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선이 만난 사람] 윤경혜 JTBC플러스 트랜드 총괄 겸 콘텐츠 본부장

입력 2017-03-10 04:55:02

"직장 여성들, 즉흥 반응 말고 길게 보고 '플레이' 하길"

사진 이무성 객원기자
사진 이무성 객원기자

화려한 커리어 우먼.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다. 깔끔한 정장, 열띤 회의, 밤늦도록 이어지는 프로젝트 마감, 와인과 함께하는 저녁식사. 커리어 우먼에 대한 환상은 대략 이렇게 정리되지 않을까. 취업난에 한숨짓는 젊은이들에게는 어쩌면 허황된 사치일지도 모른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한 우물을 판 여성 리더를 만났다. 요즘 유독 주목받는 미디어그룹, JTBC플러스의 윤경혜 트렌드 총괄 겸 콘텐츠 본부장이다.

그는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해 20년 정도를 출판국 에디터로 일했다. 그 뒤 2000년, 세계적 여성패션잡지 코스모폴리탄 한국판을 창간해 편집장이 됐다. 이어, 2009년에 미국의 허스트그룹과 중앙미디어그룹이 합작한 잡지 허스트중앙의 발행인과 최고 경영자로 올라섰다. 작년까지는 매거진, 방송, 멀티플렉스, 문화사업을 아우르는 기업 제이콘텐트리의 최고 경영자까지도 역임했다. 흔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29년째 같은 영역에서 역량을 펼치고 있는 윤경혜 총괄은 스스로를 경력 29년 차의 직장인이라고 칭한다. 만나보니, 그는 여전히 자기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직장인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참 힘들지 않았을까 먼저 궁금하다.

▶기자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은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항상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힘들기도 하지만 내가 노력한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기자는 첫 인사로 명함을 주고받으면 상대가 누가 됐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 힘든 시절도 물론 있었지만 재미를 느끼면서 견뎌왔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발 먼저 다가가 경험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재미있었겠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나에게는 기쁜 날이 더 많았다.

-여성잡지 종사자에 대한 이미지는 강렬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치열하고 경쟁적이다. 유명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면 패션지 기자를 꿈꾸는 주인공이 괴팍한 편집장 눈에 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현실도 그런가.

▶여성 언론인에 대해서 이른바 '세다'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여성잡지 기자라고 해서 별다른 것 없고 패션잡지 영역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분업 과정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진다는 측면은 여느 직업군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사람의 업무에 훈수 두지 않으며 반대로, 남이 자신의 영역을 평가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잡지사 일은 상세한 매뉴얼이나 선배의 친절한 조언을 통해서 배울 수 없다. 속칭 맨땅에 헤딩하는 일을 반복하며 관록이 붙는다.

각종 대중 매체가 묘사하는 패션잡지 직업 세계 모습의 절반은 맞는 것 같다. 아마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때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패션잡지의 편집장은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날카로운 면모도 필요하다. 단순히 결재 서류를 점검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날이 서 있다'는 표현은 인성 측면에서 '착하다', '못됐다'의 차원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잡지 내용을 끌고 가는 편집장이라면 '한 끗'은 있어야 한다.

-패션잡지 영역은 무척 화려해 보인다. 역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패션잡지 기자들은 예쁜 옷을 입고 유명인과 함께 있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어떤 곳에 초점이 맞춰지느냐의 문제다. 지금 얘기한 것은 화려한 공간이다. 파티 장소, 혹은 유명인들이 많이 초대되어 있는 행사장 등은 패션잡지 기자에겐 일터이다. 매일 화려한 행사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사무실로 돌아와 밤새 밀린 일을 해야 한다. 결국, 파티나 화려한 행사 참여도 일의 연장이다. 패션잡지 기자들이 가끔 이런 곳에 취재를 가려면 일하던 복장으로 갈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패션 감각이 높아지기도 한다. 일반인들은 그런 일부의 모습을 보고 전체라고 오해한다. 유명인과 함께하는 행사장에서도 패션잡지 기자는 긴장을 놓을 수 없다. 현장에서 만나는 유명인으로부터 필요한 발언을 들어야 하고 현장 사진과 인터뷰 영상도 만들어야 한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섭외 스트레스도 크다. 이 모든 작업이 경쟁 회사 기자들과의 경합 속에서 이뤄진다. 그러니, 패션잡지가 다루는 대상이 화려한 것이다. 기자들은 우아하게 물 위에 떠 있는 백조의 수면 아래 발처럼 분주하고 바쁘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여성잡지가 화려하다. 일부 사람들은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특히, 잡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날씬하고 예뻐서 외모 지상주의를 조장한다는 지적도 있다.

▶사람들이 왜 잡지를 보는가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오늘보다 나은 나, 더 좋은 삶을 꿈꾼다. 그런데 현재 자신의 삶과 유사한 모습만 잡지에 나온다고 가정하면 어떨 것 같은가. 잡지에 날씬하고 예쁜 사람들만 나온다는 지적은 이미 전 세계적 경향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체형별 극복법' 시리즈를 내기도 했다. 독자의 반응에는 찬반이 모두 있는데, '친근감은 좋았지만 예쁘지 않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잡지는 글과 이미지를 통해서 영감과 꿈을 줄 수 있기를 원한다. 의도적으로 잡지를 화려하게 만들려고 하는 지침은 없다. 잡지가 화려하게 보이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광고다. 모든 기업들이 창의력을 극대화한 아름다운 광고를 선보이기 때문에 광고 비주얼이 화려하다.

