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일회용 시대

입력 2017-03-15 04:55:01

일회용 컵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일회용 티백 하나를 까서 넣고, 서너 번 휘휘 흔들고는 쓰레기통에 툭 던진다. 서류를 뒤적이며 전화 응대를 한다. 전화를 받으며 메모를 하고, 자판을 두들긴다. 정신이 없다.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바닥을 드러낸 종이컵.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한 잔을 준비한다.

책상 위에 일회용 컵 서너 개가 널브러져 있다. 손바닥으로 아가리를 움켜쥔다. 탁탁탁, 잽싸게 컵에 컵을 포개어 쓰레기통에 툭 던진다. 톡톡, 물티슈 두어 장을 뽑아 컵이 사라진 책상을 닦는다. 오늘 하루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버린 일회용품들이 쓰레기통에 가득하다. 누구는 물 한 모금을, 누구는 한 끼 식사를 위해 거리낌 없이 일회용품을 사용했을 것이다. 편하고, 위생적이고, 값도 싸서 쉽게 다가오던 것들. 마음만 먹으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수도 있겠다.

방문객에게 차 한 잔을 건넸던 적이 있다. 일회용 컵에 담긴 일회성 차 한 잔이었다. 얼마 후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그날의 방문객이었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몹시 갈증을 느끼던 차에 나를 만난 것이었다. 내가 무심히 건넨 차 한 잔에 목을 축이고, 무심히 해주었던 말에 여행이 더 행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른 봄, 두메산골에서 그가 직접 따고 말려 수차례 덖어 만든 매화차라 했다. 그의 매화는 다기 안에서 서서히 피어났다. 나는 그를 까맣게 잊었지만 나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그에게 미안하고 감사했다.

세상이 온통 일회용으로 변해간다. 일회성 직업이 생겨나고, 잠깐 부리고 마는 일회용 계약 아래 일회성 사람들이 존재한다. 기억하지 않고 잊기도 쉬워졌다. 쉽게 쓰고 버리는 것과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뭐가 다르랴. 친구도 연인도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에도 쉽게 연을 끊는 시대가 되었다. 사랑도 우정도 단칼에 끊어지는 세상이 온 건가. 오래 기억될 친구, 너 아니면 못 산다던 애틋한 사랑은 어디로 갔나. 그 속에 존재하던 수많은 약속과 언약, 죽어서도 지킬 서약은 모두 사라진 걸까. 가장 존엄하다는 인간도 일회용으로 전락하고 있으니 얼마나 씁쓸한 세상인가.

일회용품들을 보라. 비록 일회용으로 만들어졌을 뿐 두 번, 세 번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 번 사용하고 쓰레기통으로 내쳐지는 일회용품들 속에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을 수많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나의 씁쓸한 자화상은 아닌지. 뒤늦은 후회 속에 수고하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으로 오래오래 기억되는 사람이기를 그려본다.

버리려던 컵에 다시 물을 붓는다. 조금 불편하면 어떠랴. 단 한 번으로 잊히는 그런 인연이 아니라, 그대 오래오래 내 곁에 남아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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