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실낱처럼 가볍게 살다 – 김경미의 <비망록>

입력 2017-02-04 04:55:05

실낱처럼 가볍게 살다 – 김경미의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김경미, 부분)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잔잔한 음악이 가슴에 파문을 만든다. 쓸쓸한 속내를 감추려고 차가우면서도 맑은 겨울 하늘에 기대어 가문 웃음을 지었다. 많이도 말라버린 마음의 한구석이 서걱거리며 숨을 쉰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한 부분이 슬며시 살아온다.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도 꾸며 살고 있을까?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망록(備忘錄)은 어떤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둔 기록이다. 내 삶의 비망록은 존재하는가? 아니, 그런 생각들이라도 하면서 하루들을 살아가고 있는가? 밀려드는 일들, 벗어나고 싶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당혹감에 견딜 수가 없다.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혹시 지금 내 삶이 사막은 아닐까 하는 생각. 텔레비전 날씨 안내에서 '오늘 날씨가 좋다'고 한다. 웃기는 말이다. 언어에는 많은 편견이 존재한다. 맑고 화창한 것이 반드시 날씨가 좋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비가 내리는 젖은 날씨가 '오늘 날씨가 좋다'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만 달려가는 시간들 앞에서 난 언제나 무방비이고 무기력하다. 그래서 이렇게도 날씨가 좋은(?) 날, 난 아주 조금 쓸쓸하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는 살아왔을까? 웃기는 소리다. 사실 난 하고 싶은 것을 거의 하지 못하고 살았다. 언제나 최선보다는 차선을 선택한 삶을 걸었고 나는 그것을 최선이라 치부했다. 뱀의 머리 위를 걷듯 살고 싶었지만 언제나 낙엽 밟듯 시간을 누렸다. 선한 눈빛이 가장 깊은 것인 줄은 알았지만 자주 화를 내고 울기도 했다. 그러면 내가 하지 못한 것은 진정 무엇일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자 내 스스로가 무척이나 난감해한다. 구체적으로 그 하지 못한 일을 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지 못한 것은 결국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고 그건 내 몫이 아니었던 그런 삶이었던 셈이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거의 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생각한 그 마음이 부끄럽다. 알고 보면 삶은 나에게 그저 내준 것이 정말 많았다. 낙엽 밟듯 시간을 누리고 자주 화를 내고 울기도 한 것도 내 삶이다. 삶이 참 고맙다. 이 불가해하고도 역설적인 마음의 흐름. 이럴 때 비망록이라도 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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