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밤낮, 눈이 내리고서야 겨울임을 알았다. 발목까지, 무릎까지, 허리춤까지. 눈은 쌓이고 쌓여 파괴되고 황폐해진 것들을 봉한다. 죽음의 밀실같이 까마득하고 내밀했던 협곡마다 눈이 소리 없이 쌓인다. 황토 빛 땅이 사라지고 말도 안 되는 순백의 풍경이 펼쳐진다. 웅장한 자연의 품 안에 폭 들어와 있는 모습은, 신비스럽고도 영험한 기운마저 감돈다. 우리는 모두 이 풍경 속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황량해지는 계절을 우리는 '겨울'이라고 했던가. 얼고, 터지고, 허기지고, 패배하고, 망해버린 채 주저앉은 기와집처럼 죽음과 소멸을 떠올리는 계절. 절망에 갇힌 절규가 뼛속에서 멍울지는 동안, 견디지 못해 극단의 길을 택하는 사람과 그래도 어떻게라도 견뎌보고자 어금니를 물던 사람들 사이에 겨울이 있었다. 종일 허덕여도 좀처럼 열리지 않는 길 앞에 얼마나 막막했을까. 천근만근 폐부를 짓누르는 중압감, 권태와 패배를 짊어지고 가는 그들 앞에 폭설은 재앙이었다. 차마 지옥이라 말하지 못해 겨울이라 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겨울을 견뎌왔을까. 온 삶을 통틀어 우리는 또, 왜 그렇게도 춥고 허기졌을까. 매서운 바람과 혹독한 눈보라와 벗어날 수 없었던 어둠. 그렇게 바짝 움츠러들었던 어제를 지나, 우리 지금 여기에 와 있지 않은가.
따뜻한 폭설이다. 우중충한 아침을 지나 눈은 적절히 녹아 협곡을 적신다. 폐허를 다시 일으켜 세우듯 부드럽게 녹아 무연하게 흘러간다. 헐벗은 나무들의 맨발을 지나, 침묵당한 채 그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숲을 지나, 아침이 일어서고 저녁이 내리는 곳까지 눈은 이다지도 따뜻하게 내린다. 지금 이 순간, 눈은 우리가 서 있는 대지 위로 이처럼 적당히 내리는가. 사흘 밤을 보내고, 세상에 묘한 위계와 질서가 깔린다. 오랫동안 한자리에 묶인 배들도, 가난하고 시린 기억들도 모두 푹푹 묻혀간다. 세월의 층이 쌓일수록 우리는 숨이 막히도록 혹독한 어제를, 오늘을 그리워하게 되리. 인기척이 없는 새하얀 환희 속에서 눈부신 고립이 펼쳐진다. 폭설에 갇힌 지금이 두렵지 않은 까닭은, 여태껏 내가 지나온 겨울이 헛되지 않았음이다. 눈밭을 헤치며 추운 것도 모르고 내달리던 동심의 겨울은 참으로 아름다웠지. 몸서리치도록 아파하며 건너오는 동안 나는 또 얼마나 단단해지고 견고해졌는지. 언젠가는 소멸하고 마는 허깨비 같은 폭설을 맞으러 나는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물어물어 어느 산골마을에 다다르고, 그곳에서부터 두툼해진 눈을 넉가래로 죽죽 밀어 길을 내리라. 오늘 내게 주어진 무게가 결코 무겁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먼 훗날 추억하기 위함이다.
지금 나는 가장 씩씩한 모습으로 폭설 속으로 걸어나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의 길을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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