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속에서도 해가 손바닥만큼씩 길어지고, 햇볕은 언 땅을 녹이기 시작했다. 모든 시작은 작고 겸손하게 시작된다. 아란야(수행처)를 최정산 우록리 청련암으로 옮기게 되었다.
청련암은 양개 스님이 지었고, 임진왜란 때는 승군들이 집거하여 서산 스님과 사명 스님 진영을 모셨었다. 지금의 암자는 여러 번 화재로 1808년에 재건되었다. 소박한 6칸 건물로 구조는 왼쪽 앞과 건물 오른쪽 뒤에 방을 두어 새을(乙)자 모양으로 고식수법이 남아 있고, 법당과 요사채가 합쳐진 기능적인 건물로 인법당이라 부르며, 1995년에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기둥 대부분이 참나무로 세워졌다.
산중에는 찬란한 아침 햇살이 눈부시고, 오후에는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이 무상으로 주어진다. 아침나절의 산은 더욱 신선하고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솔숲 향기와 밤새 내린 이슬이 배어 있다. 오늘 아침의 책상에는 명자꽃 한 다발이 분홍과 흰색이 가시와 녹색 잎 사이에서 봄이 왔음을 전하고 있다. 70이 넘은 아진 씨는 천주교인이지만 이따금 불쑥 방문해서 나를 놀라게 하고, 꽃꽂이 작법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세월은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원숙과 열정을 준다. 누구나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 영혼이 주름지게 되는 것. 탐구하고 새로움을 가꾸면 사람은 녹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햇볕의 광합성을 통해서 그 자양을 먹고 산다. 열역학법칙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그대로다. 사람은 아무도 젊어지지 않고, 죽은 사람은 되살아 오지 않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를 특별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들도 엄청난 수의 분자로 이루어지는 것은, 생명의 근본 조건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무상한 기본 질서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햇볕은 삶의 전부이다.
2월은 바람의 달이다. 일교차가 심해서 장독대의 독이 터지기도 하는 것이다. 마른 가지마다 물이 오르고, 농부는 씨앗을 고르고 가지치기를 하며, 바닷가 어부들은 어구를 손질하며 출어를 준비하는 것이다.
정월 대보름, 마을 어귀에 달집을 높이 세우고, 불을 놓고 함성을 지르면, 최정산의 봄은 한껏 올 것이다. 돌담을 에워싼 이 도량은 본래부터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살았던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그렇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마음에 심상할 때에 절을 찾아 맑고 청정한 도량을 보고 정리되어 내려가서 그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그 무엇보다 안팎으로 세상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장로게'에서도 말씀하셨다. "홀로 있는 수행자는 범천과 같고, 둘이서 함께하면 두 사람의 성인과 같으며, 셋이면 마른 집과 같으며, 그 이상이면 시장바닥이다."
사람은 자신의 도량이 지금 어떤 삶을 이뤄가는지, 이루는지를 순간순간 점검하여야 한다. 그 투명하고 맑은 기운이 언제나 이웃에게 그대로 비추기 때문이다.
산중에 살면 우선 홀로 있어도 적적하거나 무료하지 않은 것은 좋은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규보 선생의 시에도 '산중에 사는 스님 달빛이 좋아 물병 속에 달과 함께 길어 담았네. 방에 들어와 뒤늦게 생각하고 병 기울어보니 달은 어디로 갔나.'
책 읽다 출출할 때, 차 한잔 마실라치면 길어 둔 물보다 새로 길은 물이라야 차 맛이 새로운 것은 차 맛은 곧 물맛에 있기 때문이다. 마침 보름달 둥근 달이 물병에 가득할 때 그 그윽함이 더하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거처 청련암에서 더 단순해지고 더욱 호흡이 깊어져서 모난 성격이 더욱 다듬어지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겨울철 지내기 위해서는 큰 도량이지만, 나 혼자 살지 않고 해와 달도 살고, 구름과 바람도 살고, 바람도 자고 간다. 좋은 인연에 감사하고 몸담아 사는 생활공간을 오염되지 않게 청정하게 사용할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약속한다.
방 한 칸은 언제나 찾아오는 손님에게 비워두고 좋은 종교는 친절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더딘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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