그러니 잡지의 순기능도 생각해주면 좋겠다. 잡지는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감각과 통찰력을 키우는 데 기여한다. 최근에는 젊은 여성이 보는 잡지에 산부인과와 관련한 기사도 많이 싣는다. 독자 가운데 기사 내용을 보고 병원을 방문했다가 큰 병을 예방한 사례도 있었다. 또, 작고 낡은 집 고치기 전후 모습을 함께 담아주면 사람들은 그걸 보고 주거 공간 인테리어에 대한 조언을 얻는다. 다양하고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룰 때에는 잡지가 더 효과적이다. 요즘처럼 정보가 홍수를 이룰수록 전문가적 견해가 더욱 빛을 발한다. 잡지가 이런 역할을 담당한다.

-제이콘텐트리와 JTBC는 어떤 관계인가.

▶올해 회사 법인명이 제이콘텐트리에서 JTBC플러스로 바뀌었다. 방송계열사가 됐다. 이유는 디지털시대에 맞게 사업단위를 개편하기 위해서였다. 요즘 명함을 교환하면서 많이 듣는 말이 "어머, 요즘 가장 핫한 JTBC네요"다. 우리가 그동안 인쇄 매체 위주의 사업을 해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 디지털 시대에 맞게 다음 단계로 도약할 것인지 고민했다. 그래서 방송과 디지털 환경 그리고 트렌드 콘텐츠를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스마트폰 보급'이용 확대로 잡지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JTBC플러스는 어떻게 활로를 모색하고 있나.

▶다양한 플랫폼의 적절한 활용이다. 요즘은 연예인 화보 촬영 때 취재기자, 화보 진행기자, 영상 프로듀서가 함께 나간다. 대중은 이제 완성된 화보 컷 외에 인터뷰 영상이나 무대 뒤 모습에도 관심이 있다. 제작한 콘텐츠는 우리가 보유한 인터넷 사이트와 SNS 그리고 제휴 채널 JTBC2 등에 올린다. 더 많이 확산할수록 영향력도 커지고 독자층도 두터워진다. 이 때문에 기획 회의도 디지털부서와 잡지 영역이 같이 한다. 디지털시대에는 기사 게재 순간부터 독자로부터 반응이 온다. 인기 있는 기사는 클릭 수가 급증하고 클릭 수 높은 에디터는 주목을 받는다.

-여성 리더십에 대해 묻고자 한다. 최근 최순실 사태로 나라가 시끄럽다. 회사 조직을 이끄는 여성 리더로서 감회가 다르지 않은가.

▶이번 사태를 보면서 리더십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해오며 느낀 것은 결국 일은 사람이 한다는 것이다. 좋은 시스템도 운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리더의 용인술이 중요하다. 더불어,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최고 경영자로 임명된 후 그룹에 인사를 하러 갔다. 다른 계열사의 최고 경영자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분 말씀은 간단했다. "의사소통 잘하면 된다"는 것이다. 평생 언론사에서 근무한 사람에게 의사소통에 신경 쓰라고 해 의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이 가장 맞는 것 같다. 사내 임직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들이 맘껏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충분히 의사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리더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아야 한다. 리더도 가끔은 실수를 하지만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리더는 설령 자신이 한 잘못이 아니더라도 조직을 위해 당면한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한다. 힘이 많을수록 책임도 많이 져야 한다.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여성이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평균수명이 길어져서 요즘은 20년은 해야 한 분야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여성은 조직 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되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낸다.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봐야 하는데 순간을 못 참고 즉흥적인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나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아예 그만두기도 한다. 이런 행동들은 좋지 않다. 그런 면에서 남자들은 고단수다. 그들은 길게 보고 '플레이'를 할 줄 안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뻔한 얘기 같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지금도 새로운 잡지가 나오면 첫 페이지를 넘길 때 설렌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첫 장을 넘긴다. 그런데, 최근 멘토 활동을 많이 하면서 깜짝 놀라게 됐다. 청년 직장인, 대학생들과 주기적으로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의 전공을 스스로 결정한 경우가 드물었다. 나는 대학에서 내가 어떤 공부를 할지 스스로 관심을 갖고 찾았다. 그런데 요즘 대학생들을 보니 부모님이 전공도 선택해준다. 그마저도 전공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 대학생활을 어떻게 제대로 하겠나. 직업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라고 조언한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좋아 보이는지 주변의 의견을 물으라고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지금의 삶이 행복해 보인다.

▶나도 100점은 아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으니 삶의 1막은 그 나름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의 콘텐츠를 어떻게 개발할지 생각한다. 특정 공간에 갔을 때도 다른 콘텐츠와 어떻게 연결할까 고민한다.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가 가장 신나고 즐겁다. 최고 경영자가 되었기에 최근엔 실적을 다루는 일이 많다. 그러나 가장 행복할 때는 콘텐츠를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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