 움직임이다. 지금까지 희망을 노래하지 못한 죄책감을 포함한다. 나아가 내가 노래하는 그 희망이 공허할 수 있다는 '불안'(不安)도 포함한다. 어쩌면 그런 마음의 완벽한 고갈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에 몸부림치고, 진정으로 미안해야 할 사람들이 조금도 미안함을 표현하지 않는 시대. 조금도 다르지 않은 1989년과 2017년. 그것이 어쩌면 살아남은 우리가 기형도에게 진정 미안해야 할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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